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세 번째 강해) 제목: 형제 디모데는 본문: 고린도후서 1:1-2 서론) 이 땅에 태어나서 누군가의 기억에 좋은 감정으로 평해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여운이 저에게 문득 스쳐 지나갔습니다. 지난 12회 사무총회에서 교우들이 통과시켜준 교단 가입을 위한 청원의 마지막 순서라고 할 수 있는 총회 심의부 심의가 지난 목요일에 총회 본부에서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심의 과정에서 심의부에 소속되어 있는 목사님 한 분이 저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목사님, 교단 가입 청원을 해 주신 것에 감사를 먼저 드리고 질문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교단에 들어오셔서 사역하면서 교회 성장과 부흥에 대한 목사님의 소견을 듣고 싶습니다.” 질문을 받고 우리 교우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드리며 함께 공유했던 이야기를 답으로 내놓았습니다. “저는 일천한 사람이라 무슨 대단한 목회적인 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목회를 하면서 제가 배울 수 있는 건강한 목회를 했던 그리고 하고 있는 동역자들의 말씀과 목양의 틀을 공유하려고 노력합니다. 보수적인 사역자이셨던 100주년 기념교회를 은퇴하신 이재철 목사님이 목회자로 달려오셨던 그 건강한 정신을 본받으려고 노력했고, 진보적인 동역자로는 청파 교회 김기석 목사께서 뿌리고 있는 부스러기들을 주워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중도적인 성향으로 적지 않은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워싱톤 나눔의 교회를 시무하는 김영봉 목사의 지성적 목회 철학을 공유하려고 노력합니다. 해서 세 분의 목양적인 건강함을 제 목회에 적용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이런 틀에서 사역을 하다보면 교회 성장과 부흥이라는 모멘텀과는 조금 이해의 폭은 다르겠지만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데는 어느 정도 부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심의를 은혜롭게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목회 현장에서 지금은 현역에 은퇴를 했지만 이재철 목사님은 큰 산과 같은 어른으로 배움을 주셨고, 김기석 목사와 김영봉 목사는 지금도 저와 같은 하늘에서 천박한 목사가 되지 않고, 나름 영적으로 균형 잡힌 목사로 살아가도록 가르쳐 주는 귀한 동역자들이라는 생각에 너무 감사했습니다. 저의 두 번째 졸저인 ‘김기석 글 톺아보기’의 추천서를 써준 괭이부리마을에서 목회하는 이상선 목사가 언젠가 사석에서 저에게 이런 농담을 던졌던 것이 기억에 있습니다. 김기석 목사와 같은 고향교회에서 어린 시절 선후배 관계로 같이 자란 친구였기에 이런 실없는 소리를 저에게 말했습니다. “이 목사, 기석이 형이 이 목사에게 도리어 무한히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본인의 책을 이런 정성으로 서평을 써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냐!”고. 고향교회 후배에게 적지 않은 압박(?)을 당했는지 김 목사께서 제 책에 그래서 이런 과분한 추천사를 남겨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강덕 목사는 공부하는 사람이다. 목회자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을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 말하지만, 또 그 말이 은근한 자부심을 숨기기 위한 위장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는 학생정신에 충만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목사다운 목사이다. 눈 밝은 그가 내 책 열세 권을 읽고 서평을 적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왠지 나의 허술하고 부실한 사유세계를 간파했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자면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조금 안 후에 그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강덕 목사는 그렇지 않다. 그는 일종의 전작주의자인 모양이다. 이런 사람은 말리기 어렵다. 책 말미에 덧붙인 참고도서 목록만 봐도 얼마나 치열한 인식욕의 소유자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단순한 인식욕이 아니다. 그는 참의 길을 맹렬하게 탐색하는 진리의 순례자이다. 그가 열어가는 인식의 세계를 통해 많은 이들이 낯설지만 황홀한 세상과 만나 현실의 인력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멋진 글벗과 만났다는 사실이 참 즐겁다.”(이강덕, “시골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 동연, 2018년,pp,7-8.) 왜 설교의 서두에 자화자찬하는 것 같은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인용했는지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밝히려고 합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A’는 ‘A’대로, ‘B’는 ‘B’대로 서로를 격려하고 기억하는 존재로 관계를 맺고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 둘은 서로에게 실패하지 않은 삶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동역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저는 김기석 목사를 ‘A’로 여겼고, 또 김 목사께서는 부족한 사람을 ‘B’로 여겨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동역의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A와 B의 관계로 살았던 주인공들을 소개하는 감격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본론) 본문 1절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네 번째 편지 즉 고린도후서의 집필자는 바울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 1절에서 고린도후서를 혼자서 쓴 것이 아니라 동역자 한 명이 도와서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형제 디모데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네 번째 편지가 혼자만의 독창적인 내용이 아니라 동역자인 형제 디모데와의 합작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본문 1절에 기록된 ‘형제’는 헬라어 ‘아델포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 중에 가장 많이 쓰이는 용법은 혈육의 형제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경우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맺어진 형제의 관계입니다, 분명히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영적인 관계로 맺어진 형제의 관계였습니다. 