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여섯 번째 강해) 제목: 유사(類似) 위로에 속지 맙시다. 본문: 고린도후서 1:3-7 서론) 지난 4월 14일 경향신문 2면에 세월호 6주기에 맞추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중에 한 내용을 아픈 마음을 갖고 소개합니다. 말씀드리기에 앞서 제가 드리는 말씀을 지난 총선 때, 세월호에 대하여 언급하며 또 한 번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어떤 낙선자와 같은 맥락으로 정치적인 시각을 갖고 절대로 해석하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제가 드리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치적 복선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목회적인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물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유족들이 대인관계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① 공감되지 않는 위로의 말이 듣기 싫어서: 25.5% ② 다른 사람들이 자녀 이야기를 할 때 힘들어서: 18.0% ③ 마음이 아픈데 괜찮은 척 하기가 힘들어서: 17.3% ④ 모임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아서: 12.9% ⑤ 사람들이 쳐다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아서: 10.8% ⑥ 세상이 야속해서: 9.7% ⑦ 다른 가족을 놔두고 외출하기가 무서워서: 3.2% ⑧ 기타: 2.5% 신문기사를 보다가 ①⑦ 번의 항목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4월 16일, 아내가 방송에서 나오는 세월호에 관한 특집을 보면서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닷물 속에 아들, 딸을 넣은 상태에서 잃어버린 부모들이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할까!” 제가 1초도 안 기다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가능하지.” 그런데도 지금 살아남은 자는 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중에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아슬아슬한 삶을 이어가는 것 하나가 ‘다른 가족을 놔두고 외출하기가 무서워서’ 라는 기막힌 현실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제 삼자이지만 나름의 공감이 되는 7번 항목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유가족들이 정상적인 대인관계를 유지하면서 상식적인 삶을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유의 제일 큰 답변으로 제시한 항목 ①은 목사로 살아가는 저에게는 왠지 공범자가 된 느낌이 들 정도로 유족들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습니다. “공감되지 않는 위로의 말이 듣기 싫어서” 서른네 살 먹은 딸을 잃은 리타 모렌이 ‘제발’이라는 시에서 공감되지 않는 위로의 메아리를 던지는 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항의하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김영봉,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IVP,pp,85-87.) 제발, 내가 슬픔을 완전히 극복했는지 묻지 말아 주세요. 나는 결코 완전히 극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제발 그가 지금 있는 곳이 이곳보다 낫다고 말하지 마세요. 내 곁에 없는 것이 문제이니까요. 제발 더 이상 그가 아프지 않으니 됐다고 말하지 마세요. 왜 그 애가 고통 받아야 했는지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제발,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마세요. 당신 또한 아이를 잃었다면 모를까요. 제발, 하나님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 분이 일부러 이렇게 하셨다는 뜻인가요? 제발, 적어도 그와 함께 34년을 살지 않았느냐고 위로하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몇 살에 죽어야 한다는 건가요? 제발, 신은 인간에게 견딜 만큼의 형벌만 내린다고 말하지 마세요. 인내력의 정도를 누가 결정하나요? 제발, 당신의 마음이 아프다고만 말해주세요. 제발,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고만 말해주세요. 진실로 기억하고 있다면요. 제발, 내가 말하고 싶을 때 그 말을 들어주세요. 그리고 제발 내가 울어야 한다면 울도록 내버려 두세요. 리타 모렌의 시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결론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입장에서 누군가를 위로하려고 하지, 상처를 당한 자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을 공감하여 위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리타 모렌이 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위로와 공감은 말이 아니라 그냥 옆에서 기억해 주는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로를 받을 길이 없단 말인가? 아픔을 함께 공유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그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질문을 던져 볼 만합니다. 본론) 바울은 본문에서 무려 10번에 걸쳐 반복하며 사용한 단어가 있습니다. ‘파라칼레오’라는 단어입니다. 번역하면 ‘위로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109번 등장하는 데, 그 가운데 54번이 바울서신에 등장합니다. 특히 54번에 걸쳐 사용된 이 단어가 응집력의 극치를 보여주는 서신이 있는데 바로 우리가 살피고 있는 고린도후서이며, 동시에 오늘 본문에서 10번이나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은 위로의 메시지라고 말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오늘 본문에서 이 ‘파라칼레오’라는 단어를 집중해서 사용했을까요? 무려 10번에 걸쳐 5절에서 사용했다는 것은 분명히 바울의 의도적인 시도라고 말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왜 이런 의도적인 시도를 바울이 했을까요? 