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추석 명절에 가족들과 함께 나눌 덕담 되새김질 해보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 다시 일어섭니다. (복음성가) ● 우리들이 싸울 것은 (찬송가 350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로마서 1:16-17 ● 제목 : 잊으면 안 됩니다. 1) 바울이 보낸 로마서를 받아야하는 로마 교회에 침투해 있었던 세속적인 내용들을 아는 대로 나눕시다. ● 로마서 1:18-21 ● 로마서 1:22-23 ● 로마서 1:24-27 |
2) 로마 교회의 형편이 로마를 향한 영적인 보루가 되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선포된 설교를 적용하십시다.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육체적으로 연약한 지체들을 위하여 (송은호 권사, 김순자 권사, 유영남 권사, 이제면 집사, 신태일 성도, 김재만 형제 외) ② 인턴 셀과 양육 4기 하반기 사역을 위하여 ③ 리더 수양회를 위하여(9월 20일-토)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지역셀 예배 드리기 ➁ 수요기도회 참석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4년 9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잊으면 안 됩니다. 본문: 로마서 1:16-17
바울은 주전 1세기에 팔레스타인의 맹주였던 로마라는 대 제국 안에서 형성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로마 교회의 지체들에게 복음으로 재무장하여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도록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의 후반 부분을 보면 당시 로마의 사회적인 수준을 추측할 수 있는 도덕적, 윤리적, 영적 상태를 엿보게 해 주는 단면이 로마서 1:20-23절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나라 개역개정판에서 ‘알되’로 번역된 헬라어 ‘기노테스’는 이성적인 앎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알지만 문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인정하지도 않을뿐더러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고 더 심각하게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든 존재는 썩어질 것들이었습니다. 썩어질 것들은 하나님의 자리를 하나님 대신하여 꿰찼습니다. 이런 일들을 로마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 용인했습니다. 이것은 그 다음의 수순으로 로마 교회 공동체를 강타했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로마 교회의 상태는 영적인 궤멸을 불러일으키는 범죄들이 횡행했다는 점입니다. 로마서 1:26-27절을 보면,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로마 교회 안에 동성애가 창궐하고 비상식적이고 왜곡된 성적인 일탈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인 구조가 있었습니다. 로마라는 나라의 남성 가장들은 여성을 두 가지의 관점에서 이해했습니다. ① 아내들은 애를 낳는 생산의 도구이다 ② 이외의 여성들은 혼외정사의 쾌락의 도구였다는 점입니다. 윤리적인 그리고 사회 문화적인 경향이 이렇다 보니 아내 된 자들이 반발하게 된 결과 탄생된 것이 동성애였습니다. 남편에게서 얻을 수 없는 성적인 만족을 이성이 아닌 동성들에게서 찾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 교회 밖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련의 이런 비정상적인 일탈들을 교회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교회가 용인하는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로마서에서 보고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묵인하거나 아니면 협조하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죄악들을 로마서 13장에서 요약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로마서 13:11-14절). 로마 세속 도시가 교회를 능가하는 죄악의 터널을 지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하는 일에 대하여 교회가 뒷짐을 지고 있거나 아니면 따라가는 것이 습관화되는 위험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로마 교회는 로마 사회를 이끌어야 하는 보루여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전 1세기 로마 교회나 로마는 초록이 동색이었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의 우상숭배, 동성애를 비롯한 음란함, 시기, 질투, 다툼 등등. 교회가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우리들이 배워야 하는 은혜입니다.
● 복음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6절). 바울이 세상과 똑같아져 있는 무능력한 로마 교회의 크리스천들을 향하여 일성으로 외친 것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라’ 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절대 명제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그의 선포는 복음은 내가 생명을 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확신하며 드러내 놓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가 너무나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복음은 바로 그에게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며 선포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성내에 나면서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발을 쓰지 못했던 자가 있었습니다. 다만 그가 복음을 전할 때 믿음이 있음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걸을 것을 선포하자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을 본 루스드라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들이 지금 섬기고 있는 헬라 다신교의 숭배 대상인 헤르메스와 제우스신이 강림했다고 생각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우상으로 섬기려고 할 때 바울과 바나바가 본인들의 옷을 찢으며 만류하면서 외친 소리가 사도행전 14:15절입니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바울과 바나바가 외친 핵심적인 선포 내용은 ‘헛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바울이 확신한 것은 헛된 우상들을 초토화시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헛된 우상이 그 안에 가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헛된 우상들로 가득 찬 로마교회는 당연히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죽은 믿음과 죽은 복음으로 아무런 역사를 나타내지 못하고 도리어 로마라는 세속적인 풍조에 끌려 다니는 비참한 형극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능력을 상실하고 나니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본문 17절에서 바울은 기독교의 핵심 가치를 설명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는 우리들을 믿음에 이르게 한다. 그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반드시 살아난다.” 바울이 전한 이 내용을 역발상으로 해석하면, “복음의 능력을 상실했다. 복음의 능력을 상실했으니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능력을 상실했기에 주님이 인 치신 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의에 도달하지 못하니 믿음이 생길 리 만무이고 믿음이 없으니 다 죽어 있는 송장과 같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 교회의 지체들에게 선포한 본문 해석입니다. AD 1C의 바울의 예리한 선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다가오는 울림은 ‘바울이 목숨을 걸고 전하려고 했던 가장 위대한 가치인 복음의 능력을 갖고 있는가? 그 복음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혹시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닌가? 그 부끄러움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것과 의롭다고 인침을 받은 믿음에서 이탈하여 그럭저럭 명목적 그리스인이라는 배지를 달고 고개 숙이며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제이미 스나이더의 책 ‘리얼’에서 이렇게 날마다 질문할 것을 요구하고 성찰하라고 합니다. “만약에 주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답해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삶으로 믿어 그 능력을 나타내고, 복음의 능력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은 선포된 말씀을 믿을 때 그 복음의 능력이 나의 삶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또한 확신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사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은 바울 시대에만 나타난 과거적 산물이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복음의 능력이 선포되고 확신될 때 그대로 나의 현장에서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일어나며 깨진 가정들이 회복되며 자살까지 생각하는 우울의 현장에 생기가 도는 에스겔이 본 환상의 골짜기가 되며 자녀들이 장래의 비전을 노래하며 나이 든 자들이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이상을 보며 때를 따라 중단이 없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남종들과 여종들에게 부어지는 다시 살아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노래해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에 춤추지 말고, 세상과 더불어 기뻐하지 말아야 우리 모두 다시 영광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삶으로 회복하는 주역들이 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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