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05.18 셀 사역2024-04-22 12:30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1) 열린 모임 3주차 사역을 위하여 함께 나누기
2) 기억에 남는 선생님 추억하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시선 (복음성가)
●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절기 노래)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14:1-3
● 제목 : 내 눈에 좋사오니
1) 본문에서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서 직무를 유기했다는 설교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 삼손이 딤나에서 했어야 할 일:
● 삼손이 딤나에서 한 일:
● 위의 두 가지 사실을 비교하여 삼손이 직무유기 한 일을 나누어 보자.  

2) 삼손이 직무 유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를 무엇이라고 주일 설교는 선포하고 있는가?
● 히브리어‘라아’(보다)를 기초로 하여 설명해 보자.
● 민수기 6:1-2절:
● 헐몬 산에서 베드로 외 2명의 제자에게 펼쳐진 황홀한 광경이 사라진 이유:  

3) 주일 설교 테마를 나의 월요일부터의 삶으로 적용해 보자.
●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정해야 하는 도전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12:1-3)
● 내가 보기에 좋은 시선으로 사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마태복음 17:4)
●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자. (마태복음 17:5)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가가호호 춘계 대심방을 위하여(심재열 셀)
  ② 2014년 봄 열린 모임 사역을 위하여
  ③ 양육 중에 있는 지체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봄 열린모임 사역하기
  ① 3주차 열린 모임:
    베스트의 영적인 상태파악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5월 1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75번째 강해)
본문 : 사사기 14:1-3
제목 : 내 눈에 좋사오니   

그리스도인이라는 레테르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세상의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에서부터 정의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영적인 눈으로 믿고 바라본 사람들로 세속적 가치의 사람들과는 보는 관점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것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삼손의 청년기로 사료되는 시기입니다. 본문은 삼손이 탄생한 뒤에 그의 부모들에 의해 어떻게 나실인으로서 성장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된 채로 침묵합니다.
오히려 다짜고짜 삼손이 한 여자를 보고 집에 돌아와서 부모에게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떼를 쓰는 예상외의 기록으로 삼손의 시대가 열립니다. 사사기 기자는 분명 이 대목이 의미가 있어 이것을 보고하고 있는 갓이 분명합니다.

본문 1-2절에서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딤나는 삼손이 태어났던 고향 소라에서 서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오늘의 텔-엘 바타쉬 지역으로 추측되는 지역으로 이 지역은 원래가 단 지파에게 할당된 지역이었으나 당시 블레셋에게 통치권이 넘어간 이방의 지역이었습니다.

삼손이 왜 그곳으로 내려갔는지에 대하여 본문이 침묵하고 있기에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삼손이 자기의 직무를 태만히 여기고 유기했다는 것을 사사기 13:5절이 그 사실을 가늠케 합니다.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하나님이 삼손을 나실인으로 세우신 것은 당신의 백성을 압제하고 있는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삼손의 직무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는 것이었는데 그가 딤나에서 한 일은 엉뚱하게도 여자에게 눈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그가 원래 단 지파의 땅이었던 통치권이 이방 민족이자 적이었던 블레셋으로 넘어갔던 블레셋의 상징적인 도시 딤나로 내려간 것은 한 편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보로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사사로서 블레셋으로 넘어간 삼손이 마땅히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적의 도시에 가서 엉뚱한 일을 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본문 1, 2절에서 두 번에 걸쳐서 연이어 나오는 반복 구절이 ‘여자를 보고’(1절),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2절)입니다.
여기에서‘보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아'는 일반적으로‘본다.’라는 의미로 제일 많이 쓰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눈요기하다’라는 쾌락적 봄을 말하는 경우로도 쓰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후 문맥으로 볼 때 본문 1, 2절에서 삼손이 딤나의 여인을 본 것은 욕정적인 봄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말해주는 구절이 3절입니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삼손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대하여 삼손의 부모는 당연히 반대를 합니다. 부모들의 반대 이유는 혼합결혼을 율법에서 금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여자 중에 너의 아내 될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할례를 받지 아니한 블레셋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하느냐?는 질타이기도 했습니다. 부모들의 반대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의 떼씀이 3절 하반절입니다.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라는 번역을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자면 ‘그녀가 내 눈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을 영어성경 NRSV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를 위해 그녀를 취하게 해주세요. 그녀가 나를 즐겁게 해주기 때문입니다.”(Get her for me, because she pleases me.)

