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11.23 셀 사역2024-04-22 15:2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① 지명 방어 대상자의 영혼 구원을 위한 사역을 금년 연말까지 연장하는 결실을 맺기 나누기
② 12월 성탄 축하의 밤 행사를 위한 준비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찬송가 314장)
● 하나님의 은혜(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시편 54:1-7
● 제목 : 낙헌제(樂獻祭)로
1) 구약의 제사법 중에 화목제로 드리던 제사법 세 가지와 그 의미를 나누어 보자.


  

2) 다윗이 드리겠다고 고백한 낙헌제의 제사 의미는 다윗의 어떤 결단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었는가?
① 본문 설교를 중심으로
②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의 신앙 다니엘 3장과 연결해 보자.  

3) 2014년 추수감사절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세인 공동체를 향한 감사의 내용은 무엇인가?
① 두 가지 부사 즉 ‘때문에’ 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접목하여 설명해 보자.
② 내가 하나님께 드린 최고의 감사를 말해보자.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지명 방어 대상자들의 영적 결실을 위하여
  ② 중보가 필요한 지체들을 위하여
  ③ 대학 진학을 위한 수험생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중보하기
  ➁ 수요기도회 참석하기
  ③ 성탄 축하의 밤을 위해 준비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11월 23일 추수감사주일 설교
본문: 시편 54:1-7
제목: 낙헌제(樂獻祭)로

  나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가 없어도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본문의 저자로 알려진 다윗은 수준 높은 신앙을 견지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다윗이 사울에게 시기를 받아 도피 생활을 하고 있을 때인 사무엘상 22-23장이 배경입니다. 다윗은 장인이었던 사울에게 시기를 당하여 쫓기고 있었고 심지어 이스라엘 경내에서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 모압 미스베로 넘어가 그의 부모들을 모압 왕에게 부탁하는 처지까지 되었습니다. 일단은 부모님의 안전을 부탁한 다윗은 자신의 지파 공동체가 살고 있는 땅인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와 그일라 지역에 숨어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이 자기들의 땅에 피신하고 있다고 사울에게 고발하는 바람에 그는 어쩔 수 없이 황무지로 유명한 십 광야라는 곳으로 도피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나름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십 사람들도 역시 사울에게 다윗의 신변을 고발하는 탓에 다시 조밀 조밀한 유다의 여러 곳을 거쳐 엔게디로 도망쳐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바로 이 때 사울이 3,000명이 되는 군사들을 이끌고 다윗을 추적하러 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다윗이 지은 시가 바로 오늘 본문인 시편 54편입니다. 목숨이 촌각에 달려 있는 이 위기의 순간에 불렀던 다윗의 노래에서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시를 지었을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1-3절)
  다윗이 하나님께 긴박하게 SOS를 요청한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피할 곳을 찾지 못할 위기의 절정에 있었습니다. 그가 십 황무지에 있었을 때 같은 지파 사람들을 믿었기에 그들의 배신은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23:19, 24:1, 26:1절을 보면 그는 세 번에 걸쳐서 고향 사람들에 의해 밀고를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위기를 당하게 된 것을 보고합니다.
  다윗은 당시 그를 따르는 자들이 600여 명이었습니다. 반면 사울의 군대는 정예로 훈련 된 3,000여명의 군사들이 포진하고 있기에 이 싸움은 해보나 마나 한 싸움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숨을 곳도 없는 위기의 상태에서 본문 1-3절의 기도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기도입니다. 이어지는 4-5절에서 그 강도가 심해집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다윗은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로 인한 다윗의 마지막 소원은 그들의 멸망이었습니다. 이렇게 5절까지의 기도는 평범한 인간의 간구입니다. 억울함을 당한 자로서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서 풀어주시기를 바라는 지극히 평범한 범인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시편 54편 6절의 고백은 다릅니다.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다윗이 드리겠다고 고백한 낙헌제는 한자로 풀이하면 즐거워 할 낙(樂)과 바칠 헌(獻)자가 합쳐진 단어로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이 제사는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5가지의 제사 중에 화목제에 해당하는 제사법입니다. 화목제는 크게 세 가지의 제사로 나누어집니다. ① 감사제(예기치 않은 축복이나 이미 받은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여 드리는 제사), ② 서원제(서약이나 맹세의 성취와 이행을 위하여 혹은 바라는 구원과 은총에 대하여 드리는 제사), ③ 낙헌제(특별한 축복이나 은총을 기대하지 않고 특별 탄원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감사제도, 서원제도 아닌 낙헌제로 주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분명히 절박한 심정으로 적들을 멸하여 달라, 나의 기도를 들어 달라,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탄원했지만 이것만을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어지는 기도에서 낙헌제를 드리겠다는 고백은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새겨야 할 내용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의 신앙적 고백을 담보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는 엄청난 신앙입니다.

