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 없는 단어입니다. ‘말빨’도 그렇고 ‘영빨’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지만 이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전자는 국어사전 ‘말발’ 즉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말을 따르게 할 수 있는 말의 힘’이라는 단어를 강하게 표현하는 속어이고, 후자는 같은 맥락으로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이 행하는 영적인 능력을 강하게 표현하는 세간에서 회자되는 속어입니다. 속어이기에 별로 바람직한 단어는 아니지만 그 안에 내포된 뜻을 전달하기에 강한 표현이기에 저 역시 이 단어를 사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적어도 이런 오기를 갖고 말입니다. “목사가 ‘말빨’이 세면되겠는가, ‘영빨’이 세야지!” 문제는 이 능력이 수명을 다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말빨’은 그렇다손 치고 목사가 ‘영빨’의 수명을 다했다면 목회를 되짚어 보아야 하는 위기가 도래했다는 데에 그 치명상이 있습니다. 세인교회를 개척하여 섬긴 지가 금년 4월이 되면 꼭 10년이 됩니다. 더불어 정글 같은 목회의 현장에 뛰어든 지 32년째가 됩니다. 젊은 목회자 시절에 혈기 충만했던 일로 시행착오를 경험했던 일을 돌이키며 과거의 일을 타산지석 삼는다손 치더라도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세인공동체를 섬겨 온 지난 10년이라는 세월은 적어도 나에게는 지난(至難)한 세월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지난함은 교회의 교회답지 않음에 대한 투쟁이요, 성도의 성도답지 않음과 목사의 목사답지 않음에 대한 예외 없는 항거로 인한 지난함이었습니다. 이 투쟁과 항거함은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여러 차례 말씀하신 그대로 ‘너희가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다시 말하노니’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이자 상투적인 것과 식상한 것에 대하여 용납하지 않겠다는 목사가 갖고 있는 최소한의 ‘영빨’에 근거한 자존감 때문이었습니다. 헌데 근래 들어 이 지난한 ‘영빨’에서 서서히 지쳐가고 있습니다. 지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나도 편안하게 목회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불일 듯 일어나 몹시 혼돈스럽고 당황스럽습니다. 왜일까? ‘영빨’의 수명이 다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정말로 눈물로 엎드려 이렇게 되어 가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으로 힘들게 무언가를 ‘영빨’을 갖고 권면해도 듣지 않으려는 교회들이 주변에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앙이 문화로 여겨지는 것은 재앙이라고 말해도 그것이 왜 문제냐고 대드는 사람들이 종교인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취미생활이나 레저 활동이 아니라고 말해도 고개를 저으며 몰라라 하는 전형적인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는 교회들이 즐비해지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 목사로서 이 ‘영빨’을 계속 유지해 나아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헷갈림이 요즈음 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근래 들어 건강에 대한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신호들이 나타나고 있어 육체적으로 많이 고단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하나님께서 날마다 공급하시는 ‘영빨’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흔들리고 있는 ‘영빨’은 목회의 무기력함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해서 끝까지 목사로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제는 분명한 선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목사로서 ‘영빨’의 자존감을 포기하고 나 역시 그냥 물 흐르는 데로 편안하게 가야할지, 아니면 ‘영빨’이 흔들리지 않도록 내 스스로가 다시 재무장하든지를 말입니다. 주군께 지혜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극히 세속적인 ‘말빨’로 먹고 사는 이 시대, 그래도 ‘영빨’은 목사의 마지노적인 자존감인데….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