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09.14 셀 사역2024-04-22 12:3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지체들과 함께 기억에 남아 있는 시 한편 나누기. 좋은 노래 한 곡 들려주며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찬송가 516장)
● 하늘의 문을 여소서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18:7-13
● 제목 : 목표를 상실하지 말라.
1) 단 지파 공동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첫 번째 목표와 상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의 변질된 목표를 소상히 살펴보자.
● 여호수아 19:40-48 참고 (첫 번째 단에게 주신 기업)
● 사사기 1:34-35 (결과)
● 본문 7-10절 (변질된 단의 목표 상실로 인한 궤도 이탈)  

2) 단이 하나님이 주신 목표 상실로 인해 파급된 영적인 불행이 무엇이었는가?
● 본문의 이해를 통한 불행 지적
● 오늘의 언어로 적용할 때 엄습하는 불행  

3) 선포된 설교를 통해 나누어야 하는 은혜를 곱씹어 보십시다.
● 주님이 주신 방향성과 목표를 잃어버리지 말자.
● 테마 ①
● 테마 ②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육체적으로 연약한 지체들을 위하여
(송은호 권사, 김순자 권사, 유영남 권사, 이제면 집사,
신태일 성도, 김재만 형제 외)
  ② 인턴 셀과 양육 4기 하반기 사역을 위하여
  ③ 리더 수양회를 위하여(9월 20일-토)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제 2차 리더수양회를 위하여 섬기고 중보하기
  ➁ 수요기도회 참석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9월 14일 주일 예배 설교 (사사기 90번째 강해)
본문: 사사기 18:7-13
제목: 목표를 상실하지 말라

  오늘 본문은 단 지파의 목표의식 상실 내지는 변질로 인해 파생된 비극들을 사사기 기자를 통하여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지역 중에 베냐민 지파의 서쪽 지역이었던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 등의 아모리 족속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땅을 정복하여 차지할 것을 명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싸워서는 이길 공산이 없다고 생각한 불신앙 때문에 순종하지 않아 결국은 하나님이 설정하신 그 지역에서 쫓겨나 그들만의 온전한 땅을 얻지 못하고 그 근처의 산악에 거주하는 산적 신세가 되었고 극히 일부만 에브라임의 영토였던 소렉 지역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한심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만의 정착지를 찾아 나서게 된 것을 18장에서 보고하고 있습니다.
  단 지파는 공동체의 지체들 중에 용맹스러운 사람 5명을 뽑아 에브라임의 산간 지방으로 파송하여 정탐을 하도록 위임하고 위임을 받은 5명의 정탐꾼들은 에브라임의 산간지방을 돌아다니다가 미가의 집을 발견하고는 그곳에서 사설 제사장으로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던 레위 출신의 젊은 제사장을 만나 마침 본인들의 신병이 불안하던 차에 그 고용된 제사장에게 앞날에 대한 예언을 강요하여 괜찮을 것이라는 영혼 없는 위로의 메시지에 고무되어 라이스라는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곳의 정황을 살피고 본인들의 신앙공동체가 있는 소라와 에스다올로 돌아가 정탐의 내용을 보고 하기에 이릅니다. ① 우리들이 정탐한 땅은 라이스라는 곳이다. ② 그 땅은 우리들이 차지하기에는 최적의 땅이다. ③ 우리 신앙공동체가 이제 머뭇거리지 말고 그 땅을 치기 위해 올라가자. ④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넘겨주기 위해 준비해 놓은 땅이다. 정탐꾼들은 지체하지 말 것을 종용하였으며 라이스 사람들을 처치하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보고였습니다. 
  라이스 땅의 형편을 본문 7절과 사사기 18:28 전반절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이 두 개의 구절을 종합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라이스는 헬몬 산자락에 있는 요단강 발원지 가운데 한 곳으로 시돈과는 거리가 멀어 시돈과 동맹을 맺고 있지 않아 전쟁이 나도 라이스를 도와줄 지원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 정탐꾼들의 긍정의 보고 이유였습니다. 또 그들은 군사적으로 무방비임과 동시에 무역을 통한 부를 누리고 아주 평화롭게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경우에 부수적으로 얻게 될 플러스알파 요인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은 이 땅이야말로 우리들이 차지하기에 최고로 좋은 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정탐꾼들은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들에게 넘겨줄 것이다.’라고 보고합니다.  결국 이 보고를 받은 단 지파 공동체는 출정을 결심하고 무장한 지체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여 에스다올과 소라 지역을 떠나 유다 지파의 땅이었던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에 진을 치고 있다가 다시 에브라임 산지로 이동하여 미가의 집에 도착을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오늘 말씀의 첫 번째 레마는,
1.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성의 목표를 상실한 자들은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 되는 교회 안의 불신자가 됩니다.

