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 목요일 성서일과 묵상 광야 교회입니까?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00편, 출애굽기 4:27-31, 사도행전 7:35-43 꽃물 (말씀 새기기) 사도행전 7: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마중물 (말씀 묵상) 스데반은 조상 모세를 지칭하면서 이렇게 극찬했다. 광야 교회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믿음의 선진이라고. 연대기적으로 이해하자면 스데반은 모세보다 약 1,500년 후대에 존재하던 믿음의 후배였다. 까마득한 후대에 존재했던 후배로부터 광야 교회를 있게 했던 주체로 인정받은 것은 결코 가벼운 평가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최고의 극찬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교회론이라는 신학적 이론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주후 1세기의 사람 스데반은 이스라엘 광야공동체를 교회 공동체라고 이해한 대목도 그렇고, 모세는 광야 교회라는 공동체를 있게 했던 주인공이라는 재해석도 놀랍다. 광야 공동체를 교회라고 해석한 스데반의 혜안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2023년을 살며 지역 교회 공동체를 맡아 사역하는 목사인 나는 교회가 광야임을 묻곤 한다. 이상하리만큼 광야에서 탈출해야겠다는 의지가 큰 오늘의 한국교회, 또 그 안에 속해 있는 목회자, 그리고 신자들이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영적 자화상이자 기상도다. 그렇다면 스데반의 평가와 모세의 평가는 오늘, 어떻게 교회 안에서 읽혀야 할까? 모르긴 몰라도 스데반은 모세에 대하여 평가를 하며 믿음의 선진으로 극찬한 이유가 광야 공동체의 리더였기 때문이리라.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광야 공동체는 교회 닮아서는 안 되는 터부의 대상으로 여기는 영적 상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광야는 고통의 장소였지만 주님이 계셨고, 모세가 인도하던 극강(極强)의 신앙공동체였다. 어쩌면 광야 공동체라는 신앙적 정체성을 버리고 있는, 아니 버리려는 한국교회는 벌써 잘못된 길로 비집고 들어선 지 오래인 것 같아 아프고 또 아프다. 두레박 (질문) 내가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는 애굽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광야 공동체를 사수하고 있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 어떤 경우에도 교회가 광야 정신을 잃지 않게 하시고, 그 정신을 교회의 방향성을 정하게 하시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번영주의에 빠져 교회의 방향성이 안락함과 편리주의를 지향하는 괴물이 되지 않게 하소서. 영적 헝그리 정신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똑바로 알게 하시고,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올바르게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