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1:12-24
서론)
신학교 선배 중에 아주 무서운 선배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송사로 해결하는 선배입니다.
아마도 이 선배는 목사이기는 하지만 고린도전서 6:1-8절에서 바울이 말한 경고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선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선배는 자신에게 무언가 불리한 일이 오면 언제든 세상 법정으로 그 일을 끌고 가서 상당한 이익을 얻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손해 보지 않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선배를 알고는 있지만 존경하거나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선배가 택한 방법은 목사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정말로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은 일들을 만납니다.
너무 억울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회생활이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 일을 당한 본 경험은 매 일반일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대차게 싸워 정면 돌파를 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인이기에 많이 참는 편이십니까?
우리는 그 동안 배워 온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39-41절 말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이 말씀이라 언감생심 대적하기보다는 참는 일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론적으로 주님이 하신 이런 말씀이니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면 참는 것이 학습화되어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억울해도 손해를 보고 마는 그런 삶을 아마도 더 많이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조금 위로가 될까요?
참 잘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19-20절을 믿는 우리들이기에 참 잘하셨다고 격려해 드리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자, 이제 오늘 설교의 목적을 이 즈음에서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참는 삶을 살아내는 것은 언급한 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해야 하는 삶의 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참는다는 것과 침묵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불의를 참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참아냄이 아닙니다.
이럴 때 우리들이 곱씹어야 하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37-40절 말씀입니다.
종려주일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시고 입성을 합니다.
이 광경을 보던 제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가뜩이나 예수에 대하여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던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의 환영 모습을 보고 불만을 제기하며 제자들의 외침에 대해 책망하라는 압박을 예수께 가합니다.
이 압박을 받으신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보이셨던 반응을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9:40)
그렇습니다.
주님의 단호한 반응은 이것이었습니다.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본론)
본문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뭔가를 해명하는 듯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자세히 접근해 보십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마케도냐 지역에서 썼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잃어버려 저와 여러분이 읽을 수는 없지만 ‘눈물의 편지’라고도 하는 세 번째 편지 써서 디도에게 보냈는데 디도가 바울이 거주하고 있었던 에베소로 귀환한 것이 아니라 마케도냐 쪽으로 돌아왔다는 급보를 받은 바울이 직접 마케도냐로 가서 디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디도는 고린도의 상황을 바울에게 보고했는데 50:50 정도의 보고를 합니다.
다시 말해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 중에 바울이 쓴 세 번째 편지를 받고 약 반수 정도가 다시 복음을 회복된 반면, 아직 또 다른 반 정도의 지체들은 여전히 바울에게 냉소적이라는 보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보고를 받은 바울이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네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를 마케도냐에서 작성했다고 보는 것이 복음주의권 학자들의 동의 내용이며 그것을 교회가 수용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당시 시대적, 그리고 상황적 배경을 다시 전제하면 오늘 본문 이해가 한 결 쉬워집니다.
어느 타이밍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네 번째 편지를 쓰기 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선 약속을 한 듯 보입니다.
내가 조만간 고린도를 방문하여 지체들을 만나겠다는 약속을.
그런데 그 약속에 대해 무슨 이유인지를 모르겠지만 바울 쪽에서 철회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고린도 교회의 지체들은 바울이 대단히 경솔한 자로, 아니면 신의가 없는 자라고 공격한 것 같습니다.
물론 바울을 이렇게 공격한 자들은 바울에 대하여 여전히 냉소적인 입장을 보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갖고 있었던 계획 즉 약속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본문 15-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바울의 계획은 사뭇 분명한 계획이었습니다.
마케도냐를 떠나서 고린도에 갔다가 다시 마케도냐로 돌아간 후에 두 번째로 고린도에 방문한 뒤, 유대로 복귀하는 스케줄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이 말해주고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그 이유까지는 설명드릴 수 없지만,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로 인해 고린도교회의 부정적인 지체들은 바울을 맹비난한 것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에두른 바울의 표현이지만 경솔하다는 표현 하나만 보더라도 바울에 대하여 가뜩이나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자들은 바울의 고린도 교회 방문 취소를 호기로 삼아 바울은 일구이언하는 신실하지 못한 사람, 정직하지 않은 사람, 가벼운 사람 등등으로 매도하여 바울을 힘들게 한 것이 정황상 분명해 보입니다.
본문만 놓고 보면 바울이 공격당하는 것에 대하여 자업자득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충분한 여지가 있지만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본문의 내증을 연구하다보면 그렇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숨어 있는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상존하고 있던 바울의 적대자들의 공격에 침묵하지 않았다는 데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으로 자신의 입장을 항변합니다.
