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당신은 오늘의 남은 자입니까?
본문: 스바냐 3:9-13
서론)
오늘은 인터넷 예배인 온라인 실시간 예배와 여러 상황이 결코 녹록하지 않은 비상시국과도 같은 형편이지만 교회 예배당에 나와 예배하는 오프라인 예배를 이원으로 드리는 전무했던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이 시간 교회 예배당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온 교우들이나, 가정에서 인터넷 실시간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나 공히 예배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 어느 때보다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는 세인 지체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특히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지체들은 교회는 공동체이기에 공동체에서 느끼는 감동이 없이 개별적인 감동을 느껴야 하는 부담감이 있고, 더불어 예배 환경을 방해하는 또 다른 복병들이 숨어 있을 수 있기에 이것들을 극복해야 하는 이중고가 있을 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압도하시는 은혜로 인해 공동체 예배가 왜 아름다운지를 몸으로 체휼하는 역발상의 은혜까지 함께 임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코로나 19 사태가 조속히 종식되어 이 어처구니없는 예배드림의 상황이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제천에 소재해 있는 교회 중에 교회 이름을 ‘램넌트 교회’라고 명명한 장로교회를 오래 전에 길을 가다가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남은 자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교회 이름이 어려워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교회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말 그대로 ‘남은 자 교회’ 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개척되었다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게 정상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오늘 남은 자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목사로서 느끼는 영적 소회가 작금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더 강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날을 바라보며 당신의 사람들을 추스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그날을 향하여 달려가는 민감함 말입니다.
그러나 미리 겁먹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그런 목사는 아니니까요.
이제 신자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성경 66권 중에 외로운 섬처럼 여겨지는 스바냐서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론)
제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는 대목은 스바냐 예언서가 기록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입니다.
스바냐서를 시작하는 1:1절은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저와 여러분에게 제공합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이 구절에 근거한다면 분명히 스바냐는 남 유다의 제 16대 왕이었던 요시야 시대에 활동했던 예언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야라는 왕을 떠올릴 때 머리에서 가장 먼저 반응하는 지식은 종교개혁입니다.
요시야의 아버지(아몬)와 할아버지(므낫세)에 의해서 자행되었던 야웨 하나님 신앙을 떠난 우상숭배에 대한 강력한 척결 개혁 운동의 주인공이 바로 요시야임을 선지식들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척결운동을 요시야의 종교개혁이라는 모토로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요시야가 진취적으로 이룬 종교개혁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①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의해서 축조되었던 혼합주의적인 우상의 산당과 아세라 목상, 조각 신상, 주조 신상들을 제거했습니다.
② 바알 제단도 무너뜨리고 제단 위 분향 단들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들을 부수어 가루로 만들고는 그 가루를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던 자들을 죽여 그들의 무덤 위에 뿌리는 강력한 정책을 폈습니다.
③ 무너진 성전을 국고를 투입하여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작업을 행했습니다.
④ 성전 보수 과정에 발견한 모세의 율법 책을 발견하여 다시 유월절을 회복하는 영적 질서를 세우기까지 합니다.
일련의 이런 일들을 종합하면 다음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요시야는 증조부 히스기야가 쌓아올렸던 야웨 신앙을 무너뜨린 므낫세와 아몬의 혼합주의와 바알리즘이라는 우상 숭배를 완전히 일소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 여기서 하나의 주석을 해야 합니다.
요시야가 이런 종교개혁을 이룬 시기가 주전 622년입니다.
그런데 스바냐서의 주된 메시지는 우상숭배와 혼합주의에 빠져 있는 남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등장합니다.
그 증거로 스바냐 1:1-2:3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폭넓게 기록되어 있고, 3:1-8절에는 조금 범위를 좁혀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준희 교수는 이런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스바냐가 활동하던 당시 유다의 종교 상태는 극도로 문란하여 종교혼합주의가 팽배했다. 스바냐서의 시대적 배경을 주전 630년경으로 잡는 이유는 요시야가 주전 622년에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성전과 종교제의를 정화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스바냐 시대의 이러한 상황은 종교 개혁이전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차준희, “예언서 바로 읽기”, 성서유니온, p,249.)
