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열 번째 강해) 제목: 아로마 테라피 본문: 고린도후서 2:12-17 서론) 요즈음 사람들에게 참 많은 인기를 얻으며 종편 채널에서 방영되는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아내가 저에게 이 드라마는 참 따뜻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어 띄엄띄엄 시청했습니다. 의대 동기생 5명이 학교를 졸업하여 같은 병원에서 각기 다른 의학 전공 부서의 전문의가 되어 펼치는 말 그대로 의사 같지 않은 소박한 사람 사는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가끔 시청할 때마다 현실이 아닌 드라마답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저런 의사들이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시청하게 되면 끝까지 보는 유일한 드라마가 되었습니다. 원래 드라마를 소재로 설교 예화를 쓰는 경우도 거의 없어 생소하고 드라마 이야기를 하게 되면 보신 분들만 이해가 될 것 같아 조금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내용 자체가 너무 진솔한 사람 이야기가 많아 제가 시청한 장면 중에 한 대목만 잠시 말씀드리며 설교의 문을 열까 합니다. 그 드라마에 나오는 다섯 명의 의사로 분한 캐릭터 중에 저는 산부인과 전문의를 맡은 주인공의 면면을 특히 좋아합니다. 그가 던진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담기는 메시지가 많아서입니다. 자연 유산을 두 번이나 한 뒤, 세 번째 임신을 한 산모가 찾아와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아파하며 주인공에게 울면서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 임산부는 유산을 염려하여 심히 걱정하고 두려워하는데 산부인과 전문의인 주인공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조심하라고 산모하게 말을 합니다. 듣는 이로 하여금 너무 성의 없는 것 같은 조금은 영혼 없는 말투로 말입니다. 그러자 임산부가 울면서 주인공에게 이렇게 야속한 마음에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던집니다. “선생님은 저와 같은 환자를 너무 많이 만나서 진료하시다보니 이런 병은 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시죠?” 이 질문을 받은 주인공은 임산부에게 반전의 한 마디를 전합니다. “유산이 왜 병이죠? 유산은 병이 아니에요. 그러니 죄책감을 가질 이유도 없고 아파할 것도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조심해서 건강하게 출산하면 되는 겁니다.” 주인공의 이 한 마디는 아이를 임신한 엄마의 병 때문에 아이를 유산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임산부에게 가장 영혼 충만한 위로의 메시지가 된 셈입니다. 마침 이 내용이 담긴 방송을 보다가 매 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여 선포하는 목사로 살고 있는 나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 뱉은 말 한 마디는 그 사람의 정신이요, 철학이자 삶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삶의 응집하자 농축된 엑기스인 말 한 마디 중에 누구에게든지 감동으로 엮어지는 경우는 그 말에 ‘아름다운 향기가 있는 삶’이 있다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마치 산부인과 전문의로 분한 주인공의 내공이 있는 말의 향기처럼 말이지요. 이 드라마의 대본을 쓰고 있는 작가가 이우정이라는 ‘응답하라 ○○○○’의 작가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드라마 역시 감동 충만 이었거든요.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낸 사람의 향기와 냄새는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줍니다. 영향을 미칩니다. 심지어는 한 사람의 삶에 큰 변화를 주기까지 합니다. 결국 한 사람의 삶의 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낸 삶의 감동이 있을 때입니다. 즉 어떻게 살았는가의 삶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과 같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내야 하는 감동적인 삶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 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세 번째 편지인 눈물의 편지를 써서 디도에게 맡겼다고 했습니다. 이 편지에는 자신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한 단호한 경고가 담겨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의 적대자들에 대한 유화적인 메시지도 함께 실려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을 지난 강해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본문은 에베소에서 세 번째 편지를 써서 디도에게 전달할 것을 명령했던 바울은 디도에게 일을 마치고나서 고린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에베소 지경의 한 지역이었던 드로아 지방에서 만나자고 했는데도 디도가 그곳에 오지를 않자, 세 번째 편지 전달 이후의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해 하던 바울은 급한 마음으로 직접 디도가 방향을 틀었던 마케도냐로 넘어가서 그를 만나게 되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심정을 본문 12-13절이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이제 이렇게 마케도냐로 직접 동선을 옮긴 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 교회에 대한 보고(5:5)를 받고 이어지는 고린도후서 2:14부터 무려 7:4절까지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쓰는 네 번째 편지에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장문의 변호를 남깁니다. 왜 이토록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하게 변호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을까?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개괄적인 그 이유를 함께 살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 변호에 대단히 강하게 어필한 이유는 결코 개인의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한낱 신기루와 같은 세속적인 자리에 연연하여 그 자리를 누구에게든지 빼앗기지 않으려는 그런 비 영성적인 욕심 때문이 아니었음을 살폈습니다. 단지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강력한 방어 의지를 표명하며 적극적으로 사도권을 변호한 이유는 그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도, 즉 십자가의 도라는 결코 양보하거나 뒤로 물러설 수 없는 복음적인 메시지의 마지노선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 권세 있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여 받은 사도의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이 권위를 가지고 선언했던 십자가의 도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자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핵심적 가치인데 본인의 사도권이 무너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구원의 도가 순식간의 무너질 것이 너무나 자명하기에 그는 강력하리만큼 고린도후서 2:14-7:4절까지의 장황한 여백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부연하며 변호하게 됩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은 그 초기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주목하고 또 주목해야 하는 본문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 변호의 메시지를 이끌어간 내용입니다. 