디모데가 누구였습니까? 성경의 내증에 의하면 디모데는 바울과 실라가 제 2차 전도여행을 하던 중에 루스드라를 지날 때 만났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1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사도행전의 이 증언을 비추어 보면 바울이 이전에 제 1차 전도여행의 시기에 바나바와 함께 방문했던 루스드라를 재방문했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곳을 재방문했다는 누가의 증언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증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제 1차 전도여행의 시기에 이곳 루스드라에서 겪었던 일은 실로 끔찍한 악몽과도 같은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4:19-23) 거의 죽을 뻔했던 기억 말입니다. 해서 이런 폭력을 경험했던 루스드라의 재방문은 그래서 바울에게는 의미 있는 방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실라와 함께 이곳을 방문한 것은 아마도 1차 방문 때 회심했던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디모데를 만난 것입니다. 아마도 제 1차 전도여행시기에 회심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디모데와의 만남은 바울에게 대단히 중요한 삶의 한 획을 긋는 일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어머니 유니게와 아마도 작고한 것으로 보이는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 탄생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이렇게 뿌리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 많이 흔들릴 수 있는 디모데가 바로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디모데를 만난 바울은 그를 사역의 동역자로 세우기 위해 할례를 받게 하고 전도 여행의 대장정을 떠납니다. (행 16:2-3) 명실상부 디모데는 이 때부터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의 멤버로 동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후 우리는 디모데의 급성장을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은 바울이 에베소로 추측되는 디모데의 사역 시에 썼던 편지인 디모데전후서에서 밝힌 호칭에서 발견합니다. 두 구절만 소개합니다. 먼저는 디모데전서 1:18절입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또 한 구절은 디모데후서 2:1절입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두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역자 된 ‘형제’(아델포스)라는 호칭이 ‘아들’(테크논)으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테크논’이라는 단어는 나이가 어린 ‘아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디모데전서라는 목회서신에 이렇게 기록한 것을 볼 때 목회자로 세워진 디모데를 격려하기 위한 편지에서 디모데에게 붙인 단어 ‘테크논’은 ‘아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자식인 아들’을 의미하는 것이 더 적확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얼마나 디모데를 신뢰하고 아꼈는지 충분히 해석이 되는 대목입니다. 첫 번째 강해 때 말씀드린 것처럼 디모데는 고린도교회 사역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바울을 위해 맹활약을 합니다. 주지했던 것처럼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쓰고 난 뒤에, 디도에게 편지를 맡겨 고린도에 전달하도록 미션을 위임했습니다. 이 미션을 디도에게 맡겼지만 디도가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는지, 바울은 에베소에서 같이 동역하고 있던 디모데를 직접 고린도에 파송해서 디도를 돕도록 하는 또 다른 사역을 맡기기까지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파송할 때 주저 없이 파송한 자가 동역자요, 아들과도 같이 여기며 신뢰했던 디모데였습니다. 아덴에서 처절한 실패를 맛보고 혈혈단신으로 고린도로 동선을 옮겨 사역했을 때, 바울의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고통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그토록 외롭게 사역했을 때, 예비하셨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하셨기에 그의 외로움은 어느 정도 상쇄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평신도 동역자였기에 영적인 공급은 바울이 주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의 수고는 아마도 많이 지쳤을 것입니다. 해서 영적인 공급을 서로 받았으면 하는 동역자가 바울에게는 절실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셨던 주군은 바울을 위해 동역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8:5절입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렇습니다. 