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7일 금요일 성서일과 묵상 토설(吐說)이었기에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45:8-14, 스가랴 2:6-13, 로마서 7:7-20, 시편 45:10-17, 창세기 27:1-17 꽃물 (말씀 새기기) 로마서 7:19-20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이 고백의 주인공이 바울이라는 데에 그 진정성이 더해진다. 만에 하나 다른 이가 이 고백을 했다면 상투적인 멘트라고 치부할 수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바울이 토설한 고백이기에 그의 말마디에 담겨있는 그 간절함이 다가온다. 또 하나, 바울의 이 선언이 마음에 와 닿은 이유는 나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목사로 이제 전 인생을 살아온 사람으로 지금도 숨길 수 없는 진실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삶의 자리에 있다는 자괴감이다. 목사가 무슨 그리 큰 죄의 자리에 있겠나 싶지만, 삶으로 직접 행하는 죄는 아닐지라도 오히려 생각을 지배하는 이성,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 그리고 도저히 변하지 않으려는 의지로 범하는 원하지 않는 죄는 도진개진이다. 유진 피터슨이 일갈했던 말이 생각난다. “감정의 동의어로 쓰이는 믿음은 무의미합니다. 죽은 단어입니다. (중략)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헌신을 포함하지 않는 믿음은 무의미합니다. 시시한 감정이기에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행위여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참여하게 합니다.” (잘 산다는 것, p,48.) 목회라는 것이 이론이 아니라 삶인데 살아내는 헌신이 아니라, 감정으로 달려왔던 내 인생의 한 부분을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다. 목사라는 레테르로 인해 더욱 갑각의 것들로 치장하고 무장하여 하나님을 향한 순백의 헌신을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울질하고, 감정의 폭으로 재단하고 심지어는 그것이 복음인양 선포했던 죄를 하나님께 힐문당할 텐데 두렵다. 그래서인지 바울의 토설이 오늘 나에게 ‘뒤나미스’로 다가와 폭격한다. 바라는 것이 있다. 이 폭격에 무디어지지 않는 민감함이다. 매우 아프고 쓰리지만 그날에 그분 앞에 설 때까지 이렇게 폭격당하기를 소망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심장을 타격하는 아침이다. 두레박 (질문) 나는 영적 감각에 있어서 얼마나 민감한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깨달음에 있어서 둔감하지 않고 민감하게 하옵소서. 주군이신 하나님, 돌이킴에 있어서 예민하게 하옵소서. 마비되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영문학을 전공하던 시절, 읽었던 The scarlet letter를 숙제로 읽었던 적이 있었다. 독후감을 써내는 것이 학점을 따는 방법이었기에 정독해서 읽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때 이렇게 보고서를 낸 기억이 있다. “주인공 딤즈테일이 받은 고통은 헤스터 프린이 당한 고통과 정비례한다.”고 그리고 이렇게 적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죄에 대해 양심이 짓눌리는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삶을 산다면 희망이 보인다.”고. 많이 희석되었지만 40년 전의 깨달음을 다시 복기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하나님, 암 제거 수술을 무사히 받은 지체의 향후 치료 과정을 지켜주셔서 순간은 고통이겠지만 완치라는 끝을 주시고 해피엔딩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