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다섯 번째 강해) 제목: 본(本)과 말(末)은 전도(顚倒)되면 안 됩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1:1-2 서론) 오늘은 2020년 종려주일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는 주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사건일 것입니다. 세상의 여타 다른 종교에는 존재하지 않는 부활의 사건은 우리 기독교의 최대의 사건이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복 된 소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부활 사건은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경험이 되는 축복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천명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5:51-52절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우리는 예수께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고, 그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우리도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진보주의적인 조직신학자들은 부활이라는 것이 전혀 과학적인 사실이 아니기에 대부분 부활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지만 저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말한 그대로 6가지의 부활을 믿는 목사입니다.(마틴 로이드 존슨, “영광스런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 로이드 교리 강좌 시리즈 3권, 부흥과 개혁사, pp,369-371.) ① 혈과 육, 살과 뼈 간의 분명한 구분이 있는 부활을 믿습니다.(눅 24:39) ② 썩지 않을 부활체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고전 15:42) ③ 영광스러운 부활체가 될 것을 믿습니다. (고전 15:43) ④ 대단히 강력한 부활체가 될 것을 믿습니다. (고전 15:43) ⑤ 영적인 몸이 될 것을 믿습니다.(고전 15:44) ⑥ 속성이 하늘에 속한 몸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고전 15:48-49)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은 양보할 수 없는 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교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 부활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주님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또 다른 주님의 일하심을 동의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도식적으로 표현한다면 주님의 고난과 죽음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부활이라는 교리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혹여나 이 순서를 뒤바꾸거나 같은 병행의 선에 놓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일하심을 왜곡하는 것이며, 심지어는 모독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설교 제목에 대입한다면 바로 본말전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교훈 중에 이렇게 본과 말을 바꾸면 안 되는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담겨 있는 메시지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우들과 이 교훈을 본문 2절을 중심으로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본문 2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 지체들에게 문안하는 인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인사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은혜’는 헬라어 ‘카리스’의 번역인데 통상적으로 ‘카리스’가 의미하는 가장 두드러진 의미는 ‘호의’입니다. ‘호의’라는 단어가 가진 뜻이 무엇입니까? 전혀 예기치 않은 대우를 받은 경우를 의미합니다. 뜻밖의 선대를 받은 경우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카리스’ 즉 ‘호의’ 혹은 ‘선대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전혀 자격이 안 되는 나를 구원해 주신 위대한 선대함이요 호의입니다. 바울은 바울 스스로를 비롯하여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그리고 아가야 전체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역설한 것입니다. 자격이 1도 없는 너희들을 구원해 주신 ‘카리스’가 있기를 원한다고 문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카리스’라는 단어를 바울이 먼저 썼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 단어를 살펴보십시다. 바울은 카리스를 말한 뒤에 ‘평강’ 즉 ‘에이레네’가 있기를 바란다고 인사했다는 점입니다.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살렘’의 번역입니다. ‘살렘’이 어떤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까? 막힌 담이 허물어져서 하나가 되는 상태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말 그대로 ‘평강의 성’, 혹은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평화의 성에 가보니 진정한 평화가 없는 도시가 예루살렘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 시에 예루살렘의 서쪽 지역 즉 베들레헴과 여리고, 가자 지역 등등이 위치해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에 세워진 거대한 담벼락을 보고서 이 도시가 예루살렘이란 말인가 탄식하며 혀를 내 두른 기억이 생생합니다. 웨스트뱅크는 을씨년스럽게 마치 감옥의 담처럼 이스라엘 땅에서도 둘려 쌓여 있었습니다. 