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08.31 셀 사역2024-04-22 12:3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가을이 오면 제일 많이 생각나는 추억 이야기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찬송가 242장)
● 하나님의 은혜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18:1-6
● 제목 : 삶에 밑줄을 치십시다.
1) 다섯 명의 단 지파 정탐꾼과 미가 신당 제사장의 종교적인 야합을 고발해 봅니다.
● 단 지파 정탐꾼
● 청년 제사장  

2) 아모스서 5:24절의 시대적인 배경과 사사 말년의 시대의 공통분모는 무엇입니까?
● 아모스 5:24절의 시대적인 배경
● 사사 말년 시대
● 공통분모  

3) 선포된 설교를 적용하십시다.
● 하나님과 관계없는 종교 생활
● 삶에 밑줄을 치는 신앙 생활
● 김기석 목사께서 갈파한 내용 : 말씀이 나의 삶과 존재를 통하여 세상에 말하도록 하자.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육체적으로 연약한 지체들을 위하여
  (송은호 권사, 이제면 집사, 신태일 성도, 김재만 형제 외)
  ② 인턴셀과 양육 4기 하반기 사역을 위하여
  ③ 리더 수양회를 위하여(9월 20일-토)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수요 셀별 기도회 참석하기
  ※셀 리더 필히 참석
  ➁ 9월 월삭예배 드리기(오전 9시)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8월 31일 주일 예배 설교 (사사기 89번째 강해)
본문: 사사기 18:1-6 / 제목: 삶에 밑줄을 치십시다.
무슬림들이 종교적 행패와 같은 극악한 일을 신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것은 종교적 타락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사 시대 말년에 이러한 종교적 타락의 한 면을 보여 주는 기사입니다.
사사기 18장은 17장의 사사 말년 시대의 영적 타락이 한 개인(미가)에게서 집단적인 공동체로 옮겨가게 됩니다. 본문 1절 전반절에서 계속 반복되는 상용구절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입니다. 생략된 구절이 ‘자기들의 옳은 소견대로 행하였다라’입니다. 이 구절은 단지 왕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닌 랜덤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인 구심점의 역할을 하는 리더가 없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기에 이렇게 랜덤화 된 상태에 또 하나의 어처구니없는 기막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사기 기자는 반복되는 상용구절에 이어 1절 하반절을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고 보고합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자기들이 살아야 할 땅을 기업으로 분배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단 지파에 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추적해 볼 때, 여호수아 19:40-48절을 보면 여호수아로부터 할당 받은 지역이  베냐민 지파의 서쪽 지역을 허락받았습니다. 서쪽 지역의 경계는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의 지역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수 19:40-41절). 즉 삼손의 고향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명한 거주 지역을 할당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사 시대 말년까지 거주할 곳을 얻지 못해서 땅을 찾고 있었습니다. 단 지파에게 할당 된 가나안에 살고 있었던 거민은 아모리 족속이었습니다(삿 1:34-36절).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기업으로 준 땅은 잘 차려진 음식과 같은 땅이 아닌 올라가 차지해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다른 지파 공동체는 갈렙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올라가 땅을 차지했지만 단 지파는 이 싸움을 포기함으로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단 지파가 싸움을 포기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차지할 믿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않은 유일한 지파로 어쩔 수 없이 산악 지대에서 일부가 살았고 또 일부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해 있는 소렉 계곡 근처에서 빌붙어 살아야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포기한 단 지파는 자기들의 힘으로 차지할 수 있는 약한 동족의 땅을 호시탐탐 엿보며 그런 곳이 있으면 그들을 물리적으로 쫓아내고 집단적으로 이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단 지파는 용맹스러운 용사 5명을 선발해서 자신들이 영구히 거주할 만한 땅이 있는지를 정탐하라는 명령을 주고 근처 지역으로 파송된 무장한 5명의 단 지파 정탐꾼들은 에브라임 산지 쪽으로 이동 동선을 잡고 정탐을 나갔는데 그들이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미가의 집이었습니다. 5명의 정탐꾼들은 미가에게 고용된 사설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는 종교적 제의를 드리고 있는 청년 제사장을 보고 종교적인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를 압박하며 질문을 합니다. 너의 신분을 밝히라는 질문을 받은 레위 출신의 청년이 무장한 정탐꾼들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초지종을 밝히는 것이 본문 4절입니다. 그 청년의 신분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아낸 정탐꾼들은 가뜩이나 본인들의 출정에 대하여 불안하고 불확실한 안전의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던 바 다시 재차 강압적으로 질문합니다. “우리들이 가는 길이 안전하고 형통할 것인가?” 이 질문을 받은 청년 제사장의 답변이 본문 6절입니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레위 출신 청년 제사장의 답변은 전혀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그의 생각대로 내뱉은 전형적인 종교적 멘트였습니다. 이상이 본문 내용의 요약입니다.