주님은 바울이 외롭고 힘들 때마다 디모데를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일련의 일과 더불어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를 뜨겁게 사랑했고, 또 신뢰했다는 증거로 가장 두드러지게 확인하는 대목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하고 로마로 순교 여행을 결심하면서 자기가 사랑했던 에베소 교회 사역의 리더십을 디모데에게 넘겼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 4:9절과 21절을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먼저 9절입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21절을 마저 읽습니다.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너무 보고 싶었던 디모데에게 보낸 읊조림의 글에서 가슴이 울컥해집니다. 순교를 앞두고 있었던 바울이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던 인물로 디모데를 거론한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으면. 이렇게 너무 사랑했던 디모데를 본서 고린도후서의 공동 집필자로 서신의 인사말에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1절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이제 본문 1절에 있는 서신의 인사에 담겨 있는 형제 디모데를 해석했습니다. 사순절 네 번째 주일에 주시는 레마를 오늘의 언어로 받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동역자 디모데가 있습니까? 바울이 너무나도 사랑했던 동역자 디모데가 여러분 옆에 있습니까? 누가 오늘, 여러분의 디모데입니까? ※ 믿음의 동선(動線)이 같은 자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했던 유언과도 같은 디모데전서 1:1-2절에 보면 대단히 중요한 기록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믿음 안에서 참 된 아들 된 디모데’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나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형제는 믿음의 동선이 같은 자라고 믿습니다. 디모데전서 4:11-13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이렇게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한 것은 그가 젊은 나이의 사역자였기 때문이겠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가 어떤 면에서는 신중하지 못하고 가벼웠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디모데는 여러 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디모데의 이런 약점을 감싸 안고 그를 동역자로 사랑하는 아들로 세워준 이유가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믿음의 선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구주 하나님과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향했던 바울의 믿음이라는 선에서 디모데는 이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이 같다는 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동역의 본질입니다. 빌립보서 1:3-5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작은 교회였던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아낌없는 애정을 표하고 있는 바울은 왜 그토록 빌립보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뜨겁게 기뻐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난 첫날부터 편지를 쓰고 받는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전하고 또 전하고 있는 믿음의 선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총회 심의 중에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질문했습니다. 서울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은 대단히 다른 격의 학교인데 어떻게 이런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질문하신 목사님은 보수성이 있는 나성 교단에서 사역하는데 있어서 혹시나 모를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저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한 질문인 듯싶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앞에서 언급한 답변으로 대신했습니다. 이재철 목사는 보수 성향의 목사입니다. 김영봉 목사는 중도 성향의 목사입니다. 김기석 목사는 진보 성향의 목사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세 분의 목사님들의 설교와 목회의 방향성을 나름 벤치마킹하거나 취사선택하는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이 세 분 목사님들의 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굵은 선에서 빗겨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섬기는 교회 지체들의 성향도 매일반임을 너무나 잘 압니다. 어떤 성도는 친 보수적인 성향이라 미래통합당을 지지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중도 보수적인 성향이라 국민의 당을 지지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또 어떤 성도는 대단히 진보적이라 더불어 민주당이나 정의당을 지지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그게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라는 내 사랑하는 조국의 자유로움이라는 정체성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선 인민 민주주의라는 이름만 갖고 있지 공산국가이자 폐쇄적인 병영국가이며 독재 국가인 북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정치적인 다양성은 신자들 모두에게도 부여된 특권입니다. 