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부활주일 설교 제목: 회복이라는 부활 본문: 에스겔 37:1-10 서론) 신앙인들이 21세기를 살면서 반드시 뚫고 넘어서야 하는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스토리에 대한 역사성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열왕기하 13:20-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엘리사가 죽으니 그를 장사하였고 해가 바뀌매 모압 도적 떼들이 그 땅에 온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 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는 것이 세상에 있는 사람은 물론 우리 신앙인들도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무슨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주 솔직한 심정으로 접근하면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이미 과학적인 문명에 살고 있으며, 동시에 자라면서 이성적인 지식을 토대로 사건, 사고를 해석하는 방법론에 길들여져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죽은 시체들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다 다시 살았다는 이 스토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100% 믿는다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점에 저 또한 동의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어느 새 역사적 진실인가? 라는 질문에 부합할 때만 믿으려고 하고, 인정하려고 하지 그렇지 못할 때는 신앙심이라는 매개 하나만을 갖고 성경의 말씀을 수용하는 것은 매우 무지 몽매한 일로 몰고 가는 시대의 한 복판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같은 목사들은 이렇게 압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못 믿으면서 무슨 기독교 신앙을 가졌냐고 타박하는 것입니다. 해서 이렇게 결론을 맺을 때가 많습니다. 믿음은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바로 이 대목에서 이런 압박이 아닌 신학적 보폭을 넓히는 조금은 진보적인 접근이 있습니다. 깨어 있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엘리사의 죽음에 얽힌 기사인 열왕기하 13:20-21절과도 같은 정경의 메시지를 이렇게 해석하는 접근입니다. 열왕기하 13:20-21절의 신학적 해석은 열왕기하라는 역사서가 기록될 당시의 종교적인 상태를 전제한 글이지 죽은 자들이 사후에 생존한다고 믿는 오늘날의 기독교적인 신앙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엘리사의 죽음에 관한 기사는 적어도 하나님의 권능은 죽음도 이길 수 있다는 신앙을 증언해 주는 메시지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가당한 말이냐는 과학적인 문명의 시대의 공격에 수비적으로 해석하려는 궁색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에 대한 수용 여부를 역사성에 대한 진의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더 적극적인 신학적 해석이자 설명인 셈입니다. 오늘은 2020년 부활주일입니다. 역사의 물줄기 속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적어도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성경이 말하는 사건 중에 대단히 감동적이며, 감격적인 사건 하나를 들라고 한다면 분명히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말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사건은 우리 기독교를 기독교로 존재하게 한 가장 중요한 교리이자, 핵심적 가치이며, 본질적 믿음의 사건입니다. 문제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감격적인 사건을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역사적 사실인가, 아닌가의 잣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화두라는 점입니다. 묻겠습니다.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입니까? 아니면 기독교 신앙이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에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건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해석한 상징적이고 신앙적인 메타포에 불과한 해석입니까? 저는 설교의 서두에 신학적 해석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아주 다양한 역사적, 시대적, 문화적, 종교적 삶의 정황을 무시한 채로 오로지 축자영감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피력했습니다. 이런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 건강하고, 바른 신학이 교회 안에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인 다양성과 폭넓은 해석을 전제하여 성경을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타협해서는 안 되는 해석의 마지노선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입니다. 교회사적으로 그 어느 시대이든 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한 해석 역시 마찬가지로 난도질을 당하며 해석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의 교회는 이 두 가지의 기독교 본질의 명제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마땅한 일이며,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과학적인 증명의 문제나 대상이 되는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실임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자, 정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앞서 말씀드린 무조건적인 믿음으로의 수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더 깊은 영적인 교훈이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신학교 2학년 때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데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신학교 2학년 조직신학 시간에 교수님이 말씀하시고 설명하는 것을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믿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의 설명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너무 궁색해서였습니다. 교수님께서 설명하시는 삼위일체의 교리 설명은 너무 허접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셨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저에게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제게 온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론을 설명될 수 있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일 수 있단 말인가! 신학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면 그 분이 어떻게 삼위이자 일체를 갖고 계신 존재일까를 깨달았고 이후 쾌재를 불렀습니다.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의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제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게 된 혁명이요, 이유였습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속성인 초월성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 것은 제게는 통쾌한 촌철살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타자(totaliter aliter)이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해석할 수 있는 존재유비로 인식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정용섭, “주기도란 무엇인가?”, 홍성사, p,37.2011.) 