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네 번째 강해) 제목: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성도 본문: 고린도후서 1:1-2 서론) 지난 주간에 개척교회를 섬기면서 동시에 출판업을 하고 있는 신학교 후배 전도사와 미팅을 가졌습니다. 2020년 후반기에 내보려는 네 번째 출간에 관한 미팅을 위해서였습니다. 후배와 교제를 하는 어간, 지금 그가 개척하여 섬기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 임대 건물에 토요일과 주일만 또 빌려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지금 약 20여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후배의 말끝에, 아직 섬기고 있는 교회를 교단에 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통상적으로 교단에 교회를 등록하려면 임대차 계약서나 아니면 교회 토지나 건물에 대한 등기부 등본을 첨부해야 하는데 후배는 본인이 섬기는 교회의 임대차 계약서가 없어서 교단 등록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말로 본인이 당하고 있는 아픈 현실을 저에게 토로했습니다. 교단에 교회를 등록하는 일련의 과정 중에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그날 저에게 전해 주었는데 아마도 지방회 전도부에 불려가 교회 등록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런 저런 불편한 소리를 어른 목사님들에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후배가 훈계조로 야단을 치던 목사님들에게 참다 참다 한 마디를 했다가 더 많이 혼났다는 웃픈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교회(에클레시아)는 사람이라고 배웠고, 여기 계신 선배 목사님들에게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약 20여 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저희 교회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교회인데 임대차 계약서가 없는 교회라고 교단 교회로 는 등록을 할 수 없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성서적 교회론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나이 어린 전도사가 교만하고 당돌하게 굴었다는 의미로 지방회의 전도부 목사들이 그날 후배를 야단쳤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배 전도사의 교회론은 역설적으로 너무나도 적확한 신학적 기초라는 논거입니다.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편지한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전서 3:16절에서 이렇게 분명히 천명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렇습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주님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 모두가 교회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저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쓴 네 번째 편지 인사말에서 교회의 신학적 가치가 과연 어느 정도인가에 대하여 추적하고자 합니다. 은혜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임하는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설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본론)
본문 1절을 다시 읽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바울은 동역자인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에 있었던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4번째 편지를 보내면서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안부 인사를 합니다. 이 안부 안에는 아주 분명하게 편지의 수신자를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 지방에 있는 성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행정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주석이 필요합니다. 그림을 하나 보겠습니다.
이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아가야는 당시 고린도를 포함하고 있었던 지배국 로마가 설정해 놓은 행정구역입니다. 그림에 나타난 아가야와 고린도를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를 제천이라고 설정할 때 아가야는 충청북도 정도의 행정구역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다시 말해 아가야는 고린도를 포함한 지금의 그리스 남부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조금 더 큰 지역인 셈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서 바울은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고린도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있었고, 아가야에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있었다고. 그렇다면 작은 행정구역이었던 고린도에는 아마도 사람들이 모였던 가시적 교회의 포스트가 있었던 반면, 고린도를 포함한 조금 광범위한 지역을 포스트로 삼아 살고 있는 아가야 지역에는 성도들이 산재해 있었다고 보면 되는데 바울은 이런 개념으로 수신자들에게 인사를 했다는 이런 도식적 결론에 도달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 아가야 있는 하나님의 성도 이 도식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시사점을 오늘 우리 교회 교우들에게 줍니다. 우리는 지금 거의 한 달을 가시적인 교회인 서부동 1003번지 세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 세인 공동체 지체들 한 사람, 또 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이런 도식이 기가 막히게 적용됩니다. 서부동 1003번지에 위치한 하나님의 교회 제천세인교회 = 각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바울이 오늘 고린도후서에서 전하고 있는 인사말에 내포하고 있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아가야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라는 정의가 너무나도 정확한 신학적 교회론이라는 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바로 이런 본문 해석을 전제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흔들리면 안 되는 교회론 신학을 오늘 설교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1) 우리 세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 교회의 소유권은 하나님만이 가지셔야 한다는 너무나도 단호한 명제입니다. 