이것을 자기와는 생각이 다르다고 매도하고 비평하고 싸잡아 공격하는 것은 그게 바로 폭력이며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획일화의 폭거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정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는 얼마든지 색깔이 다를 수 있고, 이념과 성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념에 따른 정당, 그리고 정치가를 지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는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에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신앙적 성향에 따라 마찬가지로 보수, 중도, 진보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믿음의 동선이 다르다면 그것은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습니다. 신앙적 성향은 다르더라도 결론은 하나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분은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심이라는 믿음의 선에서 이탈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분은 그리스도이사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의 동선에서 이탈하면 그것은 절대로 수용해서는 안 되는 믿음의 마지노선입니다. 제가 보수적인 신학교인 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사, 석사를 마쳤다고, 제가 진보적인 성향의 신학교인 연세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쳤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동선에서 지난 18년 동안 빗나간 것을 본 교우들이 있습니까? 제가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나, 한국독립교회 연합회에서나, 이제 마지막으로 사역하게 될 대한기독교나사렛 성결교회에서 전했던 메시지나 전할 메시지가 다른 것으로 바뀌겠습니까? 그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은퇴하는 그 날까지 여러분에게나 교회 밖에 있는 비 신앙인들이나 관계하지 않고 공히 이것을 전하다가 강단을 내려올 것입니다. 우리 주는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심을 전할 것입니다. 누가 오늘 이강덕 목사의 동역자입니까? 동일하게 이것을 전하는 세인 지체들입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이 목사의 신실한 동역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경남에서 목회하는 참 훌륭한 후배가 몇 주 전, 페북에 올린 제 글을 보고 SNS로 문자 하나를 보냈습니다. 글의 내용은 이런 글이었습니다. “형님! 예배 한 시간 그것도 마스크 착용 손세정제하고, 열 체크하고 들어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공격하면서 출판사 업무는 스톱 안 하네요. 백화점도, 식당도, 관공서도 말입니다. 외부야 그렇다손 치고 내부적으로 소위 지식인인척 하는 고상한 목사들과 교인들은 살판났습니다. 교회부흥이 숫자로만 평가받을 수 없지만, 그래도 숫자가 있어야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한국 교회 현실에서 몇 안 되는 교인들 데리고 목회하면서 지칠 대로 지쳐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위로와 격려는 못할망정 물 만난 물고기 모양으로 주일예배 드리는 교회들을 전부 패대기치는 그들의 작태가 심히 염려되고 화도 납니다.” 후배의 글을 읽으면서 목사로 지금의 형국을 살아내며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아픔의 내용들이 담긴 채로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진 것 같아 마음이 짠했습니다. 저는 대 사회가 교회를 향하여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아우성에 대해 수긍하고 수용했기에 4주째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리는 이유는 세상의 소리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혹시나 모를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이지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방법이 옳다고 인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에 하나 당신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있지도 않은 하나님께 헛된 짓을 하는 것이니 정신 차리라고 매도하는 것이었으면 저 역시 오프라인 예배에 목을 걸었을 것입니다. 후배의 말대로 주일예배를 드리는 목사를 전부 패대기치는 이유가 세속의 힘이 옳기에 따르라는 것이었다면 저 역시 분명히 목을 걸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상황에 따라 자칫 잘못하면 이번을 계기로 세상은 우리에게 걸핏하면 예배에 대하여 시비를 걸 수 있는 충분한 위험성에 노출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로 인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독교의 절대적 본질이라는 예배 드림이라는 동선에서 이탈하라는 압력과 세뇌가 무언중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동역자로 살아가는 한 동선은 분명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했던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처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함께 서 있는 동선’입니다. 이 동선에서 이탈하지 않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찬양합니다. 내 인생 여정 끝내어.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향해 말이 예수 인도하셨네 내 길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이 가시밭길 인생을 허덕이면서 갈 때에 시험과 환란 많으나 예수 인도하시네. 내 길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시네. 내 밟은 발걸음마다 주 예수 보살피시사 승리의 개가 부르며 주를 찬송하리라 내 길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