그 내용인 본문 17-24절을 현대어 번역 성경으로 교우들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계획을 바꾸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가 아직 확고한 결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나도 이 세상 사람들처럼 사실은 ‘아니오’라는 뜻으로 ‘예’라고 한 것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실하신 것처럼 나도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내가 ‘예’라고 한 것은 그대로 ‘예’입니다. 디모데와 실루아노와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오’는 뜻으로 ‘예’라고 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언제나 말씀하신 그대로 실천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리 많은 약속을 하나님의 약속일지라도 모두 다 실천하고 완성하십니다. 우리가 그 분의 신실하심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그 분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우리를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또 우리를 사도 임명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신 분이 바로 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보증으로 우리에게 인을 치시고 우리 마음속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고 나는 조금도 거짓이 없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내가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이런 저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지시할 생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굳건한 믿음 위에 서 있으니 여러분이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는 도울 뿐입니다.”
이상의 구절을 읽다가 저는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왜?
바울의 절절한 진정성을 체휼했다고나 할까요, 뭐 그런 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연하면 이런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다시 가지 않은 것은 가벼워서도 아니요, 경박해서도 아니며, 신실하지 못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지 않은 이유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자정능력을 믿고 지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창립자입니다.
그리고 바울에게는 지금 막강한 동역자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실루아노, 디모데, 디도 등등입니다.
그의 위상은 대단히 컸을 것이 분명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옹호하고 있는 지지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바울에 대하여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자도 함께 존재합니다.
바울이 이런 상태에 있는 고린도에 가게 되면 그가 생각하고 있는 쪽으로 압박하게 될 것은 물론이고 잘못하다가는 적대적인 자들에 대하여는 적의를, 지지자들에게는 호의라는 감정의 폭을 갖고 기울기가 기울어질 수 가능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갖고 있는 연약한 사람이기에 말입니다.
바울은 이런 이유로 본문 24절에 있는 말씀처럼 고린도교회에 있는 지체들의 믿음을 주관할 수 있는 그 원인 제공을 미연 방지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 방문을 포기한 것입니다.
다만 중보하며 자정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온전한 믿음으로 바로 서기를 기대한다고 밝힌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런 의지를 본문 23절에서 이렇게 표현하며 자신의 고린도 행 취소를 항변합니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이제 저는 이런 바울의 절절한 진정성을 담보한 본문 메시지를 통해 대단히 중요한 오늘의 레마를 전하고자 합니다.
※ 영혼을 살리는 일에는 결코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교회에 상존했던 적대자들의 공격은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일로 치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공격과 왜곡에 대하여 바울은 흔히 하는 말로 개가 짖는 소리로 무시하며 말을 맞추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만큼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의외로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하여 조목조목 말하듯이 대응하는 발언을 비교적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그랬을까?
학자들이나 설교자들에 따라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저는 오늘 본문의 팩트를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바울이 강력하게 오늘 반대자들이 내뱉는 공격에 대한 반격 겸 변을 하는 이유는 침묵하고 있을 때 다칠 수 있는 반대편의 영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바울을 지지하고 있는 한편의 사람들에게 왜곡의 변 때문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 오늘 바울이 말하는 메시지의 팩트였습니다.
우리는 다음 주일 설교 텍스트인 2:1-4절을 통하여 바울이 고린도에 가지 않으려고 했던 그의 진의를 다시 한 번 곱씹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의거한 영적 교훈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바울은 죽을 수 있는 영혼을 살리는 일에 침묵하지 않고 담대히 본인의 뜻을 선포했다고 말입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성도는 참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히브리서 12:2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의 주군이신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당하셔야만 했던 부끄러움을 참아내셨으니 우리도 참아내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저는 히브리서 12:2절 말씀 너머에 있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하셨던 수모를 참으심은 곧 다시 말하면 인류 구원이라는 당신 사역의 마침표를 찍는 가장 큰 외침을 외치신 것이라는 더 강한 의미입니다.
주님은 큰 소리로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삶으로 당신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가장 큰 관심은 당신이 만드신 영혼들의 구원이라는 대사(大事)에 주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오늘 본문을 통해 이런 영적 적용을 담대히 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주군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지셨던 영혼을 살리는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영혼 구원의 사역이라는 대의 앞에 침묵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는 방관의 죄를 짓는 일일 수 있다는 점에 예민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 우리들이 영혼을 살리는 일에 대하여 침묵하게 되면 하나님은 돌들을 들어 소리치게 하심으로 우리를 경성하게 하실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민감하지 않으면 주군께서는 발람이 타고 가던 나귀를 사용하셔서 발람의 어긋남을 깨우치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 주변의 나귀들을 들어서 우리에게 소리 지르게 하실지 모릅니다.