그것은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는 고린도교회라는 지역적 배경 때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쓸쓸하게 사역을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이전 사역지였던 아덴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한 이후였다고도 했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상당히 많이 움츠려 있었던 시기에 시작한 고린도 사역은 아마도 바울에게 있어서 영적으로나 육적인 상태가 최악이었을 가능성이 분명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고린도교회 지체들은 한 술 더 떠 지쳐 있는 바울을 기도하게 만든 골칫덩어리였습니다. 주지했다시피 고린도교회 공동체는 온갖 비본질적인 교회의 문제점은 다 떠안고 있었던 교회였고, 그리스도의 道가 아닌 세상의 지혜로 무장한 아주 잘난 성도들이 너무 많은 공동체였으며, 귀는 얇아 바울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유대적인 율법으로 무장한 자들에게 휩쓸려 복음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자들도 속출했던 곳이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이 무리들은 결국 바울의 사도권까지도 싸잡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바울에 대하여 적대적이었습니다. 무려 세 번에 걸쳐 편지를 쓰고, 동역자들이었던 디모데, 디도를 파송하면서조차 고린도 교회 공동체의 고질적인 영적 질병들을 고치려고 했지만 바울에게 돌아온 것은 차디찬 냉소였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세운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의해서 적지 않은 시련과 고통을 당했고, 고난을 경험하면서 많은 영적인 정력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었던 골치 아픈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렇게 사람을 지치게 만든 공동체인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보내는 4번째 편지에서 그만이 갖고 있는 놀라운 영성을 엿볼 수 있는 감동의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본문 3절은 대단히 상투적인 히브리인들의 인사말입니다. ‘바룩 아타 아도나이’ (주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바울은 본인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 출신이기에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이런 히브리식 찬양으로 드림으로서 본인의 사도권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자들에게 종교적 정체성 혹은 동질성을 분명히 하며 그들에게 도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도발적인 찬양을 드린 바울은 바울에게 시비를 거는 자들은 물론 고린도교회에 있는 회색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대단히 의미 있는 신학적 성찰을 던집니다. 다시 3절 하반절부터 4절을 읽겠습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이 구절을 곧이곧대로 받으면 이렇게 문장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메시지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이 보다도 훨씬 더 깊은 영적 의미를 갖고 있는 메시지가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5-7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이 구절을 톰 라이트 교수의 사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메시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쳐나는 것처럼, 메시아로 인해 오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쳐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위로와 구원 때문입니다. 이 위로는 우리가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여러분이 인내로 견디어내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또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확고합니다. 여러분이 우리의 고난에 동참했듯이 여러분이 우리의 위로에도 동참할 줄을 우리가 아는 까닭입니다.”(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고린도후서”, IVP, p,15) 조금 쉬운 번역을 읽어보니 바울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 안에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 고난의 공감을 함께 느끼지 못하는 위로는 사이비 위로라는 것입니다. 이 교훈을 이렇게 바꾸어 보십시다. 주님 때문에 당한 고난을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위로가 진짜 위로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더욱 직설적으로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고난을 맛보지 않은 자가 누군가에게 위로를 전한다는 것을 어불성설이며, 혹여 그가 위로를 전한다고 하더라도 그 위로는 유사 위로이자 사이비 위로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전 목회지에서 경험했던 참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아주 가끔 설교 텍스트에 걸 맞는 경험이 떠오르면 교우들에게 리얼하게 전합니다. 왜 리얼합니까? 제가 직접 당하고 경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설교 원고에 담아 교우들에게 최선을 다해 말씀드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경험한 감동이나 은혜가 100% 전달됩니까? 전달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론적이거나 지성적인 앎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지식이나 지혜를 선생님이나 아니면 나보다 더 앞선 자에게 듣습니다. 그래서 그런 전언을 통해 상당히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언을 받은 사람의 앎이 전언해 준 사람의 경험된 앎보다 클 리 없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경험의 차이입니다. 세상의 지식과 지혜가 그럴진대 하물며 사람을 사람답게 하며 가장 성숙하게 하는 고난의 내용이야 재론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이런 공식으로 접근할 때, 정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심비의 가장 중심 자리에 새겨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 인해 내가 받은 고난의 무게들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수신자들에게 이렇게 역설했습니다. 