저는 본 서의 두 번째 강해에서 사도라면 적어도 세 가지의 필요충분조건에 합한 자여야 했음을 피력한 바가 있습니다. ①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복음 사역을 위임받는 자입니다. ③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 변호를 위해 이 세 가지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변호한 구절은 본문에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 변호를 위해 끄집어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본문 14-15절을 읽겠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바울이 내세운 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학문적이거나 신학적인 근거가 아닌 전혀 다른 근거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살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내 몸에서 풍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냄새요, 향기라고 허를 찌릅니다. 이 본문에서 사용된 두 단어 즉 냄새와 향기는 단어 자체가 다른 단어입니다. ‘향기’는 ‘유오디아’, 그리고 ‘냄새’는 ‘호스메’라는 헬라어의 번역입니다. 전자는 제단에서 분향할 때나 나는 향기를 의미하고, 후자는 번제를 드릴 때 나는 냄새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결국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셈입니다.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의 조석민교수가 이것에 착안하여 본문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두 단어는 모두 향기 또는 냄새로 동일하게 번역할 수 있다. 향기와 냄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매우 강력하여 널리 퍼져 나가며,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한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유사하게 눈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조석민, “이해와 설교를 위한 고린도후서 주석”, 이레 서원,pp,78-79.) 조석민 교수의 주석에 동의할 때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본문에 담겨 있다는 점에서 오늘 설교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 바울의 사도적인 권위는 인위적인 가공의 결과물이 아니라 철저한 삶의 결과물이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내뿜는 향기와 냄새가 권위의 근원이었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성찰입니다. 그래서 이 교훈은 무겁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양보하지 말고 마음에 새겨야 하는 명제입니다. 마태복음 7:28-29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이 구절이 주는 영적 깊이는 대단합니다.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을 산에서 들었던 수많은 백성들의 소회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서기관의 그것과 같지 않은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권위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가르침의 권위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 사람들 즉 산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가 서기관의 그것과 다르다고 표현했을까? 충분히 그 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3:2-3절을 제시하겠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마태복음 23장에 무려 일곱 번에 걸쳐 주님이 경고하시는 책망의 대상이 서기관입니다. 왜 서기관은 이렇게 질타의 대상이자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의 권위가 없었습니까?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어떠하셨습니까? 사도행전 1:1절을 눈여겨보기를 바랍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이 구절은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구절입니다. 영어성경 BBE 번역을 읽어드립니다. “I have given an earlier account, O Theophilus, of all the things which Jesus did, and of his teaching from the first, 직역하겠습니다. “오, 데오빌로여 나는 예수께서 행하셨던 모든 것과 그 다음에 처음으로 가르치셨던 것에 설명을 받았습니다. 순서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셨던 것을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먼저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신 것은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영적 권위의 출처가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가공적인 인위적 작품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신 것들의 자연적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예수님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었던 바울도 바로 이 점에 천착했습니다. 바울도 자신이 갖고 있는 사도라는 권위를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천재라는 무슨 학문적인 근거로 나타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배경 역시 나는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며,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는 진골, 성골 같은 출신 성분의 고급 짐에 기인한 것도 아님을 밝힌 것입니다. 단지 바울이 사도로서의 권위를 주장한 배경이 그가 어느 곳이 있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와 냄새를 풍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도 자신이 가르치고 권면했던 일체의 영적인 교훈 역시 삶으로 본인 스스로가 먼저 실천하려고 했던 것만 감당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재론하지만 영적 권위는 철저하게 내 삶의 결과물로 세워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입장 전달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무슨 말입니까?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향기와 냄새를 풍긴 자들은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자들이지만, 반대로 전혀 그렇게 삶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지 못한 자들은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자들이라는 경고를 선포한 것입니다. 사망에서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당연히 바울의 사도권을 거부한 자입니다. 지금까지의 해석이 본문 16절까지의 해석입니다. 이상의 본문의 해석을 통하여 오늘의 설교를 지금의 언어로 적용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고 있는 여러분은 지금 어떤 향기와 냄새를 지금 풍기면서 살고 있습니까? 악취입니까? 향기로운 아로마(향기)입니까? 여러 가지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낼 수 있겠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하려고 합니다. 