저 역시 우리 교우들에게 소그룹 성경공부나 셀 모임에서 수도 없이 이 내용을 말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라고.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16:16-1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베드로에게 고지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모든 사람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비가시적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천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18절에서 가장 강력한 어조로 이렇게 선포한 것입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라”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문제가 너무 많은 교회였지만 이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바로 세우기 위해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고린도교회가 바울이 기울인 각고의 노력 끝에 교회다운 모습으로 서 가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지만 아직도 바울의 사도권에 시비를 걸고, 교회에 파당을 짓고 있는 남아 있는 잔존세력을 향하여 고삐를 늦추지 않고 다음과 같이 편지의 수신자를 한정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수신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며 적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세인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 지체 중에 상당수 받은 교우들은 데이빗 플랫 목사가 쓴 ‘래디컬’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는 미국 브룩힐즈 교회라는 대표적인 중산층 4,000명이 모이는 대형교회 섬기는 목사입니다. 오래 전, 그는 그의 대표작인 래디컬에서 너무 안락한 본인의 교회, 너무 부유한 자기가 섬기는 교회, 그래서 마땅히 그 누림이 너무 당연히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안주하고 있는 본인과 및 브룩힐즈 교회라는 교회 공동체의 성도들에게 그 안주함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 아니라 도리어 신앙을 좀 먹는 저주일 수 있음을 일깨워 철저하게 선교하고 헌신하는 제자공동체로 성도들을 탈바꿈시키는 역동의 사역을 읽으며 전율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 지인 사모님 한 분으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는데, 바로 브룩힐즈 교회를 담임했던 데이빗 플랫이 히말라야 트레킹을 통해 방문했던 네팔 지역의 선교 보고서인데 ‘복음이 울다.’ 라는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에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진짜 교회인가?’ 데이빗 플랫은 8일 동안의 히말라야 지역 트레킹을 통해 만난 그 산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막힌 열악함, 그리고 사탄의 영에 붙들려 죄악을 당연시하는 죄성, 그리고 그런 위험천만의 환경에서도 오직 주의 복음 하나를 붙들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살고 있는 진짜 교회의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이 책에서 그립니다. 너무나 험악한 상황을 목도하면서 데이빗 플랫은 질문합니다. 나는 정말로 진짜 목사인가? 나는 정말로 진짜 교회를 목회하고 있나? 내가 섬기고 있는 성도들은 진짜 교회를 섬기고는 있는 진짜 성도들이 맞나? 플랫 목사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 즉 트레킹을 거의 마칠 즈음에 그가 쓴 기록을 하나 책에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교회가 되면, 우리의 방식이나 이념, 트렌드, 전통에 따른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교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대가를 충분히 계산 한 뒤 하나님이 원래 뜻하신 그런 교회가 되면,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 (데이빗 플랫, “복음이 울다.”두란노,2020,p,242) 그의 독백에서 소스라치게 놀란 대목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진짜 교회인가? 의 물음이 아니라 내가 진짜 교회인가? 의 물음말입니다. 지금 이 땅 대한민국에는 약 60,000여개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알기로는 대한민국 남쪽 지방의 거봉인 지리산 노고단 근처에도 관광객들이 기도하고 갈 수 있도록 만든 기도처가 있을 정도로 전국 모든 지역에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런 복을 받은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교회가 복 받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교회는 지금 폐쇄해야 할 대상 1번지의 타깃으로 전락되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교회 관련 인터넷 뉴스에 올라온 중요 뉴스에 달린 댓글들은 차마 입으로 담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교회에 대하여 적대적입니다. 요 근래의 분위기로 보면 대사회는 이번 기회에 신천지와 교회를 싸잡아 무너뜨릴 기세입니다. 이런 기막히고 참담한 현실 안에서 한 주간 목사라는 신분으로 살아가기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정이 여기까지 이르다보니 아주 냉정하게 뒤를 돌아보게 하는 하나님의 조명하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 말입니다.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소속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가? 나는 정말로 하나님의 것으로 묶여져 있는 목사인가?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지체들은 내 소유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얼마나 진실 되게 고백하고 살아가고 있나? 적어도 이 무서운 정체성과 질문에 대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를 감히 세상이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우리는 지금 그런 정체성과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교회와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도전이 밀려왔습니다. 김기석 목사가 365일 쏟아낸 신앙의 날숨과 들숨 고백서 제 3권 ‘깨어나라, 너 잠자는 자여!’ 