평화의 도시가 아니라 담벼락의 도시라고 부르는 것이 낫게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살렘(샬라임)은 단절이 아니라 하나 됨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임하는 평강인데 이 도시는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샬렘’은 어떤 의미가 있는 단어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담을 쌓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인해 그 담이 허물어졌으며 이로 인해 주님과 화평하게 된 결과 주어진 평강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주님이 만드셨던 평강의 도시가 아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기 쉽게 만든 이스라엘의 안락의 도시, 편리함의 도시라는 괴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그래서 이렇게 역설했습니다. 에베소서 2:14-17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여기 17절에 기록된 단어 ‘평안’이 바로 오늘 본문 2절에 기록된 단어 ‘평강’ 즉 ‘에이레네’요 ,‘샬렘’ 입니다, 바로 이런 주석적 작업을 통해 우리는 고난주일에 주시는 영적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은혜와 평강의 순서를 바꾸는 것은 주님이 가르치신 교훈을 본말전도하는 일이라는 교훈입니다. 앞에서 살폈듯이 은혜는 주 예수께서 피를 흘리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격 없는 나에게 구원이라는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조금 더 직격하여 표현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피 흘리심이 없었다면 감히 나 같은 자는 절대로 받을 수 없는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주님이 주신 감격적인 선물의 최우선적인 선물입니다. 주목하여 기억할 것은 이 감격의 은혜를 경험하고 인정하는 자에게 두 번째 주어지는 것이 평강이라는 선물임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강’은 주님이 주신 카리스 즉 그 은혜를 받은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영적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평강은 두 번째의 선물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 세인 지체들이 아주 세밀하게 긴장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평강을 은혜보다 앞에 내세울 때 이 평강이 편안함이라는 세속적 가치로 전락한다는 점입니다. 은혜의 부산물이 평강인데 은혜는 잊어버리고 오직 평강만을 추구하려고 할 때 인간은 언제나 은혜 없는 안전함 혹은 편리함만을 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육비와 심비에 새겨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평강은 편리함으로 변질시키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평강을 편리함으로 변질시키지 않는 것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지 않으려면 언제나 주님이 계획하셨고, 이루시려고 했던 본질이라는 은혜를 망각하지 영적 훈련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성경적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에 등장하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잠시 살피겠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어떤 포도원 농장 주인이 타국에 여행할 일이 있어 소작농부들에게 한시적인 포도원 경작을 맡기고 돌아왔는데 포도농장을 경영하던 농부들이 포도원이 탐이 나 그 동안 소출 결산을 하기 위해 농장주가 보낸 사람들을 때리고 죽인 뒤에 끝내는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대신 보낸 아들을 죽이는 선(先)장면입니다. 누가복음 20:14절을 보겠습니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이 구절에서 우리들이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농장의 유산을 상속하는 것은 농장주의 고유 권한입니다. 소작농들이 건드릴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입니다. 문제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영역을 침범한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 포도원 농장을 경작하도록 위탁받은 자들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경제적인 상태를 볼 때, 일일노동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렇게 하루 벌어 살았던 자들에게 일정 기간의 노동을 집약할 수 있는 일자리를 준 주인은 대단히 큰 은혜를 그들에게 베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잊고 도리어 주인이 결정해야 하는 일을 욕심으로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포도원의 농부들은 ‘은혜’ 즉 ‘카리스’라는 본(本)을 망각하고 포도원이라는 말(末)에만 욕심을 냈던 본말이 전도된 일을 행한 사악한 자들이었습니다. 이 말은 오늘의 언어로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 은혜에 맞게 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편리함과 안락함이라는 부차적인 것에 더 목숨을 거는 불신앙인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있다는 교훈으로 말입니다. 더불어 이 성경적 내증 안에는 또 하나 주님이 주시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인은 타국에서 돌아와 농부들에게 소출의 내용을 받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다는 정황이 담겨 있습니다. 맨 처음 종을 보낸 것을 위시로 하여 그 다음에는 다른 종을, 또 그 다음에는 세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이것도 안 되자 이번에는 아들까지 보냈습니다. 그러자 앞에서 말한 말씀처럼 악한 농부들은 아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무엇이 담보되어 있는 비유입니까? 주인은 악한 농부들에게 여러 차례를 정상으로 회복되기를 주문하였고, 또 그런 기회를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기회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주의 사람들로 바로 서도록 지금도 기회를 주고 있다고 말입니다. 여러 차례 주어진 기회를 날려버린 악한 농부들의 면면이 바로 은혜를 저버린 자들의 자화상입니다. 여기에서 저와 여러분은 민감하게 깨어 수용해야 하는 영적 교훈이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람을 보냈던 주인은 우리의 주군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양심으로, 율법으로 우리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거절했습니다. 