얼음 깨기 (WELCOME)1) 열린 모임 4주차 사역을 위하여 함께 나누기 2)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가정이란?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찬송가 559장) ● 주 안에 우리 하나 모습은 (복음성가 기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사사기 14:4-6 ● 제목 : 이해가 되지 않기에 1) 본문 설교를 통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두 가지 내용을 나누어 보자. ● 4절 참고 ● 6절 참고 ● 상식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은? |
2) 담임목사께서 설교의 테마로 제시한 이성과 지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영역이 도리어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는 역발상의 은혜라는 말을 내가 이해한 은혜로 나누어 보자. ● 출애굽기 13,14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 참고 ●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사건 참고 |
3) 선포된 설교를 통하여 나의 삶에서 적용해야 하는 궁극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 이해와 이해되지 않음 ● 유익과 유익이 되지 않음 ● 가치의 변화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가가호호 춘계 대심방을 위하여(김문숙 셀) ② 2014년 봄 열린 모임 사역을 위하여 ③ 양육 중에 있는 지체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봄 열린모임 사역하기 ① 4주차 열린 모임: 파악된 베스트의 필요에 따라 반드시 그 필요를 채워주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4년 5월 2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76번째 강해) 본문 : 사사기 14:4-6 제목 : 이해가 되지 않기에
하나님은 삼손을 나실인으로 블레셋이라는 이방 나라에 의해 4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압제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 그를 태어나게 하셨고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마땅히 블레셋과의 전투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야 했지만 자기의 고향 소라를 떠나 블레셋의 땅으로 통치 기반이 넘어간 딤나로 이동을 했을 때 마땅히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행보로 여겨지는 대목이었으나 결과는 어처구니없게도 블레셋과의 싸움은 고사하고 그곳에서 정욕에 의거하여 눈에 들어온 여자를 아내로 삼겠다고 고집하는 행태를 보였습니다(3절).
당시 이스라엘의 결혼 법은 개인 간의 결혼 법이 아니라 가족 간의 결혼 법이었기 때문에 시댁 식구들이었던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며느리 감을 직접 보기 위해 딤나로 아들과 함께 내려 갔습니다(5절). 딤나로 내려가는 노정(路程)에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삼손은 부모와 잠시 공간적으로 함께 하지 않고 포도원으로 향했던 것 같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법도로 살아야 하는 삶을 거추장스러웠습니다. 나실인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지만 여자를 만나러 가는 삼손은 포도주 생각이 났고 습관적으로 딤나로 가는 노정에 익숙했던 포도원으로 간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하면 부모님들 모르게 그는 술집으로 발걸음을 향한 것입니다. 부모님이 이 일을 알면 또 잔소리를 할 것이 분명하기에 그는 은밀하게 포도원으로 동선을 홀로 잡고 그곳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삼손이 포도원에 이르렀을 때 젊은 사자 한 마리가 소리를 지르며 삼손에게 달려든 일이 생겼습니다(본문 5-6절). 갑작스런 일을 당한 삼손은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가 가지고 있었던 힘의 능력을 갖고 맨손으로 그 젊은 사자를 찢어 죽였다고 본문은 보고합니다.
이 일을 경험한 삼손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부모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앞서 설명한 그런 일련의 귀찮음 때문입니다.
삼손은 힘이 강한 자라는 선지식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삼손이 젊은 사자를 찢어 죽이는 정도는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지만 젊은 사자가 삼손에게 달려들 때 그 사자를 찢어 죽일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된 통로에 대한 이해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한글개역판 성경 번역은 이 구절의 주어가 삼손이었습니다.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개역 6절 전반절) 그런데 개역개정판은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개역개정 6절 전반절)로 번역되어 두 번역의 주어가 삼손이 주어였던 구절이 여호와의 영으로 주어가 바뀌어 번역되었습니다.
사자를 찢어죽이게 한 주체가 삼손이 아니라 삼손을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영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포도원에 있는 삼손의 그릇된 행태를 하나님께서 용인하신 꼴이 된 것입니다. 부모 몰래 포도원에 들어가서 포도주를 즐기고 있는 삼손의 그릇된 형태를 하나님은 보시고 계셨지만 하나님은 그의 일탈을 인정하셨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 14장 1-4절에서 삼손은 직무를 유기하여 블레셋에서 나라를 구원해야 하는 사명을 무시하고 개인의 육체적 욕망을 탐하기 위해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려는 일련의 모든 일탈 행위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것도 충격인데 오늘 이어지는 5-6절에서는 나실인의 규례를 벗어나 술에 취해 있는 삼손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도록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보내주셨다는 말로 해석 가능한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의문입니다.