오늘부터 완전체는 아니지만 두 달여 중단되었던 오프라인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두 달 여 동안 저는 대단히 민감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마 교우들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민감한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 교우들에게 보낸 목회서신과 주보에 올린 목회 칼럼을 통해 제가 얼마나 영적으로 긴장하며 예민한 시간을 보냈는지 나름 캐치한 교우들이 있을 줄 압니다.
두 달여 저를 지탱하게 해 주었던 코로나 19 사태로 인한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를 이렇게 일구어 교우들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작금 하나님께서는 코로나 19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계시는 중이다.”
저는 수구적이고 근본적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는 하나님이 죄악 중에 거하고 있는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한 매개라는 메시지로 받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사입니다.
이런 대입은 잘못하면 몇 몇 근본주의자들이 23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인도네시아 지진 해일의 원인이 우상 숭배와 성적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했던 무자비한 폭력성 발언과 별 반 다르지 않은 언어적 폭력으로 비쳐지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전자와 같은 발언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더 조심해야 하는 것은 후자의 메시지입니다.
역사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가르치시고 조명하신다는 메시지조차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태도 말입니다.
이런 태도를 지닌 자들은 영혼에 대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귀를 닫은 자들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습니다.
직설하겠습니다.
도통 영혼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지난 두 달 여 동안 저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예민하게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일은 현재진행형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향하여 강력하게 말씀하시며 가르치시려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은 결코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영적 상태인지를 냉정하게 진단하고 내 영혼의 승리를 위해 세상에 선포해야 하며, 내 자아에 선포해야 합니다.
지난 두 달 여 동안 제게 조명하신 주님의 말씀하심은 영혼에 대한 소중함이었습니다.
영혼이 다치는 일에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걸작인 ‘죽음에 이르는 병’에 보면 대단히 중요한 그만의 갈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서기를 바라지 않는 절망의 상태이다.”(p,111)
패러디하면 이렇습니다.
“죄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영혼으로 서기를 바라지 않는 절망적인 상태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독일 출신의 경제문학가인 보도 섀퍼가 쓴 ‘12살에 부자가 된 키라’라는 동화를 늦깎이로 읽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02년에 간행된 제 1판 98쇄 본이었습니다.
2002년에 출간된 1판에 98쇄까지 나갔으니 이후 얼마나 엄청나게 이 책이 팔렸을까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저자는 아주 교묘하게 돈을 버는 것에 대한 일례를 가치중립적으로 묘사하고 미화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몰이에 성공한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목사인 제 눈에 보인 ‘12살에 부자가 된 키라’ 는 맘몬주의의 황금률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경악했습니다.
저자가 설정한 키라처럼 우리나라의 12살 먹은 아이가 돈을 버는 것과 축적하는 방법에 올인 하는 구도로 성장할 때, 그건 절망 그 자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맘몬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지 이미 오래된 오늘, 영혼 운운하는 촌스러움이 얼마나 코미디 같은 이야기일까 생각하는 대중들로 넘쳐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이런 캄캄함의 세태에 함몰되면 말 그대로 절망입니다.
침묵하면 비극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 비극의 시대에 놓여 있는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내 영혼도, 나에게 위임해준 이웃의 영혼도 살리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소리쳐야 합니다.
오늘 목양터 이야기마당의 주인공 팀 켈러의 ‘하나님을 말하다’를 보면 맨 마지막 페이지에서 켈러가 이렇게 마감하고 있는 글을 읽다가 따뜻한 감동으로 인해 전율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일생일대의 힘겨운 시기를 보내며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던 여성이 있었다. 수없이 같은 기도를 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때 크리스천 친구가 이렇게 기도를 바꾸어 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하나님, 나를 찾아와 주세요. 주님은 잃어버린 양을 두루 찾아다니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딱 하나에요. 그분이 내게 진짜로 그렇게 해주셨거든요.”(p,366)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 자아가 아니라 내 영혼임을.
그러므로 도구된 저와 여러분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소리 내야 합니다.
내 영혼과 저의 영혼이 살게 해달라고.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낮에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 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순 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그저 주는 사랑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 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