  단 지파 공동체가 하나님이 원하셨던 베냐민 지파의 서쪽 지역을 포기하고 헬몬산 밑에 있는 라이스를 빼앗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그 땅을 정탐하고 온 5명의 보고였습니다. 이들의 보고 내용의 압권이 본문 10절입니다. “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 하는지라”  정탐꾼들은 이미 그 땅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거주할 땅으로 예비해 놓으신 최적의 장소라고 확신했다는 보고입니다. 그러나 정탐꾼들의 이러한 확신은 엄청난 불신앙의 궤적이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단 지파에게 라이스를 주시겠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라이스 점령의 일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단에게 주셨던 비전은 베냐민 지파의 관할지역의 서쪽인 지중해와 맞닿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던 아모리 족속이 무서워 그들과는 싸워보지도 않고 그 땅을 포기한 뒤 거의 무장해제 상태였던 라이스를 침공한 것은 하나님의 방형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순전한 본인들의 생각이요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지파의 정탐꾼들은 라이스가 하나님의 비전이요, 하나님의 방향성이요, 하나님의 원하시는 목표라고 멋대로 해석하여 피를 흘리는 악행을 자행한 것입니다. 단 지파 공동체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보고를 받자 그 길을 가기로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방향성을 상실한 그들은 그렇게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자기의 임의대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안의 불신자 공동체로 전락하였던 것입니다. 이 단 지파 공동체의 랜덤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교훈과 방향성과 가르침을 전달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가르침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성과 목표가 아니라 자기의 입맛대로 임의대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대로 사는 교회 안의 불신자가 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내 맘대로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도 본문 속 5명의 정탐꾼들처럼 ‘하나님이 그 땅을 우리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억지춘향의 불신앙인들이 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이 한 번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주장은 무서운 불신앙입니다.
  누가복음 9:51-56절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사마리아로 입성하시는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서 누가복음 9:54절을 보면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제자들은 불을 명하는 주체를 ‘우리’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주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고 내 생각이 주님의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같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 습관화되면 나의 전적인 오류와 말도 안 되는 죄악 된 생각들이 주님의 생각이라고 심각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의 잘못된 생각을 주님의 생각에 굴복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죗 된 일련의 모든 이기성을 주님의 말씀에 굴복하고 엎드리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나의 만족과 유익된 방향으로 멋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중증의 죄를 짓지 마십시다.
  과학자이자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가 쓴 ‘삶을 위한 신학’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그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당신이 만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들의 생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들의 이성으로 가늠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과 생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성찰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로고스 되셔서 우리들 가운데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함을 잊지 맙시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이사야 55:8-9절). 우리는 하나님이 설정하신 목표에서 빗나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설정하신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설정하신 방향을 벗어나면 타인에게 해를 주는 비성서적 불신자가 됩니다.

  단이 하나님의 목표 설정에서 벗어나자 그들은 라이스를 타겟으로 잡고 그들의 땅을 침범하게 됩니다. 라이스는 평온한 삶을 살던 이웃의 땅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던 이웃 라이스는 하나님의 궤적에서 벗어난 단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사사기 18:27절은 단이 저지른 죄악을 고발합니다. “단 자손이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되” 한가로이 걱정 없이 사는 라이스의 백성들을 칼날로 무너뜨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불살랐습니다. 라이스를 침략한 것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지만 아마도 단은 이 성읍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과 목표를 상실하지 않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방향성을 향하여 달려가는 자들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됩니다. 반대로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도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시하신 방향성에서 이탈하는 자들의 궁극은 이웃에게 해를 미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정말로 예수의 사람이라면 그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지 않는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라이스를 무참히 짓밟은 단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단 지파 공동체처럼 목표를 상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공동체는 자기만의 몰락이 아니라 하나님이 품고 사랑하라 하신 다른 공동체까지 함께 멸망하게 하는 이중의 죄악을 저지르는 셈이 된다는 본문의 해석에 귀를 곧추세워야 할 것입니다.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현대 지성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쟈크 엘륄은 ‘세상속의 그리스도인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현대인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이해할 때, 우리가 그들의 고뇌를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일 때, 그들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지 않으려는 진정한 이유를 이해할 때, 우리가 그들이 당하고 있는 육체와 영적인 고통을 그들의 절망감과 고독 속에서 함께 나눌 때, 우리는 모세나 예레미야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가 되었고 예수께서 방황하는 무리를 목자 없는 양들과 동일시하셨던 것처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가 될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쟈크 엘륄은 그리스도인들의 우선순위는 입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방향성이 우리들의 이웃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삶으로 품고 섬겨야 하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의 삶이 되어야 세상이 복음에 대하여 마음을 연다는 선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더욱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삶아야 하고 하나님이 설정하신 바른 뜻과 궤적과 목표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목표를 잘 달려가고 있는지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성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