본문 3절 하반절이 주는 의미는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민족을 구원해야 하는 의미를 망각하고 여자를 정욕의 대상으로 보고 그 여자를 아내로 삼으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육비에 새겨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람은 내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교훈입니다.

삼손은 이 점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실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실인’이라는 말은 민수기 6장에 기초하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나실인의 율례를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민수기 6:1-2절)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은 하나님께 구별 된 삶을 살기로 결심한 자들이며 또 그렇게 드려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나실인으로 드려지면 반드시 나실인으로서의 서원을 지켜야 했습니다.
삼손이 나실인으로 부름 받았기에 그가 하지 말아야 하는 최소한의 금기가 있었습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입에 대지 말고, 시체를 멀리하며, 삭도를 대지 말아야 했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나실인의 이러한 삶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시선을 갖고 살라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보기에 좋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라는 신학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삼손은 이미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이런 운명을 갖고 태어난 자였습니다.

삼손은 이런 나실인으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와 또 하나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블레셋이라는 적의 손아귀에서 구원을 해내야 하는 사명입니다.
이 사명은 무의식이나 아니면 그저 그런 의미 없는 삶을 살 때 이룰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눈에 합당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시각으로 사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은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헐몬 산으로 추측되는 변화 산에 방문한 기사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주님의 모습이 변화되신 모습을 연출하셨습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는 변화였습니다. 주님의 변형만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기에 충분한 제자들이었는데 한 가지의 신비로운 일을 더 목격한 것은 주님이 구약성경의 예언자와 지도자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교제를 하며 말씀을 하시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현상은 꿈이 아니라 세 제자들의 현실에서 보여 지고 있는 생생한 드라마였기에 이들은 무슨 말을 할지 모를 정도로 영적인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두렵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광경을 놓치지 않고 싶었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앞에 나서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태복음 17:4절)

베드로의 이 고백이 큰 잘못이나 실수처럼 보이지 않지만 이 고백이 있자마자 일어난 후속 반응은 그 아름답고 황홀했던 광경은 사라지고 구름 사이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태복음 17:5절)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황홀한 광경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주님의 명령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놀라운 황홀경을 유지하려는 베드로와 나머지 두 제자의 꿈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사도 마태는 마태복음 17:8절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은 베드로의 시각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만이 보였다는 것은 베드로의 시각은 접고 주님의 시각, 주님의 눈으로 살라는 상징적이고 영적인 교훈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실수는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시각대로 사는 것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에 흐르는 면면에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남유다의 멸망 이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일찍이 간파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에스겔 34:18-19절)

하나님의 꼴(말씀)을 무시하며 사는 삶은 결국은 망함입니다.
하나님의 맑고 거룩한 물(생수)을 무시하고 더럽힌 자들의 삶이 유다를 망하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이것은 소위 말해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입니다.
그러기에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삶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시각은 산에서 내려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키며 돌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시각은 헐몬산에서 영적인 개인의 영성에 만족하며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베드로에게 그 시각을 지울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가 주님이 명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말을 들으며 그의 시각대로 살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시각을 존중했고 자신의 눈에 좋은 대로 요구하며 행동하여 인간의 눈요기에 좋은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삼손이 실패한 사사로 역사에 남는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요소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트레빈 왁스 목사의‘일그러진 복음’에서 “종교는 내가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원칙 하에서 가동되지만 복음의 작동 원리는 나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때문에 순종한다는 원리로 작동된다.”라고 갈파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보는 눈이 다른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시선은‘나’에게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시선은‘예수 그리스도’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내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사는 백성들은 실패한 삼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사는 백성들은 승리할 수 있는 영적인 삼손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고정된 시선으로 히브리서 12:1-3절의 말씀을 상기하며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