마찬가지로 부활은 인간이 해석할 수 있는 이성의 유비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교우들이 말장난처럼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더 다른 적확한 표현이 없어서 사용하겠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부활하실 수 있었습니까? 주님이니까 부활하실 수 있었습니다.” 다시 재 강조하지만 주님의 부활은 인간의 이성적인 인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2020년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부활의 타당성에 대하여 논하는 정력 소비보다 더 중요한 신앙적 태도가 있어 보입니다. 무엇일까요? 부활의 의미(meaning)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올드 팝송 중에 닐 세다카가 부른 ‘You mean everything to me.’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 제목이 복음 같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나에게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코로나 19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우리를 공격한 2020년의 한 복판에 서있는 오늘,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성찰하는 것이 주님이 어떻게 부활했는가를 묻는 논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영적 공부이지 않겠습니까? 본론) 본문은 예언자 에스겔이 바벨론에서 본 네 가지 환상 중에 세 번째에 해당하는 메시지입니다. 저는 예언서 에스겔을 들출 때마다 긴장감을 느끼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급하심이라는 흥분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예언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에서 예언을 행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는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예언을 시작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남 유다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주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해는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초토화되고 완전히 멸망을 당한 해이고, 그 보다 훨씬 전인 주전 605년에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제 1차 공격을 받아 예루살렘과 몇 몇 성읍만을 남겨둔 채로 약 48개 성읍이 거의 무너지는 패배를 당했습니다. 이때 다니엘을 비롯한 많은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운을 당합니다. 이후 바벨론의 2차 침략이 주전 597년에 있었는데 이때 여호야긴과 에스겔과 같은 왕족을 비롯한 제사장 그룹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유배되는 비극을 맛봅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주전 593년에 에스겔은 유다의 예루살렘이 아닌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예언자로 소명을 받게 됩니다. 어떻게 에스겔이 소명을 받습니까? 너무 놀라운 사실이 1-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간단히 말씀을 드리면 아직은 건재했던 예루살렘에 세워진 솔로몬 성전에 거하시던 하나님께서 도저히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바퀴가 달린 보좌를 타시고 바벨론까지 직접 이동을 하십니다. 그리고 바벨론으로 동선을 옮기신 하나님께서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을 불러 예언자의 소명을 주십니다. 얼마나 급하셨으면 예루살렘 성전에 거주하지 않으시고 직접 이방의 땅인 바벨론까지 에스겔을 찾아가셨을까? 이렇게 시작된 에스겔의 예언자 사역은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① 1-24장: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② 25-32장: 일곱 이방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③ 33-39장: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 ④ 40-48장: 구원 시대의 환상과 새 성전에 환상 그렇다면 오늘 본문 텍스트는 멸망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반드시 다시 구원하신다는 메시지에 해당되는 텍스트입니다. 그 중에서도 37장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표명하신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다시 환상을 보이십니다. 환상의 장소를 본문 1-2절에서 소개합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당신의 권능으로 이끌어 가셨던 장소가 어디라고 분명한 말씀드릴 수 없는 골짜기였습니다. 헌데 골짜기에서 에스겔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주 마른 뼈들이 즐비한 모습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시각적으로 에스겔의 눈에 보이는 충격이 절망 그 자체임을 하나님이 알려주시기 위해 그를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이 1-2절의 메시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 가지를 더 삽입하고 싶습니다. 남아프리카 대학교의 아말리에 레베카 바스데오 힐 교수는 ‘죽음의 계곡의 시야와 소리’(Sights and Sounds of Death Valley)라는 저널에서 독특한 주장을 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적어도 에스겔을 골짜기로 데려간 이유는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시각적인 충격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청각적인 충격과 깨달음도 동시에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부연하기 위해 본문 3-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은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로 에스겔을 데리고 가셔서 에스겔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지금 에스겔이 느끼고 있는 절망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시각적으로 보기에는 뼈의 상태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2절에 말씀하고 있는 그대로 ‘매우 말라 있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본문 11절을 봅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이렇게 매우 말라 있는 뼈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까지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소망도 없고, 다 멸절된 상태라고 부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질문하신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에스겔이 할 수 있는 답은 이것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동의합니다. 3절 하반절입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자신 없는 답을 한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물러서지 않고 바스데오 힐 교수의 말대로 에스겔이 들을 수 있는 청각의 효과로 이렇게 다시 명령하십니다. 본문 4-6절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다시 이 장면을 요약하여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이제는 다음과 같이 대언하라고 명령하셨다는 말입니다. ①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②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라 이렇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 결과까지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알려 주십니다. “홀로 너저분하게 떨어져 있는 마른 뼈들이 서로가 들어맞음 →힘줄이 생김→살이 오름→가죽이 덮임→생기가 투입됨”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너무 선명한 시각적 변화와 청각적인 역사가 나타날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하나님이 설명해 주신 에스겔이 해야 할 일과 그 후의 결과입니다. 