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실, 2018년 12월 31일과 2019년 1월 1일은 특별한 날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들에게 주어진 수없이 많은 날 중에 또 주어지는 평범한 날입니다. 다만 인간이 그 날에 대하여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하기에 들썩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이 두 날에 대한 우리들의 삶의 태도는 매일의 날에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또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냥 지난 365일을 되짚어보는 것은 이벤트화 시켜서 뭔가를 또 다시 새롭게 계획하고 떠벌이려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내 자아를 성찰해 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될 듯싶습니다. 금년에 제일 잘 한 일이 무엇일까? 사유하다가 섬기는 세인교회의 강단에서 예수를 사수(死守)한 것이라고 결론 맺었습니다. 에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목사가 다 그렇지 뭐! 너무 식상해, 상투적 멘트야! 반응이 이렇게 싸늘하십니까? 그러십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정말로 잘한 일은 예수를 사수한 것입니다. 2018년을 살아내면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일은 오늘 내가 살고 있는 현장을 출애굽기 32장에 나타난 모세 없는 시내 산 난장(亂場)의 현장으로 세인교회를 만들라는 압박이었습니다. 음으로 양으로 조여 왔던 이 압박은 정말로 현장 목사로서 견뎌내기 버거운 폭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해! 네가 잘난 게 도대체 뭐 길래 그렇게 고집이 세니! 너도 별 거 아니야! 시내 산 밑에서도 우리들이 만든 금송아지에게 드린 건 우상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이름 지은 존재에게 드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거잖아! 다른 게 아니라 시대에 부합한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 달려간 것 것뿐이라니까! 다른 복음이 아니라 똑같은 건데 그렇게 유별 떨 것 없잖아! 너도 도찐개찐인데 잘난 체 하지 마!” 하루에도 수없이 듣는 이런 비수들이 날아들 때 심장을 강타하는 타격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5젼 전, 소아시아의 7개 교회를 탐방하는 성지순례 때 바울이 도보로 걸으면서 죽음의 위기를 수없이 경험했던 타우르스 산맥을 고급 리무진 버스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너무 황송해서 두 번째 넘을 때는 남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산맥을 도보로 걸으면서 넘었던 바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도대체 얼마나 주군을 향한 사랑이 컸기에 이 무모한 짓을 감당했단 말인가! 그러다가 불연 듯 저에게 스며들었던 감동 중의 감동은 사수(死守)함이라는 감동이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교회는 부당하게 세상 안에 머무를 수도 있고, 부당하게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행위는 모두 세상을 본받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과 ‘다른 모습’을 지녀야 한다. 그 모습은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이다.”(본회퍼, ‘나를 따르라’ 이신건 역, p,311.) 왜 교회가 예수를 사수해야 하는지를 알려준 고언(苦言)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나 성도는 전부가 예수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타협은 없습니다. 2018년도 그랬지만 2019년도 역시 또 그럴 것입니다. 세인교회와 이강덕 목사는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녕 아무 것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