해서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우리에게 최후로 주셨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수여입니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정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의 수여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결코 은혜를 잊어버려 샬롬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락함이라는 농장 뺏기에 혈안이 된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세인교회는 오늘로 5주 째 온라인 예배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동기목사들로 구성된 DPA 이사 목사들과 온 라인 예배에 대한 심각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에게 나눠 드려 다음 주일, 부활주일 예배에 대한 지침을 삼는 자료로 삼으려는 설문조사도 이 고민의 일환으로 나누어 드린 고육지책의 방법 중 하나입니다. 친구 목사가 이렇게 대화중에 한 의견을 개진해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일차로 조사한 설문 조사 결과 약 90% 이상이 온라인예배에 대하여 폭발적인 긍정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호평의 보고였습니다. 또 한 명의 동기 목사 역시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온라인 예배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시각이라는 평가를 내보였습니다. 문제는 이 예배를 언제까지 끌고 갈 것인가? 대하여는 약간의 차이를 보였지만, 대체적으로 상황에 따라 약 4월 한 달동안도 이 예배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는가가 대세였기에 부활주일(4월 12일)에는 거리 두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오프라인 예배와 온라인 예배를 병행할 생각이 있다는 제 말을 들은 친구들은 제 의견에 대하여 극구 반대하는 소리도 경청했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저만 작금의 민감함을 예의 주시하지 못하는 목사 된 셈이 되어 못내 아팠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 주일 예배를 온라인예배로 드리고 있는 이유는 오늘의 환경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차선의 일환입니다.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헌데 제가 염려하는 것은 예배드리기 역시 본말이 전도될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 농후하다는 점입니다. 우리 교회 지체 한 분이 이렇게 전언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지만 우리 세인 교회 지체들은 나름 성숙한 신앙을 갖고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한 지체의 진정성을 믿고 있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믿지만 우리들의 영성은 너무 가변적입니다. 왜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건이 반복이라고 진단합니까? 신앙생활 역시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잊혀진 제자도’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영적인 삶에서, 특히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 훈련의 목표는 영혼의 총체적인 상태 변화이다. 안에서부터 전인(全人)답게 되는 것이다.”(p,211) 달라스 윌라드가 여기에서 쓴 가장 중요한 단어는 ‘훈련’이라는 단어입니다. 훈련은 익숙한 장소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은 편안한 복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은 안전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은 언제나 불편한 것입니다. 벌써부터 불신자 남편들이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도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 되겠다.”고. 여러분 중에 이런 분이 계십니까? “목사님, 우리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때도 주군이 주시는 카리스와 샬렘을 공급 받아요.” “목사님, 우리는 카리스와 샬렘이 꼭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습니다. 또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신학적인 논지를 갖고 있다는 것도 저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설교의 주된 요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의 공급하심은 은혜를 잊어버린 뒤에 오직 편리함에 안주할 때 결코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경종시키는 것입니다. 혹시나 우리가 드리는 온라인 예배가 편안한 농장에서 안주하고 싶은 내용물로 변질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에 하나 우리들이 그런 편리함으로 온라인 예배를 악용한다면 우리가 포도원 농장의 악한 농부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신앙의 여정은 이것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은혜 다음이 평강입니다. 은혜가 없는 평강만을 추구할 때 우리의 평강은 평강이 아니라 편리함이라는 독배를 마시는 것임을 잊지 않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는 것은 ‘다른 삶에 대해 상상하는 능력’입니다.”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태도“, 비아토르, p,35.) 김기석 목사 갈파한 글입니다. 보다가 섬뜩했습니다. “편리함이 우리에게 빼앗아가는 것은 ‘다른 은혜’에 대해 상상하는 능력이다.” 로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더불어 오늘부터 고난주일이 시작됩니다. 바라기는 은혜 다음 평강이라는 영적 도식을 벗어나면 우리는 안락함과 편리함이라는 다른 능력을 추구하는 변질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은혜를 추구하고 주어지는 평강을 맛보는 상식의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내 맘이 힘에 겨워 지칠지라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세상에 험한 풍파 몰아칠 때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주님은 나의 산성 주님은 나의 요새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