이렇게 갈파한 글이 있습니다. “누군가 현대인들이 개(dog)처럼 방황하는 것은 하나님(God)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씁쓸한 말놀이에 불과하지만 그저 웃고만 넘길 수 없는 진실이 그 속에 있다.”(p,391)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되려면 그 안에 속해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개처럼 여기는 불신앙의 공동체가 아니라 샤를르도 푸코가 말한 대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진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력하게 인정하는 교회에 속한 자를 바울은 본문 수신자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라고. 2) 우리 세인교회에는 하나님의 성도가 있습니까? 본문 1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아가야 지역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여 ‘성도’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성도들’은 헬라어 ‘하기오이’의 번역입니다. 헬라어 ‘하기오스’라는 단어의 의미는 ‘거룩하게 살아가는 자, 혹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 바울은 아가야 지방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라고 호칭했을까요? 호주 맥쿼리 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폴 바네트의 고린도후서주석을 참고하여 이 내용을 해석하겠습니다. “고린도교인 자체는 분명히 ‘하나님의 교회’ 혹은 ‘하나님의 성도’ 혹은 ‘거룩한 자’들로 간주되기는 힘든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첫 번째 편지에 자세히 나온, 그들이 아름답지 못하고 심지어 부도덕한 행동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인들을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거룩한 자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그에 걸맞게 행동하기를 권면했다.”(P,33) 바네트 교수가 무엇을 시사 한 것입니까? 바울은 아가야 및 고린도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완벽했기 때문에 그들을 ‘하기오스’ 즉 ‘거룩한 자’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의도했기에 그렇게 격을 높여 아가야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호칭한 것입니까?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절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지금은 희미한 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미미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다보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게 되어 확실한 주님의 은혜를 알게 되는 것처럼 그날이 올 때까지 하나님의 것에서 이탈하지 않는 삶을 살라는 격려의 호칭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읽었던 성서일과가 공교롭게 우리들이 너무 잘 아는 시편 23편이 포함되어 있어서 묵상했습니다. 참 오랜만에 영원한 은혜의 성구인 시편 23편을 노래 해 보십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의 이 기막힌 감동의 신앙고백에서 우리들이 항상 흥분하며 아멘 하는 장면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것 때문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 잔이 넘치도록 나를 인도하신다는 그 감격 때문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렇고말고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이 나에게 주는 감동은 앞서 말씀하신 일련의 것들은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시편 23편의 가장 강력한 감동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대명제 때문입니다. 바꾸어 이 구절을 역설하면 나는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최고의 감동 때문에 시편 23편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지나치게 바라면 하늘나라의 것과 영원한 것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토마스 아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브니엘, 2016년,P,127.)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하나님의 교회, 동시에 교우들이 하나님의 성도가 되어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시대의 주인공들이 다 되기를 기대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작금에 사회가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공격하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과격해 졌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교회 공동체의 운신의 폭이 어떻게 될까 심히 염려되는 지경입니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 교회에 대하여 내외적으로 총질하는 자들을 만나면 인간적인 생각에 뚜껑이 열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잡이 하는 것은 본질로의 귀속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나 또한 불완전한 것투성이지만 하나님께서 성도라고 인 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본질 안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 잡습니다. 우리 세인 지체들이 하나님의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세인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강덕 목사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교회에 속해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인 세인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며 문안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시여/하나님이시여/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나의 몸과 영혼/주를 갈망하며/ 이제 내가 주께 고백하는 말/여호와는 나의 힘이요/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여호와는 생명의 피난처시니/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내 평생에 주를 찬양하며/주의 이름으로 내 손 들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