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1일 화요일 성서일과 묵상 불편한 길을 걷겠습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31편, 예레미야 28:10-17, 로마서 3:1-8, 아가 2:8-13, 창세기 29:1-14 꽃물 (말씀 새기기) 예레미야 28:11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냐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예레미야는 하나냐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는 비주류이자 여론에서도 감히 상대가 되지 않는 초라한 예언자였다. 이에 비해 하나냐는 대세였고.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소위 말하는 ‘넘사벽’이었다. 하지만 하나냐와 예레미야의 한 판 승부는 예레미야의 완승으로 게임이 끝났다. 하나냐의 서슬이 시퍼런 거짓 예언은 유다 민중들을 열광시켰다. 예레미야의 진실한 예언은 유다 민중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했다. 이미 게임이 안 되는 승부였는데 놀랍게도 예레미야의 한판승으로 어찌 보면 싱겁게 결판이 났다. 나는 오늘 성서일과를 목도하면서 전율하게 하는 예언서의 구절을 보았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의 길을 가니라” 오죽하면 이렇게 하나님께 대들었을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렘 20:7) 맞다. 예레미야의 길은 고독의 극이었을 것이다. 외로움의 극치였을 게다. 견디기 어려운 형극이었을 거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이 고통의 길을 갔다. 묵묵히 그 길을 갔다. 예레미야의 이 고백은 항상 감동의 극치를 주는 구절이지만 오늘은 더 복기하고 싶어진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이제 목회의 마지막 필드에 들어선 나는 오늘 성서일과에서 주어진 이 본문이 적지 않은 위로를 준다. 무슨 올곧은 말을 해도, 어떠한 진정성이 있는 삶을 살아도, 손해와 피해를 극단적으로 감수하고 불편한 것을 선택하여 행동해도 목사가 하는 말은 도무지 인정하지 않는 시대, 아니 도리어 더 공격의 강도를 높이는 호모데우스의 시대이지만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이 하고 예레미야의 행보를 아딧줄로 삼아 본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의 길을 가니라”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냐의 메시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합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에는 스데반에게 던졌던 돌들이 날아옵니다. 해서 돌을 맞지 않기 위해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버리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예레미야가 갔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가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목회자 걸어야 하는 길은 불편한 길이 맞다. 다른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이 말이 옳다. 예레미야가 걸었던 길 말이다. 또 결의해 보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이 길을 걸을 것을.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하나님, 어제는 주님이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묵묵히 섬기고 있는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을 만나 너무 행복했고 감사했습니다. 주님, 친구 목회자들이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외롭지만 예레미야의 길을 가고 있는 친구들을 격려하여 주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