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물러서지 말아야 하는 것 본문: 고린도후서 1:1-2 서론) 제가 대학원에서 강의하는 클래스의 마지막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내용은 목회 리더의 십계명입니다.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떤 경우에도 ‘Lordship (주님의 주님 되심)’에서 흔들리지 말라. 2. 강대상에서 목숨 걸고 세 가지를 균형 있게 전해라 1) 하나님의 나라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의 긴장감에서 살아 내야 하는 삶을 선포하라 2) 오순절적인(사도행전적인) 성령의 일하심 3) 캐리그마(예수의 탄생, 고난, 죽음, 부활, 승천, 다시 오심)의 신학과 다른 신학과 타협하지 말라 3. 끊임없이 3C를 질문하라. ① calling ② character ③ capability 4. 맘몬에 결코 넘어지지 말라 5. 정치적 편향에 흔들리지 말라 6. 자기 관리에 목을 걸어라 7. 쓸데없는 모임에 나가지 말라 8. 성경중심적인 성경 연구의 결과를 상황중심적인 목회에 적용함으로 보폭을 넓혀라 9. ‘Vor Gott Ohne Gott’의 신학적 고집으로 목양의 현장을 사수하라 10. 1일 100페이지 독서를 생활화하라 마지막 강의 시간의 강의 내용이다 보니 학생들 모두가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이 열 가지의 내용을 다짐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갖고 한 학기를 마감합니다. 들어보시니까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 신학교에서 목회 후보자들이 들어야 할 내용으로만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10가지의 내용은 꼭 목회자 후보생만이 갖고 들어야 하는 항목들은 아닙니다. 어떤 면으로 살펴보면 오늘 예배에 참석한 우리 세인 지체들 역시 새겨들어야 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10가지의 내용 중에는 모름지기 성도라면 물러서지 말아야 하는 본질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Lordship (주님의 주님 되심)’에서 흔들리지 말라. ※ 맘몬에 결코 넘어지지 말라 ※ 정치적 편향에 흔들리지 말라 ※ 자기 관리에 목을 걸어라 ※ 쓸데없는 모임에 나가지 말라 ※ 성경중심적인 성경 연구의 결과를 상황중심적인 목회에 적용함으로 보폭을 넓혀라 ※ ‘Vor Gott Ohne Gott’의 신학적 고집으로 목양의 현장을 사수하라 열거한 내용들은 타협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성도라면 단호하게 타협을 거부하고 올곧게 실천해 나아가야 하는 내용들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물러서거나 우유부단하게 머뭇거려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저는 아주 가끔 목사로서 가져야 하는 영적 마지노선의 오기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이것을 포기하면 목사라고 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의 어록을 빌려 말한다면 나를 날마다 쳐서 복종하는 오기입니다. 그것은 calling의 의미입니다. 즉 부르심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부르셨는가? 의 곱씹음입니다. 이것의 재확인은 곧 목사가 목사로 이 땅을 살아감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목사의 자존감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12절을 읽겠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저는 1981년에 이 말씀을 받음으로 주의 종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목회가 힘에 부치거나 고통스러울 때면 언제나 이 말씀으로 돌아가려고 했고, 이 말씀을 통하여 마음을 다잡이 했습니다. 더불어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에 대한 소명의식을 곧추 세워 목사가 세워 나아가야 할 영적 주존심을 갖고 달려왔습니다. 주의 종은 경우에 따라 무언가를 결정할 때, 주님과 대면하며 ‘Vor Gott Ohne Gott’의 심정으로 외롭게 결심해야 것들이 무궁무진합니다. 이 결정은 대체적으로 여론으로 살피면 비난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이자, 하나님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가치라는 확신이 서면 힘들어도 그 확신에 기초한 행동에서 물러서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주의 종이 가야하는 길입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고린도후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교우들에게 바울이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 중에 4번째의 편지가 고린도후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고린도후서를 쓰기까지 바울이 겪어야 했던 여러 마음고생, 그리고 영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 심도 있게 살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4개의 분파로 나뉘어져서 서로를 반목하며 비난하는 분쟁으로 홍역을 앓고 있다는 글로에 가정에서 파송된 인편에 의해 보고된 아픈 소식을 듣고 고린도전서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냈지만, 그 수고에 대한 대가가 별로 신통치 않다는 것을 알고 바울 스스로가 고린도에 직접 가서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을 직접 대면하기로 마음먹었음도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방문을 통해 아주 치욕스러운 문전박대를 받았고, 심지어 그를 반대하는 대적자들에게 사도권에 대한 공격까지 받는 최악의 대우를 받고 다시 에베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음도 살펴보았습니다. 이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아파하면서 지금은 분실되어 우리 손에 없는 세 번째 편지인 ‘서신 B’를 썼고, 이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조금은 바울의 목양적인 권고로 인해 수습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긍정의 보고를 디도를 통해 받았지만, 아직도 고린도교회의 기저에는 바울을 반대하고 그를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안 바울이 우리가 살펴보기로 한 고린도후서를 작성했음을 조금은 깊게 지난 주일 고린도후서 강해의 첫 설교를 통해 공부했습니다. 이 고린도후서를 쓰게 된 배경사를 전제할 때, 오늘 두 번째 설교의 본문인 바울의 문안 인사의 의미도 해석하기가 수월해 집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 지체들에게 4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를 보내면서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무엇을 이 인사에서 알게 됩니까? 바울의 대적자들이 바울을 공격하고 있는 사도권에 대한 공격적 방어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에 대하여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심대하게 도전하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편지의 첫 번째 문구에서 밝힙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문구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대단히 비장해 보이는 선언입니다. 