민수기 22장에 기록된 브올의 아들 발람과 당나귀 기사에서 당시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은 이스라엘이 승승장구하며 광야에서 파죽지세로 가나안의 목전까지 올 수 있었던 그 한 복판에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나름 인정하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전략은 전쟁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알고 당시 이스라엘의 예언자였던 브올의 아들 발람을 돈으로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궤계와 정보를 빼내기 위해 그를 초청합니다.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 줄 것을 종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발람은 자기의 애용 가축인 당나귀를 타고 발락을 만나기 위해 모압을 향하여 가는 길에 한참을 지나 어느 한 지점에서 당나귀가 가는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가는 이탈을 합니다. 이유는 칼을 빼든 하나님의 사자가 당나귀 앞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나귀는 보는 하나님의 사자를 모름지기 예언자라고 하는 발람은 보지를 못합니다. 발람은 길을 이탈한 당나귀를 채찍으로 때려 다시 길을 가려하지만 당나귀가 세 번에 걸쳐서 길을 나아가기를 거부하자 발람이 화가 치밀어 올라 당나귀를 때리며 재촉을 하자 하나님께서 이제는 당나귀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합니다(민수기 22:28-30절). 기막힌 에피소드의 끝 가운데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발람이 보게 된 기사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발람에게 당나귀를 통하여 말씀하셨던 것처럼 미물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사사기의 본문을 주석하는 학자들은 젊은 사자는 포도원을 출입하는 삼손의 일탈된 행위를 가르쳐 주는 상징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만일 젊은 사자가 삼손을 공격한 것이 삼손의 그릇된 행태에 대한 경고의 상징이라면 그 젊은 사자를 찢어 죽일 때 하나님의 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삼손에게 강하게 임한 사실은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발람과 같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삼손의 손을 들어준 것이 됩니다.
도대체 이런 마치 하나님께 행하신 것처럼 보이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하나님의 지나친 삼손 편애로 보이는 본문 해석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몰아붙이기에는 궁색하기에 이론 신학의 근거가 아닌 목회 신학적인 차원으로 접근하고 해석한 답이 *내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영역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에 내려가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망각한 삼손이 여자에 눈이 멀어 극히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불신앙적인 행태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과정을 인정하셨던 이유를 정확하게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가 답입니다.
나실인으로 살아야 하는 삼손이 부모 몰래 포도원에 들어가 술 파티를 벌이자 미물인 젊은 사자가 삼손을 공격했을 때 상식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삼손이 사자의 공격으로 인해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도록 하셔서 그를 깨닫게 하는 것이 정답일 것인데 그러나 정 반대로 도리어 하나님의 영을 강하게 삼손에게 주어 공격하는 사자를 찢어 죽이는 능력을 삼손에게 허락하신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왜 허락하셨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답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받을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은, 나의 이성과 지성으로 해석이 되지 않으시는 분이기에 도리어 나는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겸손하게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 분께 엎드린다는 고백입니다.
만에 하나 나의 하나님을 나의 이성으로 다 이해하고 파악하여 해석할 수 있다면 내가 나를 믿지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홍해 가운데로 지나 간 사건(출 13:18)에서 ‘홍해’라는 바다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이유가 히브리어 '얌 수프'로 기록된 홍해를 직역하면‘붉은 바다’라는 개념보다는‘갈대 바다’가 더 정확한 번역인데 ‘수프’라는 단어는‘갈대’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자적인 해석을 근거로 모세가 이스라엘 200만 명의 공동체를 인도하여 건너가게 한 홍해는 오늘날의 홍해 바다와 같이 엄청난 바다가 아니라 단지 갈대 정도가 자라고 있는 사람의 무릎 정도 깊이의 그리 깊지 않은 강 정도이었기에 건널 수 있었던 것인데 출애굽기 기자가 이것을 과대포장 하여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8:23절 이하를 보면 가버나움에서 많은 기적을 보이신 예수께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것을 보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제자들에게 명하시는 장면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건너편이었던 게네사렛 쪽의 가다라 지방으로 이동합니다. 그 때 이동하는 갈릴리 한 복판에서 광풍을 만나 제자들은 주무시고 계신 주님께 구원을 요청하여 주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자 바다가 잔잔해 지고 구원을 받은 제자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마태복음 8:27절)
이 기사를 이성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갈릴리 호수는 주변에 가파른 절벽과 협곡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기에 작은 바람이라도 계곡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로 불어오면 큰 폭풍우를 야기했다. 특별히 저녁 이후에 부는 바람은 매우 강렬하여 엄청난 힘으로 수면을 치기 때문에 높은 파도를 일으켜서 배를 위협하였다. 그런데 때 마침 갈릴리 호수로 불어오는 바람이 잦아들었기에 이 일이 가능했다.”
두 기사 모두 이성적 해석으로 탁월하나 두 가지의 공통점은 오늘의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이성적 이해에 근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평가하고 이해하는 하나님이 당신의 이성적 테두리 안에서 충분히 공감이 된다면 도리어 신앙생활은 시간 낭비이며 불필요한 투자입니다. 반대로 도무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역상발의 은혜입니다.
갈대들이 자랄 정도의 깊지 않은 물로 애굽의 병사들을 수장시키신 하나님을, 기적을 부인하고 자연의 현상으로 파도와 광풍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는 그 광풍과 파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삼손처럼 깜도 안 되는 인간이 계속 실수를 범해도 그를 묵인하고 그를 사용하시는 도무지 이해도 안 되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처럼 보이지만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원망을 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더 겸손히 무릎 꿇게 하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얄팍한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만나면서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사야 55:8-9절과 요한일서 3:20절을 시인하게 하신 하나님을 높여드립시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가치의 변화는 나에게 이해가 되거나 이해가 되지 않거나 유익이 되거나 유익이 되지 않거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원히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인간의 이성으로 계산되고 좌지우지되지 않으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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