  낙헌은 바라는 서원의 제사가 아니고, 감사의 내용이 있는 제사도 아닙니다. 낙헌은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다윗은 지금 위기의 절정에서 이 위기를 돌파해야 하는데 방법은 본문 4절의 고백처럼 도우시는 하나님만이,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고백하면서 그 믿음의 고백 위에 그러나 만에 하나, 하나님께서 나의 위기를 극복시켜주지 않더라도, 그리하여 내 생명이 끝이 나도 나는 그것까지도 감수하고 낙헌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선포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 선언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이해의 폭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전제를 ‘때문에’의 감사로 제한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신앙의 초보 때는 ‘때문에’의 감사가 당연하지만 신앙의 연륜이 깊어감에도 계속하여 ‘때문에’의 감사에 국한한다면 젖을 먹는 자로 머물러 있는 아이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서 5:13-14절에서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만에 하나 ‘ 때문에’의 감사에 머물고 있다면 그는 분명 젖을 먹는 자의 수준에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자의 수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를 드리는 자입니다.
  현대인들은 정황을 보고 그 정황에서 조금이라도 나의 산술적 계산법에서 어긋나면 선을 긋습니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본인의 입장이 아주 이성적인 태도라고 물러서지 않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우리들은 풀무불에 던져져도 하나님이 능히 우리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신앙의 설교가 선포되면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황당함을 말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비신자들이 말하는 기도는 심리적인 위안 혹은 자기 최면일 뿐, 기도 자체가 능력이라는 말은 종교인들이 만들어낸 긍정적 신념이거나 종교 자체의 신비적인 능력이 아니라는 주장을 보고 인간의 영역이라는 것이 과학적인 스펙트럼의 조명하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의 삶은 과학의 건방짐으로 해석될 수 없는 숱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의 이성적 영역으로 인간의 전인격을 커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음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무한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 말고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그 답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이성만 없었다면 인간은 재미와 쾌락을 즐기며 잘 살 수 있었을 텐 데 하나님이 천상의 빛인 이성을 인간에게 주어 그것을 가슴에 지니고 살게 되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인간들은 이성이라고 부르는 도구를 사용하여 짐승들보다 훨씬 더 짐승답게 사는 데 사용하고 있다.”- 메피스토펠세스의 독백 
  인간이 짐승보다도 못하게 이성을 사용하는 죗성 때문에 나는 나를 결코 믿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기 전에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입니다.”
  이상한 현상이 오늘날 자연스럽게 벌어집니다. 나에 대하여 무한 신뢰를 보내라는 메시지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열광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 혜민, 최진석 교수. 그런데 메피스토펠세스의 독백을 말하면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그 이성으로 거부하려 합니다. 과학의 영역은 인간의 전 인격적인 영역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과학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있는 피조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성적, 과학적 데이터를 토대로 한 ‘때문에’의 감사는 신앙적 감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학적, 이성적 신앙의 테두리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자들이 돌멩이를 들고 난사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다윗의 낙헌 제사를 드리는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의 감사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를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일어난 대 지진으로 도시가 재기 불능의 폐허 상태였지만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은 집은 잃었지만 가정을 잃지는 않았다.”는 해석으로 본인들에게 닥친 재앙을 ‘때문에’로 보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향한 우리들이 드리는 최고의 감사는 낙헌 제사입니다. 최고의 감사인 낙헌의 제사를 드리는 세인지체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