차 교수의 주해에 동의한다면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택한 3:11-13절의 배경은 종교 혼합주의의 혼란함에 빠져 있는 유다가 요시야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한 종교개혁 이전의 시대적 배경을 전제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3:1-8절에서 스바냐는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던 타락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천명합니다.
3:4절입니다.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당시 야웨 신앙을 저버린 종교적인 지도자들에 대한 서늘한 심판을 예고한 예언자 스바냐는 하나님의 단호하신 메시지를 거침없이 전합니다.
이어지는 스바냐 3:7-8절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부지런히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들을 자행하던 시절이 스바냐가 활동했던 시대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참 우울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본문 9절부터 반전이 임합니다.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그 때’가 언제인가?
1-8절에 기록된 심판이 끝나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버렸던 사악한 예루살렘의 심판이 끝나는 날입니다.
그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9절의 주어는 심판의 주체이신 하나님인데 하나님께서 일하실 내용을 9절이 담고 있습니다.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할 것이라고 예언자를 통해 천명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10절을 봅시다.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야웨 하나님께서 이렇게 교통정리를 하십니다.
‘내게 구하는 자’는 즉 ‘하나님을 찾는 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내가 흩은 자의 딸’이라고까지 설명하십니다.
이 단어를 보니 바벨탑 사건이 연상됩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자들의 공통분모가 무엇이었습니까?
지난 수요일 욥기 강해 때 분명히 했습니다.
창세기 11:4절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우리들의 이름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행한 일의 이유는 흩어짐을 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교만이 하늘에 닿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바벨을 쌓았던 뭇 무리들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까?
그 반대입니다.
흩어짐을 면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어버리셨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적용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흩어지게 한 대상을 상징의 언어로 ‘구스 땅 건너편’이라고 예언자에게 알려줍니다.
구스가 어디입니까?
에티오피아입니다.
이 지명은 스바냐 당시로 해석한다면 땅의 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지명은 너무나 선명한 이방의 땅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방의 딸들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 것임을 말합니다.
흩어짐을 당한 자들이 다시 흩어졌던 곳으로 모이게 됨을 역설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 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자들의 분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제거한 곳이었기에 그곳에 모이는 자도 교만하지 않은 백성들이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교만하지 않는 자들이 모이게 되는 곳이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주일 설교의 클라이맥스를 보아야 합니다.
본문 12-13절입니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12절에서 분명히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곤고한 백성들이 바로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될 것인데 그들은 바로 교만하지 않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강력한 어조로 이렇게 당신의 주권적인 일하심을 설명하십니다.
이들은 내가 남겨 둔 자라고.
13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들의 이름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
동시에 이들의 궁극적인 특징은 악을 행하지 않는 자, 거짓을 말하지 않는 자, 입에 거짓된 혀가 없는 자, 먹고 누워있어도 두렵게 할 자가 없는 하나님의 보호함을 받는 자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교훈이 있습니다.
교만하지 않은 자들이 모이는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설명했듯이 이 장소는 선민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권위적인 상징의 고유 장소입니다.
그래서 이 장소에 모인 자들을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고 지칭하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구성원들이 놀랍습니다.
이곳에는 흩어졌던 구스의 딸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예물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와 경배하는 구스의 딸들이 여기 이 장소에 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신학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까?
감동의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조각하신 남은 자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없는 신앙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구스의 딸까지 포함된 악을 행하지 않는 자, 거짓을 말하지 않는 자, 입에 거짓된 혀가 없는 자, 먹고 누워있어도 두렵게 할 자가 없는 하나님의 보호함을 받는 자들이 남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의 레마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 오늘의 남은 자는 편을 가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본문 11-1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 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스바냐 오늘 본문 이전까지 야웨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이스라엘을 지칭할 때 거의 대부분의 호칭을 ‘그들’이라는 3인칭 단수를 사용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을 ‘너’라는 2인칭 여성 단수로 바꾸어 호칭하고 계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야웨 하나님께서는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될 당신의 조각한 사람들을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거나 편 가르지 않으시고 당신이 인정한 남은 자 그룹 즉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단 하나의 상대적인 인격체로 존중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나라에 합당한 백성들을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부름을 받은 자들 모두를 품에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오늘의 남은 자는 결코 편 가름이 없는 삶을 마땅히 살아야 합니다.