단 지파는 12지파 중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업을 자신들의 안위와 안락을 위해 포기한 지파였습니다. 그들은 차지한 땅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지파의 땅에서 기생할 수밖에 없는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지파, 더 극단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중요시 여기지 않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안의 불신앙 공동체가 단 지파였습니다. 하물며 오늘 본문은 가나안 정복의 시기가 지나고 시간이 300년 이상의 기간이 지난 시대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는데 초기 사사들의 영적인 상태에 비해 후기로 내려가면서 사사들의 영적인 상태가 하강형 나선 곡선을 타면서 점점 더 엉망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 지파의 영적인 상태가 초기에 비해 후기에는 완벽한 랜덤의 상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지파임에 틀림이 없지만 실상은 무신론자보다 더 악한 형편이었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러기에 주어진 땅이 아닌 힘이 없는 지파 공동체의 땅을 호시탐탐 노리다가 그들을 공략해 땅을 강탈하는 죄를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 기막힌 것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그들은 하나님을 빙자한 종교적인 행위를 아무런 가책이나 느낌이 없이 종용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울 정도입니다(본문 5절). 그런데 더 엄청난 일은 청년 제사장의 반응입니다(본문 6절). 사설 청년 제사장이 그들에게 한 말은 “너희들이 가는 길에 하나님이 먼저 앞서 가셔서 그 싸움을 이겨놓으실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 지파는 아무런 죄가 없이 평안히 살고 있는 라이스 백성들을 무력으로 짓밟고 그 땅을 차지합니다. 제사장의 말대로라면 이 정복 전쟁은 하나님이 단을 위해서 이겨주신 싸움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싸움을 하나님의 이름을 빗대어 종교적인 멘트를 하는 청년 제사장을 보면서 그가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이 단순히 종교의 이름으로 망가진 종교적 장사꾼인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
이 말씀을 레마로 적용하여 교훈을 삼읍시다.
● 하나님과 관계없는 종교적 생활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정탐꾼 5명, 그리고 레위 지파 출신의 자격이 없었던 청년 제사장, 그리고 하나님의 기업을 포기한 단 지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종교적인 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교훈입니다. 5명의 단 지파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가는 길 즉 라이스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단 지파 사람들은 무감각했습니다. 5명의 정탐꾼들의 무감각은 총체적인 차원으로 소급해 올라가면 단 지파 전체의 영적 기상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시고 축복하시기 위해 의도하신 길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전제하여 자신들 멋대로 생각해 낸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조연으로 출연시키는 단 지파와 5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종교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또 그런 막 사는 자들을 축복한 거짓 제사장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바로 오늘에도 단 지파가 버젓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5명의 정탐꾼이 요구한 그대로 자신들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랜덤의 삶을 살면서 궁극적으로는 종교적인 행위, 예배, 제물 등등을 표함으로 하나님이 내 편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오늘의 정탐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힘으로, 권력으로, 물리력으로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있는 약한 자들을 짓밟는 종교인들은 여기저기 지천으로 깔려 있습니다. 더불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종교인들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오늘의 종교 장사꾼들도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주전 8세기 중반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의 치리 시대 중에 가장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잘 나아가던 여로보암 2세 때 사역을 했던 남 왕국 유다 출신의 예언자였습니다. 남쪽 드고아에서 뽕나무를 재배하면서 살고 있었던 평범한 사람 아모스를 역사의 현장으로 끄집어 내셔서 그로 하여금 평범한 예언이 아닌 가장 서슬이 시퍼런 노도와 같은 북왕국의 종교적인 타락과 그것으로 인해 자연발생적으로 파생된 일련의 다른 제반 영역의 타락에 대하여 예언적 선포를 하게 하신 것을 보면 얼마나 아모스 시대에 북왕국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극에 달하셨는지를 가늠하게 해 줍니다. 아모스가 말하는 ‘정의’와 ‘공의’는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의 망가짐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아모스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여로보암 2세의 시대는 북왕국의 가장 번성하고 평화롭고 부유한 시절이었던 반면 가장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종교, 정치적으로 타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지배층에 있었던 권력자들은 상아궁에서 상아로 만든 베개를 침상에서 베고 잘 정도로 사치의 극치를 달렸고, 송아지로 음식을 먹고 비파에 맞추어 춤을 추며 헛된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인신매매를 행했고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냈습니다. 빈부의 격차는 심해졌고 부자들은 젊은 여인을 날마다 바꿔치기 할 정도로 성적인 타락이 횡행했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이 목숨을 걸어야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신앙을 버리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쓰레기처럼 여겼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이 극을 달렸고 사회적인 약자들은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그것을 궁극적으로 보호해 주어야 할 재판관들은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여 강자들의 편에서 그들에게 뇌물을 받고 공평하게 재판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사회, 윤리, 도덕적으로 흑암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일련의 일들도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는데 하나님을 정말로 화나게 한 대목은 가증의 제사를 드리는 종교적인 타협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버린 채 적반하장으로 자기들 멋대로 율법을 변질시켜 제사의 처소도 변경하고 그릇되고 가증한 온갖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제사를 드렸습니다(암 5:21-24). “나는 너희 종교 행사들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너희 집회와 성회는 이제는 신물이 난다. 너희들이 벌이고 있는 종교적인 프로젝트들, 너희들이 내거는 허영에 찬 슬로간과 목표에 진절머리가 난다. 너희의 기금 모금 계획, 홍보 활동과 이미지 연출도 지긋지긋하다. 너희의 자아를 만족시키는 시끄러운 음악들은 나는 이제 들을 만큼 들었다. 너희가 나를 향해 노래한 적이 언제더냐?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내가 바라는 것은 정의다. 큰 바다와 같은 정의! 내가 바라는 것은 공평이다. 강 같은 공평! 이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것, 내가 바라는 전부다.”- 유진 피터슨의 예언서 메시지 번역.
청파 교회를 시무하는 김기석 목사는 ‘삶이 메시지다.’에서 “교회 전통은 예수께서는 육체를 입고 오신 말씀이라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 차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의 몸을 필요로 한다. 여러분의 손과 발을, 시간과 정성을 주님께 봉헌하여 말씀이 여러분의 존재와 삶을 통해 세상에 말하도록 하라”
성경에만 밑줄 치며 종교 생활을 하는 자는 이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자는 오직 삶에 밑줄을 치는 신앙인들만이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종교인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고 또 살아서 말씀이 되신 주님을 세상에 나의 삶으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