에스겔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짐을 짊어졌습니다. 허나 예언자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시각적, 청각적인 환상에 힘입어 그대로 순명하기에 이릅니다. 본문 7절입니다.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로 연결된 뼈들, 그래서 어느 정도 사람의 모습으로 회복된 그들에게 생기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생기가 없는 회복된 뼈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에스겔에게 생기를 불어넣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제는 생기에게 명령하여 그 생기가 접 붙은 뼈들에게 들어가라고 대언합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10절에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오늘 본문 텍스트의 설명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본문 주석을 통해 2020년 부활주일에 주시는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 2020년의 부활은 하나님의 ‘루아흐’를 기초 삼아 회복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몇 가지의 단어에 대해 집중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텍스트의 단락은 1-14절까지의 기록입니다. 다 살피지는 않았지만 본문 1-14절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루아흐’라는 단어가 본문에 무려 10번에 걸쳐 등장합니다. 이 단어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개신대학교 이학재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본문에서 뼈들을 살게 한 ‘생기’, ‘영’, ‘내 신’은 곧 하나님의 영이시고, 백성들을 살리시는 회복의 영이시며, 에스겔로 하여금 백성들의 영적 모습을 보게 하는 영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하는 영이시다.” (그 말씀, 2006년, 6월호, pp,86-87.) 다시 말하면 에스겔 37장이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마른 뼈, 그래서 도무지 소망이 없고, 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으로 마른 뼈와 같은 절망에 있었지만 다시 일어난 큰 군대와 같이 회복될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교수는 에스겔 골짜기의 영적 교훈을 이렇게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살 것이다. 죽은 뼈들이 강력한 군대로 일어설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런 민족적 부활이 오로지 여호와의 신에 의해서 일어났음을 알 것이다. (중략) 에스겔의 환상은 육체의 부활 교리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군대의 죽임당한 병사들의 뼈를 상상 속에서 다시 살리는 것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비교하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BST 에스겔 강해”, pp,433-434.) 코로나 19로 인해 오늘까지 6주 동안 우리는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6주라는 시간이 얼마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길고 고통스러운 기간인지를 저도 알고 교우들도 압니다. 더 힘든 것은 이 고통의 터널 끝이 확실하게 안 보인다는 점입니다. 우리 세인교회만 그런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난 6주 동안 저는 동기 목사들은 물론 지인 목회자 선후배들과 통상적인 잣대로 볼 때 1년 동안 해야 할 전화와 연락을 지난 6주 동안 다 한 것 같은 그런 치열한 고민을 해왔고 동역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온라인 예배를 지지하는 자들은 오프라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나 목사들을 향하여 무지하다고 손가락질합니다. 오프라인을 지지하는 자들은 우리가 오프라인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것은 무지해서가 아니라 신앙적으로 죽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온라인 예배를 지지하는 자들에 대하여 반대급부의 불만을 터뜨립니다.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는 이제 그 정상적인 도를 넘어선 것 같은 무차별적인 언어폭력으로 교회를 공격합니다. 동시에 때를 만난 것처럼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들은 외부에 있는 불신자들보다 더 비난의 화살을 교회에 쏘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극점에 이르는 오늘까지 온라인 예배와 오프라인 예배를 병행한 친구 목사님과 지난 주간 통화 중에 제가 이런 화두를 던졌습니다. “친구, 코로나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코로나 이후 교회가 더 무섭다. 지금까지 오프라인 예배를 드린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어떻게 교회 공동체에서 하나로 묶을 것인가! 서로의 상황에 대해서 이해를 도모할 것인가가 더 무거운 짐이다.” 그러자 친구 목사가 저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 목사, 우리 교회 표어를 만들었다. 코로나 사태가 막 일어나기 전에 이 슬로건을 만들었다. ‘우리 모두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 슬로건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계속 외친다. 가장 무서운 사단의 함정은 코로나 이후에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다가 설득력이 있게 친구의 말이 다가왔습니다. 부활절을 맞는 2020년 오늘 주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는 틀리지 않았다는 공감의 포용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루아흐’ 의 능력으로 때때마다 당신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지극히 말라 있는 뼈다귀가 같은 저와 여러분과 그리고 이 땅을 다시 큰 군대로 세워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만신창이 신세가 되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 한국교회이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루아흐’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운행하기를 기도하십시다. 이 회복이 임하는 것을 저는 부활주일 아침에 선포합니다. 에스겔 골짜기 환상을 통해 오늘 2020년 부활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조명은 나와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은혜입니다. 2020년 부활절에 우리 세인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이 절절하게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부활이라는 회복을 위해 ‘루아흐’를 통해 역사하시는 주군께 엎드리십시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뉴욕 리디머 교회의 담임목사인 팀 켈러가 말한 글을 가슴에 담으십시다. “사탄의 거짓말이 끼치는 영향에서 맞서는 싸움에서 대저 이기는 최선의 방어 수단은 종교적인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의 진리를 되새기는 것이다.” (팀 켈러,“예수를 만나다.”, 베가북스,p,173.) 신앙의 회복은 종교석인 행위가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셨던 진리로 다시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이 경험해야 하는 영적인 진짜 부활입니다. 우리 세인 지체들 모두가 2020년 회복이라는 부활을 맛보는 부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향한 내 비웃음 나를 향해 돌아오고 어리석고 미련한 그 백성들 나의 모습과 같네 찢기고 상한 나의 영혼을 끝까지 사랑한 아버지의 그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으리요 내 생명 다해 주 노래하리라 내 생명의 근원되신 나의 삶의 이유되신 내 모든 것 나의 전부 아버지 나 다시 일어섭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나 믿음 없어 실패한 나 그런 나를 안아주시는 아버지 나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