바울의 거부한 자들을 바울은 본문 마지막 17절에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수많은 자들이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역시 바울의 사도권을 거부하는 자들을 향한 비판입니다. ‘혼잡하게 하다.’라는 헬라어 단어 ‘카펠류오’의 원뜻은 ‘포도주 원액에 물을 타서 희석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될 때 포도주는 순수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단어로 바꾸어 17절을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으로서 발해야 할 향기나 냄새를 풍기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는 비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악취를 풍기는 자들은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을 희석시켜 흐리게 하는 자들입니다. 왜 말씀을 희석시킵니까? 말씀에 대한 부담 때문입니다. 해서 이렇게 변질시킵니다. 부담되는 말씀의 본문이 나오면 언제나 이렇게 변질시킵니다. 21세기에 이 말씀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저는 이 부분을 인정합니다. 성경의 본문 텍스트가 쓰여 졌을 때의 문화, 배경, 사상, 제도, 종교 그리고 삶의 정황들이 21세기의 지금의 정황과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을. 그러므로 정확한 신학적인 해석과 본문 연구를 통해 21세기에 걸 맞는 성서 해석의 모양새로 본문 해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동의하며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가 염려하는 것은 성경 해석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해석이 아닙니다. 진짜로 염려하고 경계하는 것은 성경 해석의 자기 중심화입니다. 이 방법은 21세기적인 해석을 빌미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질 나쁜 행위입니다. 지난 수요일 욥기 해석을 통해 인용했던 류호준 교수의 글을 주일 예배에 다시 전 교우들에게 선포하고자 재인용합니다. 한국교회가 뼈아프게 통감하고 돌이켜야 하는 신앙풍조를 ‘자기중심적 신앙’이라고 질책합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현대인들은 철저하게 ‘나는-나의-나를’(I-MY-ME)이 중심이 되는 ‘미-제너레이션’(Me-Generation)의 사람들입니다. (중략) 그래서 이런 세대에 살고 있는 자들은 신앙의 기초가 언제나 이렇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가 내게 무엇을 해 주신다는 겁니까? 교회에 나오라 하셨으니 나가는 보겠는데, 교회는 나를 위해 무엇을 제공합니까?”((류호준, “교회에게 하고픈 말”,두란노,pp,18-20.)
이러면서도 너무도 당당하게 나는 예수를 믿는 자라고 떠벌이는 것이 미-제너레이션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성찰합시다. 멀리가지 말고 적용합시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혹시 미=제너레이션에서 자유롭습니까? 혹 이 자화상이 나는 아닙니까? 성서해석 조차도 ‘뼛속까지 나’ 중심의 해석을 행하다면 그 자체가 절망이지 않겠습니까? 국립수목원장을 역임한 나무 박사인 신준환 박사는 그가 쓴 글에서 대단히 중요한 갈파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생 위에 탄생하고 살아간다. 나무가 크는 과정은 수많은 잎을 떨어뜨리는 과정이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은 자신의 모습도 잊어버리고 새로 태어나는 과정이다. 우리가 성장하며 발전한다는 이야기는 익숙한 우리 모습을 탈피하고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인간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신준환, “다시, 나무를 보다,”RHK,p,173) 기가 막힌 성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향기를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고, 맡고 싶은 냄새를 풍기려면 ‘나’중심의 신앙화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합니다. 나를 철저하게 버려야 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복은 12:24절은 기독교신앙인에게는 또 다른 황금률이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나를 잃어버리지 말라고 불교는 강조하지만, 기독교의 핵심은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지 않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발하거나 냄새를 피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영적 권위는 말씀을 나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말씀의 진의를 왜곡하는 그래서 말씀의 의미를 혼잡하게 하는 자가 아니라 내 삶의 현장에서 나를 버리고 이타적 삶을 살아낼 때 자연스럽게 내 몸에서 발하는 아름다운 향기요 냄새가 곧 권위인 것입니다. 이 권위는 나를 살리고 또 다른 사람을 살리는 위대한 능력이며, 권세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14일자 경향신문에 20세가 되는 성년들에게 기념으로 선물할 세트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아주 잘 생긴 훈남 남성 모델과 미인인 여성 톱 모델이 들고 나온 성년의 날 기념품 세트는 향수와 핸드크림 기프트 세트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을 담고 있는 기사의 제목은 이것이었습니다. “향기로운 성년의 날 선물은 향수 브랜드 팁○○로” 제 생각에 그림에 나온 모델들은 막 성년이 된 20세 남녀 모델로 추측됩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화장을 하지 않아도 그냥 제일 아름다운 나이입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몸에 뿌리는 향수 냄새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그들이 사람답게 살아내는 삶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리스도인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살아내야 할 그리스도 예수께서 걸어가셨던 삶을 살아낼 때 자연적으로 발하는 그리스도인의 향기와 냄새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교사주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사들이여! 내가 맡고 있는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은 여러분이 말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와 냄새를 아이들이 맡을 때입니다. 어디 교사뿐이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모두 해당되는 교훈입니다. 의학적인 신조어 중에 ‘아로마 테라피’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향기 요법입니다. 제가 편두통 증상이 너무 심할 때 서재에 페퍼민트와 라벤더 허브 잎을 사서 그 차를 끓여 냄새를 맡아 통증을 완화하는 시도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허브 향기는 정말로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오늘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결과물에 아로마(향기)가 배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대 사회적으로 또 대 교회적으로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 향기들을 발하여 주변을 치유해 나아가는 아로마 테라피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너는 그리스도의 향기라 너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너를 통해 생명이 흘러가리 너를 통해 생명이 흘러가리 너는 그리스도의 향기라 너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너를 통해 사랑이 흘러가리 너를 통해 사랑이 흘러가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