로마서 8: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가 보는 고린도후서 4:10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12:26절도 새겨야 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골로새서 1:24절은 압권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그리스도께서 받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도리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나름 부담 백배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불편함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여타 서신에서 전했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겠다는 이 의지가 왜 그토록 당당했는지를 오늘 본문이 여지없이 보여 줍니다. 다시 본문 5-7절을 이런 설명을 전제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바울만이 갖고 있었던 놀라운 그의 신학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고스란히 임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또 다른 은혜의 방점을 찍습니다. 내가 당한 고난이 너희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임한 것처럼 나에게 주님이 주시는 위로라는 은혜 역시 너희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임한다고 격려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메시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강력한 레마를 새겨야 합니다. 고난의 경험이 없이 남발되는 위로는 사이비 위로입니다. 우리는 열왕기상 3장에 기록된 솔로몬의 재판에 대한 기사에 대해서 대단히 익숙합니다. 창기 두 여자가 같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3일을 상관으로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문제는 한 여자가 낳은 아이는 엄마의 실수로 질식사를 당합니다. 그러자 아들을 죽인 이 여자가 3일 전에 낳은 동료의 아들을 죽은 아이에 바꿔치기를 하여 송사가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여인이 살아 있는 아들이 자기 아들이라고 우기자 솔로몬이 판결을 내리기를 아들을 둘로 잘라서 나누라는 명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자 진짜 엄마라고 우겼던 가짜 여인은 그렇게라도 하라고 한 반면, 진짜 엄마는 차라리 아이를 죽이지 말고 가짜 엄마에게 주라고 애원합니다. 그 장면을 그린 성경 구절이 열왕기상 3:26절입니다.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여기에 기록된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라고 번역된 ‘마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라함’의 원 뜻이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해서 표준 새 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자 살아 있는 그 아이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에 대한 모정이 불타올라, 왕에게 애원하였다.” 자기 배가 찢어지는 아픔을 경험하지 못한 여인이 어찌 모성애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바닷물에 생 떼 같은 자식을 수장시켜 잃어버린 어머니의 그 피눈물 나는 아픔을 어찌 천박하기 그지없이 기득권 정치인으로 거대 정당에 빌붙어 산 자가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고난의 아픔을 경험해 보지 못한 자가 어찌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신 아픔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큰 감사와 감격은 고난의 참여함으로 끝나지 않고, 그 주님이 바울에게 주셨던 말 그대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의 은혜로 오늘을 살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일체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게 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고난의 끝은 고난이 아닙니다. 그 고난의 끝은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이론으로 형용할 수 없는 위로입니다. 섣부른 유사 위로에 속지 마십시다. 겉멋 든 사이비 위로에 현혹되지 마십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레마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27절을 읽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주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위로는 세상이 주는 위로와 같지 아니하느니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을 이렇게 정의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시대” 수많은 회색지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에 관심이 없습니다. 고난은 박물관에 전시해 놓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교우들에게 선포합니다. 박물관에 전시해 놓은 고난을 내 삶을 끄집어내기 위해 박물관의 유리창을 박살내라고. 왜? 고난이 담보되지 않는 하나님의 위로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거짓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사이비 위로는 위로가 아닙니다. 유사품 위로에 속지 마십시다. 주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여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위(位)로부터(팔라칼레오) 내려오는 위로(慰勞)(파라클레시스)를 공급받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유월절 지극히 높은 주님의 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세상의 신을 벗고서 주 보좌 앞에 엎드리리 내 주를 향한 사랑과 그 신뢰가 사그러져 갈 때 하늘로 부터 이곳에 장막이 덮이네 이 곳을 덮으소서 이 곳을 비추소서 내 안에 무너졌던 모든 소망 다 회복하리니 이곳을 지나소서 이곳을 만지소서 내안에 죽어가는 모든 예배 다 살아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