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7일 월요일 성서일과 묵상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92편, 예레미야 26:1-20, 데살로니가전서 4:1-8, 시편 142편, 미가 1:1-5
꽃물 (말씀 새기기)
예레미야 26: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마중물 (말씀 묵상)
정직한 목사의 사명은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말씀에 대한 왜곡은 훗날 하나님 앞에서 목사가 받아야 무서운 심판의 원인일 것이다. 경에 이르기기를 오죽하면 ‘선생’이 되지 말라 했겠나싶다.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당시 최고의 실력자인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구금하고 린치 하는 폭력을 가했다. 더불어 조선시대 역모를 꾀하던 자들을 저작거리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참수한 머리를 걸어놓아 경종했던 것처럼 예레미야를 베냐민 문 위층에 묶어 두어 사람들에게 수모를 준 뒤 방면한 기록이 예레미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무시무시한 위협과 공포를 경험했던 예레미야인데 왜 그에게 영적 자괴감이 없었겠는가! 예언자는 이 수모를 경험한 뒤에 20:7절에서 대단히 민감했던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여과 없이 토로한다.
차준희 교수는 ‘예레미야 다시 보기’에서 이 구절을 아슬아슬하지만 이렇게 용감하게 해석했다.
“파타하‘는 ’유혹‘ 또는 ’후리기‘(남의 것을 갑자기 빼앗거나 슬쩍 가지다.)를 뜻하고, ’하자크‘는 ’강간‘을 뜻한다. 이 두 단어가 나란히 사용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지니고 있는 복잡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그것은 ’유혹의 달콤함‘과 ’강간의 난폭함‘을 나타낸다.” (차준희, 『예레미야 다시보기』, 2009, 219.)
예레미야가 자발적으로 예언자 되겠다고 나선 게 아니라는 말이다. 야훼께서 강제적으로 압박해서 예언자가 된 사람이 예레미야다. 그런 그가 바스훌에게 심각한 모욕과 데미지를 당했다. 예레미야는 단지 바스훌에게만 이런 치욕을 단한 게 아니다. 그가 예언자로서 살랐던 전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들만하다. 나는 충분히 예레미야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야훼께 충분히 항거할만한 예레미야가 태업을 했지만 그 기간에 하나님께 손을 들고 항복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너무 절절하게 느끼는 고백이 예레미야 20:8-9절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친구는 이 구절을 ‘흔들리는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주석했다. 신학자는 멋있게 제목을 붙였지만 현장 목회자는 나는 대단히 세속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라면 머리를 굴려야 하지 않을까, 이제부터는 적당히 해야 하지 않을까, 나름 절반은 타협해야지! 가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게 정직한 소회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맞아터지고, 감옥에 갇히고, 구렁에 빠지고, 수없는 살해 위협을 당하는 참담한 일을 겪으면서도 자기의 길을 갔던 이유는 오늘 성서일과 때문임에 틀림없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렘 26:2)
이래저래 성전 설교는 왕창 부담이다.
주일을 또 지냈다. ‘또’라는 말이 맞다. 목사로 살아온 지 30년이 넘어선 목사들이라면 아마도 큰 차이가 없을 거다. 또 어김없이 찾아온 주일이라니까 숙명적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고, 뭐 그렇다. 하지만 한 가지는 민감하려고 한다. 또 그렇게 할 거다.
주일 설교 준비를 마치고 원고를 탈고하면 설교 원고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잠시 눈을 감는다. 그러면 여지없이 세미한 음성이 들린다.
“이 목사야, 오늘 앞에 놓여 있는 네가 작성한 설교 원고대로 너부터 살아라.”
그러면 이렇게 기도로 반응한다.
“하나님, 살 수 있도록 세밀하게 도와주십시오.”
두레박 (질문)
나는 설교한 원고대로 얼마나 실천하고 있지?
손 우물 (한 줄 기도)
예레미야를 압박해서 예언자 만드신 야훼 하나님, 제게도 예레미야의 영성을 주십시오. 너무 힘든 목양의 현장입니다. 쓰러지지 않도록 영성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설교한 말씀을 시분초마다 복기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