이번 주일을 맞이하기까지 한 교회를 맡은 담임자로서 얼마나 많은 고뇌와 생각을 하면서 맞았는지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무게감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세인교회는 이번 주일 예배를 이원화하여 지금 예배를 드리는 형태로 세팅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인터넷에 조금이라도 접속이 가능한 교우들이라면 교회에 나오지 말고 가정에서 실시간 예배로 주일을 지키라고 권고한 반면, 휴대폰이나 인터넷에 도무지 접근이 어려운 지체들은 불편하게 부담되지만 교회 예배당에 나와 오프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지난 한 주간, 국가공동체는 교회에서 주일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강력하게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시간마다 여론을 통해 압박해 왔습니다.
저는 국가 공동체를 지휘하는 자들의 의도에 대한 십분 이해하며 동의하였기에 온라인 예배로 주일 예배를 섬기도록 성도들을 안내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를 분명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온라인 예배를 드리도록 권고한 이유는 국가공동체의 강력한 압박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거스틴의 용어로 말한다면 ‘CIVITAS TERRAE’ (땅의 시민)로서 항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CIVITAS DEI’(하나님의 시민)로서의 권위를 갖고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드리는 주일 예배에 대한 평가가 대단히 위험스럽다는 점에서 현직에 있는 목사로 염려스럽습니다.
약 60-70%에 해당하는 대형교회들이 온라인 예배를 선택했고, 30-40%에 해당하는 교회들은 주일 예배를 오프라인 예배로 강행한다는 통계를 뉴스를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 이런 분이 혹시 계십니까?
국가정책에 따르지 않아 오프라인에서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는 문제 많은 교회이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좋은 교회라고 평가하는 분이 계십니까?
대단히 위험하고 나쁜 편 가르기 평가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잣대와 이성적인 판단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그런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선택이 되었든 그 교회의 담임목사들이 자신의 목회신학적인 틀에서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까를 심히 고민하고 성찰하다가 내린 결론을 국가적 잣대로 혹은 신앙적 잣대로 옳다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기독교출판사인 새물결플러스의 대표인 김요한 목사가 SNS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부 목사님들이 주일 예배를 공동으로 못 드리는 것에 대해 신앙적인 배교 현상으로 간주하며 비분강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순수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상황을 정확히 간파하고 이해하는 데는 많이 부족한 태도라고 봅니다. 작금의 상황은 교회가 공권력에 의해 신앙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안녕을 위해서 함께 협력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요가 무엇입니까?
국가가 요구하는 주일 예배 삼가에 대하여 긍정적인 순응을 해달라는 점잖은 권고입니다.
저는 김요한 목사의 권고에 대하여 참으로 시의적절한 본인의 입장 표현이라고 동의했습니다.
그런데도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만에 하나, 이런 에두름의 표현에도 불구하고 주일 예배를 강행한 목사를 내 편이 아니라고 공격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편 가름이라고 경고하고 싶습니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식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영이다.”(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안식”, 복 있는 사람,p,149.)
이렇게 기막힌 통찰을 한 헤셀은 이어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시간을 알아채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공간의 관점에서 시간을 느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 관점에서 시간을 느끼는 것이다.” (같은 책,p,174)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참담한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 어떤 목회자는 주일의 예배드림을 오프라인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신과의 만남을 사수하겠다는 것을 피력한 반면, 어느 목회자는 온라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겠다고 선택한 것이 어찌 옳고 그름의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은 편 가름을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따라 편 가름을 하지 않는 자가 오늘의 남은 자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 우리 세인 지체들은 남은 자입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반응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찬양을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넘지 못할 파도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우리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여/허덕이며 가야하는 우리 인생인데/이럴 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주님 밖에 없어요/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주님이 함께 가요.
사순절 첫 주일이 금년은 참 무겁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믿기로 했습니다.
주님이 넘지 못한 산이 앞에 있어도, 파도가 가리고 있어도 저와 여러분과 함께 가신다는 것을.
편 가름이 넘쳐나는 시대에 하나님이 조각한 남은 자로 하나되는 은총을 경험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다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