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주일 예배를 마쳤는데 거리적으로 멀리 있어 인터넷으로 우리 교회 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정서적 세인 교우인 지인 권사님이 누가복음 16:1-9절에 대한 질문을 해왔다. 설득력이 있는 설명을 부탁한다고. 오늘 아침 큐티를 마치고 권사님께 도움을 드리기 위해 몇 자 적었다. 말씀은 언제나 신비이기에 완벽한 설명은 되지 않더라도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적었다. 누가복음 16:1-9절에 관한 단상 에모리 대학교의 켄들러 신학대학원에서 ‘설교와 신약’을 교수했던 프레드 B. 크레독이 누가복음 16:1-9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 비유에 대한 누가의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유 자체와 누가의 논평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프레드 B. 크레독, “현대성서주석-누가복음”,p,244.) 결국 비유 자체를 언급한 예수의 말씀과 누가의 부연적인 설명 중에 그 권위를 어떻게 부여할 것인가에 대해 분명히 한 셈이다. 크레독은 이어 말한다. “예수의 말씀은 누가의 말보다 더 권위를 갖는다.” (위 각주와 같은 페이지) 결국 이 교통정리가 되지 않으면 누가복음 16:1-9절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확실하다. 누가복음 16:1-9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본문이 주는 글감이 께름칙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불의하게 주인의 돈을 랜덤으로 막 쓰는 고용인(청지기)이 그 행위가 발각되었다. 주인은 당연히 고용인에게 해고 통보를 한다. 해고 통보를 받은 고용인은 실업자가 될 본인의 신세를 한탄하면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또 다른 후속 행위를 행한다.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러 그들이 빚진 액수를 파악한 뒤에 감히 주인의 허락도 없이 그들의 빚을 감해주는 법적인 증서를 쓰게 하고 탕감하는 파격적인 일을 진행한 것이다. 사태가 이 정도라면 주인에게 고용된 고용인은 가중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헌데 8절 이하에 기록된 주인이 반응이 께름칙하다. 통상적인 상식의 차원에서 이해 불가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8절) 주목할 것은 고용인의 행위나 정체성이 그를 해고한 사유에 대해 주인의 입장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옳지 않은 청지기” 영어성경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RSV 버전에 고용인 즉 청지기에 대한 정체성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the dishonest steward’ 주인이 보는 고용인의 자질은 여전히 빵점이다. 그런데 자질이 빵점인 고용인이 행한 일에 대해 평가하는 주인의 판단은 반전이자 충격이다.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새영어성경(NEB)는 고용인의 행위를 이렇게 표현했다. And the master commended that dishonest steward for acting prudently. “신중한 행동에 대해 칭찬했다.” 신중한 행동이라고 정의한 것은 대단한 파격이다. 문제는 바로 이 대목이 대부분의 독자들을 거리끼게 만드는 대목이라는 점이다. 주인의 재산에 대해 두 번씩이나 손해를 입힌 고용인의 일을 목도한 주인이 불의한 고용인의 행동에 대해 신중한 일이라고 두둔하고 칭찬했다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크레독이 주석이 그래서 빛을 발한다. 비유의 자체를 논한 예수의 의도에 천착하게 만드는 해석이 크레독의 설명이기 때문이다. 크레독의 설명을 다시 보자. “소유물들은 위험하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생활에 적합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운용하는 것은 가능하다.”(위의 책, p,246.) 프레독의 직설적인 해석을 한국적인 문화에 맞게 다시 구성한 김호경 박사는 이렇게 re-interpretation 했다. “본 텍스트의 1절에서 불의한 고용인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주인의 재산을 유용함으로서 ‘낭비’했다고 지적된 반면, 5-7절에서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인의 재산을 유용했고, 그것이 지혜로운 행동으로 칭찬받는다.” (김호경, “연세신학백주년성경주석-누가복음”, p,359.) 학자들의 연구 결과물들을 접하면서 이 본문 텍스트의 거리낌을 이렇게 해소하기로 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발언하신 이유는 불의한 고용인의 불의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의 설정 때문이었다고. 예수의 시각이 놀랍고 놀라웠다. 이 세대의 아들을 상징화하고 있는 고용인의 이타적 삶이 종교적 상투성에 길들여져 있는 빛의 아들들(유대인)보다 더 지혜롭다고 인정한 주군의 열린 스펙트럼이 너무 귀하고 귀하다. 주군의 로고스는 언제나 내게는 레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