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11.16 셀 사역2024-04-22 15:21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지명 방어 사역의 결산을 통하여 향후 2015년 전반기 열린 모임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찬송가 560장)
● 예수 따라가며 (찬송가 449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미가 2:12-13
● 제목 : 저의(底意)와 선의(善意)
1) 미가 시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계획하셨던 약속을 두 가지로 말해 보자.
● 12절 전반절 참고
● 12절 후반절 참고  

2) 12절 하반절에 기록된 ‘보스라의 양 떼같이’ 라는 언급에서 느낄 수 있는 영적 감동은 무엇인가?
● 시편 23편의 다윗의 예
● 로마서 1장의 바울의 예
● 결론  

3) 13절에서 발견된 결론적인 하나님의 선의는 무엇이었는가?
● 선의는?
● 그 선의를 이루어 가시는 주체는?
● 선의의 대상과 그 뜻을 알고 난 나의 선택은?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지명 방어 대상자들의 영적 결실을 위하여
  ② 중보가 필요한 지체들을 위하여
  ③ 대학 진학을 위한 수험생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중보하기
  ➁ 수요기도회 참석하기
  ③ 추계 셀 대심방 기도로 준비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11월 16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미가서 6번째 강해)
본문: 미가 2:12-13
제목: 저의(底意)와 선의(善意)

  한자로 말할 때 저의(底意)라는 단어는 ‘숨어 있는 뜻’이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본래의 목적을 감추고 한 번 그 속내를 알기 위해 건드려보는 수준의 맛보기 용도로 저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반대로 선의(善意)는 말 그대로 긍정의 의미입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결과까지 아름답고 선한 목적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거하던 기득권주의자들의 저의는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약한 자들의 것을 강탈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조금의 가책이나 죄의식도 없이 오로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힘없는 자들의 것을 빼앗으려는 것이 그들의 저의였습니다. 이것을 아주 괘씸하게 생각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으로 빼앗는 자들을 멸망시킬 계획을 하셨습니다(미가 2:3절)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이 재앙에 해당되는 자는 벗어날 방법이 없는 완벽한 재앙임을 계속해서 5절에서 천명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재앙이 임할 때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들은 피할 길이 없음으로 가장 좋은 방법이 이 땅을 떠나는 것임을 시사해 주심으로 멸망으로 인한 고향 땅에서의 유리됨은 도리어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명해 주셨습니다.
  멸망의 분위기로 침울하던 분위기가 급반전하여 예루살렘 백성들의 사악한 저의에 맞서신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당신의 선의를 본문 12절에서 선언하십니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11절과는 달리 12절에서 반전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신탁의 대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11절은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과 관변 예언자들이 신탁의 대상이었다면 12-13절은 미가의 제자들에게만 전해진 신탁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야곱’이라는 호칭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고전적인 호칭으로 항상 ‘택한 백성’을 의미할 때 사용하시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는 것과 같은 호칭입니다. 그렇게 호칭하신 하나님이 야곱과 같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두 가지의 선하신 목적을 보이십니다.

1. 남은 자들을 모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12절 전반절)
구약성경의 아모스, 미가, 이사야 예언자들의 대표적인 신학은 남은 자 사상입니다. 남은 자(쉐에리트) 사상은 전쟁과 심판 사상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침략자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들의 영향은 마치 사자가 가축 떼를 공격한 후의 영향과 비슷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 데 약 10%만 남는다는 것입니다.(아모스 5:3절)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이런 예언자 아모스의 사상을 토대로 이사야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알야숩’ 즉 ‘남은 자만이 돌아오리라’ 고 지음으로서 그의 특유의 남은 자 사상을 선포합니다. 바벨론 포로 학살 시기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만이 살아남을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미가 예언자는 또 다른 측면으로 남은 자는 환난을 당한 자, 가난한 자, 그리고 저는 자로 정의합니다.(미가 4:6-7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발을 저는 자는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들이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 하셨나니”  이렇듯 예언자들의 남은 자 정의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인 분모가 용서함을 받고 정결함을 받은 무리들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이런 남은 자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보호하실 것을 그리고 회복시키실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보는 남은 자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한국교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얘기되고 있으나 하님께서는 절대로 당신의 교회를 포기하시지 않으시기에 한국교회를 향하신 다시 돌아오심은 장소적 성전 처소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울 비장소적 교회인 남은 자들입니다.
  세인교회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건강하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비가시적 교회의 남은 자들이 되십니다. 내가 바로 남은 자임을 믿고 거기에 걸 맞는 신앙적 삶을 살아가십시다.
 
2. 그들을 당신의 것으로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한 가지 더 분명한 선의는 12절 하반절입니다.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그렇게 선별된 남은 자들을 한 처소로 모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아지면 보스라의 양떼처럼 그리고 초장의 양떼처럼 보호하실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게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보스라’라는 히브리어는 이스라엘의 한 성읍의 지명 이름입니다. ‘보쯔라’는 ‘벽으로 둘러막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남은 자들을 안전한 테두리 안에 거하게 함으로서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선의 표명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사야 43장 1-4절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참 소중한 하나님의 걸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이기에 이런 약속을 서슴지 않고 행하신 것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이사야 43:2-3절 전반절)
  하나님이 막으시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1-2) 다윗의 이 고백에서 느끼는 최고의 감동은 나는 하나님의 양이라는 소속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목자가 있는 양은 안전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의 지체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확신을 심어줍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로마서 1:6절) 바울이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로마서 1: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본인 스스로가 예수님의 종이라는 분명한 소속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로마에 있는 같은 동역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것’ 이라고 확신을 전한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테두리 안에서 분명히 나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들은 이런 정체성을 갖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한 본문 마지막 13절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길을 여시는 하나님, 왕 되신 하나님, 바로 여호와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선두로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의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나보다 앞서 선두로 가시는 것 말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따르십시다. 선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랭던 킬키 박사는 산둥 수용소의 끝부분에서 이런 독백을 합니다. “죄란 유한한 대상에게 궁극적인 종교적 헌신을 하는 것이다. 즉 죄란 자아의 실존, 또는 자아가 속한 집단에 최우선적으로 관심과 헌신을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 즉 선의는 내가 보호하고 앞설 테니 나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결코 넘어질 네 자아를 의지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택은 한 가지입니다. 주님의 선의에 따라 주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자의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