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11.02 셀 사역2024-04-22 12:37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지명 방어 5주차 사역을 위한 성실한 나눔  

 
경배와 찬양 (WORSHOP)

● 시선 (복음성가)
●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찬송가 383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19:16-26
● 제목 : 너희 눈에 좋은 대로
1) 기브아에 살고 있던 노인에 의해 환대를 받던 레위 사람이 당한 치욕의 동선을 나누어 보자.
● 16-21절 :
● 22-23절 :
● 24-26절 :  

2) 기브아 깡패들의 랜덤의 내용과 더불어 노인의 제안 그리고 레위 사람의 비굴함을 추적해 보자.
● 노인의 랜덤 이유:
● 레위 사람의 비굴함:
● 기브아 사람들의 랜덤:  

3) 이번 주간 담임목사 메시지의 영적이며 핵심적인 교훈을 주제를 참고하여 말하고 반면교사를 결단해 보자.
● 주간 메시지는?
● 반면교사의 내용은?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지명 방어 5주차 사역을 위하여
  ② 중보가 필요한 지체들을 위하여
  ③ 대학 진학을 위한 수험생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중보하기
  ➁ 지명 방어 대상자를 위해 중보하기
  ③ 수요기도회 참석하기
  ④ 추계 셀 대심방 기도로 준비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11월 2일 주일 예배 설교 (사사기 98번 째 강해)
본문: 사사기 19:16-26
제목: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시선이 고정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시선이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비극과 재앙이 시작됩니다.
레위 사람은 자기의 동족이 살고 있었던 기브아에 도착을 했지만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졸지에 거리의 노숙자 신세가 되어 하룻밤을 보내게 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다행히도 그 성읍에 사는 노인을 만나 통성명을 나눈 후 노인이 자신과 동향인 그 레위 사람의 청을 수락하여 최선을 다해 섬기게 됩니다(본문 20절).
그런데 본문 22절에서 시간이 많이 늦은 저녁 시간으로 추측되는 바로 그 시간에 기브아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을 찾아와 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다짜고짜로 지금 집에 들인 그 사람과 관계를 해야겠다고 우리에게로 끌어내라고 합니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이 구절이 원문에 의하면 ‘멸망의 자식들’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 깡패들이 노인에게 레위 사람 남자를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관계하리라’고 번역된 이 말은 ‘동성 강간’(homosexual rape)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이 장면은 마치 창세기 19:5절에 기록된 소돔의 죄악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습니다.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당시 기브아에 들어온 외지인을 대상으로 만연해 있었던 범죄 행위가 동성 강간이었습니다. 동성 강간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파괴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였습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였던 베냐민 지파가 이 지경이 된 까닭은 사사기 17장 이후부터 더욱 두드러지게 확인하게 되는 영적 랜덤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더 기막힌 영적 랜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급습을 당한 노인은 깡패들의 협박에 당황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자신의 결혼하지 않은 딸과 레위 사람의 첩을 내어주겠다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이들을 내어 줄 테니 너희들이 보기에 좋은 대로 맘대로 하고 이 사람은 건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본문 24절).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그런데 노인이 제시한 대안을 기브아 깡패들이 거절 하자 이제는 레위 사람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 줍니다.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본문 25절)
결국 레위 사람은 자신이 살고자 자기 아내를 ‘문밖으로 떠밀어’ 내어 주고 자신은 머리털하나 상하지 않았지만 그의 아내는 밤새도록 깡패들에게 윤간을 당한 끝에 사망하게 됩니다(25절 하반절-26절).
사사 시대 초기와 더불어 후기에도 철저히 랜덤의 시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영적 랜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치사한 비류들을 반면교사 삼아 실패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 하나님의 시각으로 살겠다는 결단이 그리스도인의 첫 걸음임을 잊지 마십시다.

본문 24절은 재앙과 절망과 비극을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이것이 바로 비극의 원인입니다.
예레미야 17:9절과 마가복음 7:21-23절이 우리들의 마음의 상태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21-23)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살면 안 됩니다.
젊음 때문에 아직은 내 방식과 내 이성과 내 감정이 더 소중하여 그것을 사수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인으로 진정한 한 발자국도 띠지 못한 사람입니다.
또한 늙음 때문에 그리고 예수 믿은 연수 때문에 그 동안 내가 걸어왔던 식을 이제 와서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자존심 문제야 라고 평가절하 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까지 헛 달려온 사람입니다.
궤도를 바꾸십시오.
내 시각은, 내 눈이 보기 좋은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 것을 명심하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리고 날마다 나에게 조명하시는 살아계신 레마의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의 시각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시각으로 터닝 하십시오. 내 시각은 실패의 원인입니다.
필립 얀시가 소개한 체스터턴(19세기 영국 기독교계의 스승이자 멘토)의 일화에서 그가 영국 사회를 바라보며 “바로 내가 문제입니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문제의 핵심이 나라는 것을 직시할 때 이것이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문제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내 시각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재강조하여 내 시각을 포기하는 것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는 미국에서의 보장된 교수직과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지옥 같은 죽음의 장소인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삶의 전 생애 동안 한 번도 바꾸지 않았던 목사로서의 신학이 내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대로 행동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신학적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도 죽음이라는 극도의 두려움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아버지께 ‘이 죽음의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실 수 있다면 옮겨달라고’ 청원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클라이맥스는 주님의 시각이 아버지의 시각으로 바꾸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42절)
나의 눈을 들어 주님을 보기 시작할 때부터 주님은 나를 위해 일하십니다. 나의 작은 마음을 돌이켜 주님을 보기 시작할 때 그래서 나의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릴 때 나를 위한 주님의 일하심은 시작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고 계심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뜨십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