본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됨은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고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여기에 번역된 ‘뜻’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델레마토스’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는 ‘의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를 준비를 위해서 보는 약 20여권의 영어 성경에 공히 단호한 ‘의지’를 의미할 때 쓰는 ‘Will’이라는 단어로 통일되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바울의 단호한 의지는 당연한 성서적인 기초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직책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3가지를 전제합니다. ①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사도행전 1:21-22)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물론 바울은 이 성경 구절에 맞추어 볼 때 자격 미달입니다. 왜?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직접 목도한 사람도 아니요,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공생애를 같이 보냈던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은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자라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어떻게?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행 9:1-19)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복음 사역을 위임받는 자입니다. 이 항목에도 바울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주님과 함께 생활하며 사도로 부름 받은 12명의 제자와는 삶의 지리적영역이나 동선이 달랐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본인 스스로가 주님으로부터 복음의 사역을 위임 받은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아나니아를 통하여 받은 사도로서의 위임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 아나니아에게 현현하셔서 직가에 가면 바울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에게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아나니아가 두려워하는 정황을 보고 하신 말씀이 그 근거입니다. 사도행전 9:15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은 예수께서 아나니아를 통해 전하였던 이 메신저를 본인이 사도를 직접 부름을 받은 근거로 붙들고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예수님과 같이 동고동락하였던 사도는 아니지만 주님이 이방인들을 위해 직접 부르신 사도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습니다. 바울은 본인의 사도권에 대해 시시비비하는 고린도교회의 대적자들에게 본 서를 기록하는 첫 번째 구절에서 이 세 가지의 획득된 성서적 권위의 근거를 갖고 분명히 자기의 정체성을 피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저는 바울의 이 태도를 접하면서 이런 강력한 도전이 임했습니다. 모름지기 2020년 3월 15일을 지나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하는 정체성이 있다고. 모름지기 코로나 바이러스 19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물러서지 말아야 하는 정체성이 있다고. 무엇입니까? ※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정체성에서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신천지 집단에 속한 자들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영적 도둑놈들이기 때문입니다. 정체가 탄로 나는 순간, 영혼의 도둑질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헌데, 요 근래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기사들 중에 신천지 집단에 소속된 자들이 자기를 들어내기를 꺼려하는 또 다른 이유가 적시된 것을 보았는데 이제는 본인이 신천지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사회적인 따돌림을 당할 것이 두려워서라는 이유를 본 적이 있습니다.누군가에게 자신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인생처럼 비참한 인생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물며 본인이 종교인으로 살면서 다른 종교인을 빼앗아 가는 삶을 사는 자가 어떻게 아름다운 종교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누군가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인정받는 인생이 아닌, 가까이하기에 두려워하는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를 받는다면 그 인생은 정말로 헛된 인생을 산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내가 예수를 믿은 삶을 살아왔다고 선포할 때,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소개를 받았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상대방이 그 사람을 존중해 주는 정도의 삶을 살아야 그가 적어도 그리스도인이지 않겠습니까? 지난 주간, 춘천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의 설교를 그가 섬기는 교회 홈페이지에 방문해서 경청했습니다. 친구가 인터넷 온라인 예배를 통해 선포하는 설교 중에 정말로 마음을 때렸던 대목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많이 아쉽고 아픈 일이지만 당분간 사회적 거리두기에 우리 성도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오늘 성도들에게 그 반대되는 권면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회적으로는 거리 두기에 적극 동참해야 하겠지만 영적으로 하나님과는 거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지근거리에서 적극적으로 교제해야 하겠습니다.” 