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일 화요일 성서일과 묵상 그대는 반려자의 선택 기준을 무엇으로 삼고 있는가?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19:161-168, 열왕기상 21:17-29, 요한일서 4:1-6 꽃물 (말씀 새기기) 열왕기상 21:27-29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마중물 (말씀 묵상) 아합은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사망한다. 예언자 미가야의 예언 그대로였다. 아합이 인생은 허무한 삶을 끝으로 마감한다. 대단히 안타까운 것은 아합의 인생은 적어도 이렇게 비참한 인생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끝을 맺는다. 아합은 야훼 하나님을 행한 나름의 경외함이 있었고, 심성 자체도 신명기 역사가들의 공격대로 무자비하거나 악만을 추구하던 자도 아니었다. 그는 심성도 여렸고, 백성들을 아낄 줄도 알았던 자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비극적인 삶의 이유는 이세벨을 용납하였기 때문이다. 야훼 하나님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세벨의 최후와 아합 家의 멸망 그리고 오므리 왕조의 최후까지도 예고하셨다. 어떤 의미로 보면 아합의 우유부단함, 혼합주의 용인 등등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아합에게 점수를 후히 주어도 부인할 수 없는 팩트다. 하지만 이런 비극적 종말을 엘리야를 통해 들었던 아합의 반응이 애처롭다. 옷을 찟고, 굵은 베로 옷을 동이고, 금식하고, 궁궐의 침상에 눕지 않고 버려진 바닥에서 누웠다는 보고를 통해 아합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신명기 역사가의 기록 여백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합에게 이런 비극적 말로를 맞게 한 장본인인 이세벨은 예후 혁명으로 비참하게 마감되었음을 안다. 실로 계속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것은 아합의 생이다. 좀 더 잘 살 수 있었는데, 좀 더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갈 수 있었는데 아내를 잘못 맞이한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인생여행이라는 천로역정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대단히 중요하다. 어떤 반려자는 만나는가는 내 삶을 좌우한다. 내가 섬기는 교회 지체들의 자녀들도 이미 자기들대로 살기로 마음먹은 자들이 대다수다.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함에 함몰되어 이미 영적인 안목으로 자신들의 삶을 계획하는 젊은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내 반려자를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찾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지만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릇된 선택은 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때문이다. 결혼을 위한 반려자를 선택하는 것은 교양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전공필수의 제 문제이다. 두레박 (질문) 은퇴의 시간이 가까이 올수록 나 또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치부하며 타협하는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섬기는 목회현장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세월 섬겼던 목회 현장에서 믿음의 한 배를 타지 않고 결혼을 감행한 자들이 많이 힘들어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내내의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아픈 것은 이 아픔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는 터널 속에 있다는 점입니다. 믿는 자의 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신실한 믿음의 젊은이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 오늘,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의 선택에 경악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 어찌해야 합니까? 길을 보여 주십시오. 나비물 (말씀의 실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는 말씀을 2023년 7월 4일 현제 어떻게 적용해야하는지 지혜를 간구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주님,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매는 바람에 무너진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을 보면 목사인 저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힘들어 하는 저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음, 방법도 지속적으로 공급하여 주십시오. 저들에게는 간절한 기도 제목입니다. 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