듣는데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지금 우리 세인교회도 지체들끼리 3주라는 기간 동안 사상 초유의 거리 두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교회 청소를 하기 위해 만난 셀 지체들끼리 인사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집사님, 권사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인사를 소리를 듣다가 괜스레 마음이 서글퍼졌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뭐 그런 등등의 아픈 소회들이 밀려왔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지금 정말로 기가 막힌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신천지 집단의 일탈과 거짓된 행동으로 자행된 종교적 불신이 교회 공동체까지 번지는 사상 초유의 기독교적인 위기가 극에 달한 여러 가지 정황들이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목사부터 진퇴양난의 굴레에 갇힌 느낌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예배를 인터넷으로 드리는 교회의 목사는 나름 생각이 있는 목사고, 오프라인 예배를 드리는 목사는 신천지 집단과 다를 바 없는 악의 축으로 매도당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목사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나타내기가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교우들에게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설교를 통하여 권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에서 물러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가 성령 받은 사도들과 제자들의 역동적인 사역으로 인해 부흥의 부흥을 거듭합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소재해 있는 산헤드린 유대 종교의 본산은 대단히 거북했습니다. 혹시나 우여곡절 끝에 제거한 예수의 도가 다시 일어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의 역사가 엄청나게 일어나자 산헤드린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종교적 헤게모니를 무기로 예수님에게도 그렇게 했던 것처럼 사도들을 체포하여 구금하기에 이릅니다. 허나 주의 사자가 옥에 갇혀 있는 제자들을 자유롭게 구출해 줍니다. 이 사실을 놀랍게도 뒤늦게 안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다시 물리력을 동원하여 제자들을 체포하여 공회 재판에 넘깁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압박합니다. 사도행전 5:27-28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다시 말해 사도들의 사역을 근원적으로 압박하며 강제한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이고 물리적인 압박을 받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외쳤던 선포를 귀담아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5:29-32절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바로 이 대목에서 저를 영적으로 흥분하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던 복음의 사람들에 대한 감동입니다. 결코 외부적인 압력에 물러서지 않았던 초대교회의 형제들에 대한 감동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른데 제가 정말로 감동의 감동을 받은 부분은 이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여기에 기록된 단어 ‘아포스톨로이’가 바로 ‘사도들’이라는 복수 명사입니다. 12명의 사도들 모두가 이 정체성에서 빗나간 자 없었다는 누가의 보고입니다. 모든 사도 공동체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세인교회는 이제 3주째 인터넷 실시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인터넷 예배를 드리면서 어떤 성도는 오프라인 예배보다 더 편안한 예배를 드린다고 평가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쿨 하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가 염려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예배에 익숙해지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그 편안함이 하나의 문화로, 혹은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자기를 부인하라는 기독교적인 자기 비움에 전혀 개의치 않고 세상 사람들이 영화를 한 편 보는 것처럼 예배 때우기로 예배를 만족해하는 내 신앙의 자리가 굳혀질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예배의 안락함에 익숙해진 신자에게 무슨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의 정체성이 중요하게 다가오고 영적인 의미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수많은 고린도교회의 대적자들이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공격에 대하여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히 그 대적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본인 스스로가 주님의 것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늘 코로나 19사태에 직면한 이 시기에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마저 흔들고 있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인 교회 지체들에게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성도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뒤로 후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20세기 불의 사자 레오나드 레이븐힐이 이렇게 토했던 글을 읽으면서 저 역시 영적으로 흥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적 빙하기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성령의 기름부음이다.”(레오나드 레이븐힐, “소돔에는 말씀이 없었다.”, 2009년,P,204.) 동의합니다.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는 ‘성령이 기름 부으신 지성이 있는 교회’입니다. 나는 영적 빙하기에 접어든 한국교회를 다시 녹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강력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이번 한 주간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충만하게 임하여 아무리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세속의 공격이 매섭더라도 너끈히 승리하는 주의 것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로마서 1:6절을 봅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한 바울은 이 편지를 시작하는 1:1절에서 이렇게 자기를 정의했습니다. 로마서 1: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런데 이 위대한 편지를 쓰기 직전에 먼저 쓴 고린도후서 1:1절에는 이렇게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저와 여러분은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으로 부름 받은 성도임을 잊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바울처럼 주의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때로 성도는 강철같이 이런 자존감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이때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사명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 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