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 10. 26 셀 사역2024-04-22 12:37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지명 방어 4주차 사역에 대하여 성실한 사역을 위한 나눔  

 
경배와 찬양 (WORSHOP)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가 585장)
●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찬송가 582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19:11-15
● 제목 : 성역(聖役)이 무시당할 때
1) 기브아 사람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무엇인가?
● 족보와 관련하여 말해 보자. (창세기 35장을 참고)
●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 영적인 시사점 : 설교를 기억해 보자.  

2) 레위 사람이 기브아에서 냉대와 무시를 당한 이유는?
● 외적인 이유 : 설교 참고
● 내적인 이유 : 설교 참고
● 영적인 시사점 : 설교 제목 참고  

3) 성역이 무시를 당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계획과 교훈은 무엇인가?
● 갈멜산 사건과 미가야 사건 (열왕기상 18-19장, 역대하 18장 참고)
● 새겨야 할 교훈은? 
● ①                               
● ②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지명 방어 4주차 사역을 위하여
  ② 중보가 필요한 지체들을 위하여
  ③ 대학 진학을 위한 수험생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중보하기
  ➁ 지명 방어 대상자를 위해 중보하기
  ③ 수요기도회 참석하기
  ④ 추계 셀 대심방 기도로 준비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10월 26일 주일 예배 설교 (사사기 96번 째 강해)
본문: 사사기 19:11-15
제목: 성역(聖役)이 무시당할 때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이란 시에서 시인은 목사라는 성직의 표상을 요즈음의 일탈된 목사의 표상으로 보지 않고 정말로 아름다운 목사로 인정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시대에 하나님이 주목하고 찾으시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 봅시다.
  처갓집에서 5일을 머문 레위 사람이 장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와 여부스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여부스는 베들레헴에서 약 10㎞정도 떨어진 곳으로 종이 주인이었던 레위 사람에게 해가 저물고 있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자고 제안을 했으나 레위 사람이 기브아로 가자고 명령을 하여 여부스에서 10㎞ 정도 떨어진 기브아에 도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레위 사람이 여부스가 아닌 기브아로 갈 것을 고집한 이유는 당시에 여부스는 이방인이 살고 있었던 땅이었고 기브아는 베냐민 지파의 동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기에 마땅히 신앙공동체의 동족들이 살고 있었던 땅인 여부스로 가야만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통상적으로 레위 사람들은 지파 공동체들을 통하여 선대 받는 제사장 지파로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레위 사람들과 객들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부류였기에 율법에 대하여 민감했던 레위 사람은 이것을 염두 해 두고 기브아 행을 고집한 것입니다. 이런 얄팍한 계산으로 늦은 저녁 시간에 기브아에 도착을 했건만, 마땅히 동족들이 나와서 이구동성으로 본인을 영접해 줄 것으로 믿었던 레위 사람은 아무도 그를 영접하지 않아 모두가 볼 수 있는 성읍의 한 복판의 넓은 거리에 앉아 있게 되는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본문 15절). 레위 사람은 이대로라면 거리에서 노숙을 해야 하는 기막힌 신세가 될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레위 사람이 이런 지경에까지 몰리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율법이 무시되는 랜덤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2:21절과 레위기 19:33-34절, 신명기 16:14절과 같이 율법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필수적인 의무 사항이었습니다. 본문의 레위 사람은 보호하고 존중해 주어야 할 제사장 지파의 동족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함께 선을 베풀어 주어야 할 나그네요 거류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호받아야 할 이중적인 자격을 갖춘 레위 사람이 기브아 사람들에게 철저히 냉대와 문전박대를 받는 수모를 당한 이유는 율법이 무시되던 랜덤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본문 주석을 통하여 나누어야 하는 두 가지의 교훈은 1. 성역이 무시당하게 될 때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고르십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제사장 지파의 레위 사람이 무시를 당한 것은 레위 사람들이 율법을 무시하며 율법대로 먼저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레위 사람은 성결하지 못했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영적 리더십을 발휘할 만한 영성이 없었습니다. 그가 여러 명의 여자를 두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영성의 뒷받침이 없었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그의 인생의 좌표가 되지 않았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사기 20장을 보면 아내가 자신의 눈앞에서 성폭행을 당했는데 버젓이 잠을 잤던 사람이었고 아내가 눈앞에서 당한 윤간으로 인하여 결국은 만신창이가 되어 죽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아내의 시체를 12토막을 내어 12지파 동족에게 보내는 끔찍한 일을 행함으로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극악무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정도 수준의 사람이 바로 레위 사람이었습니다. 사정이 이 지경인데 이 사람이 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고사하고 그렇게 살았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레위 사람이 살고 있었던 사사 초기 시대는 성역이 무시되는 시대가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학자 클린턴 멕켄이 그의 주석서에서 본문을 이렇게 해석한 것은 기막힌 통찰입니다.
“만약에 기브아가 당시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면 레위인들은 나그네의 관대함이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비참하게 실패한 그 아이러니의 장본인이 되었다.”
  이사야 신학의 중요한 핵심이 바로 남은 자 신학입니다. 교회가 무너지고 목사가 무너지고 크리스천들이 무너지는 것에 대하여 절망하지 맙시다. 이 무너짐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무너진 교회를 남은 자 교회가 다시 세울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무너진 성읍을 남은 자 목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다시 수축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역이 무시되고 문전박대를 받는 이 시대에 하나님은 반드시 다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 사역자들을 예비해 놓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남은 자들을 통해 당신의 나라와 뜻을 완성시키실 것이라는 소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갈멜산에 엘리야가 있었고, 이스라엘 가운데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의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멜산에 올라와 엘리야의 죽기를 각오한 싸움을 구경하며 이기는 팀이 내 팀이고 내가 거기에 빌붙겠다고 눈치를 보던 비겁한 기회주의자도 있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엘리야도 한국교회의 남은 자 교회에 존재할 것이며 그 교회에 7,000명의 남은 자가 있을 것을 믿습니다.
  역대하 18장의 기사 가운데 여호사밧과 아합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아람과의 일대 전투를 앞두고 최대 격전지였던 길르앗 라못으로 출정하기 전 여호사밧이 이 전투의 향방에 대하여 선지자들에게 자문을 구할 때 여호사밧의 청을 들은 아합은 사마리아에서 활동을 하던 길 예언자 400명을 초정하여 그들의 예언을 듣습니다. 아람과의 전투는 승리의 전투이니 걱정하지 말고 출정하라는 예언을 듣지만 그들이 미덥지 않던 여호사밧이 재차 다른 예언자를 찾자 아합이 할 수 없이 불러낸 미가야의 초청기사가 역대하 18:7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는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기로...”
  이 하나님 말씀의 압권이 ‘아직도’입니다. 400명의 거짓 선지자이자 길 예언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독하지만 할 말을 선포하던 흉 예언자 미가야가 아직도 건재하였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때때마다 미가야를 세워 놓으셨습니다. 아직도 미가야는 분명히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역이 짓밟히고 또 그 성역을 무시하는 자들이 산재해 있는 바로 이 때 분명히 이 땅의 교회를 위하여 미가야를 남겨두셨을 것을 믿기에 그 남은 자들인 영적인 미가야들이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두 번째의 도전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편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되는 줄에 서는 자들은 2. 성역을 무시하는 자의 반열에 서는 미련한 자들입니다.
  본문에서 기브아 사람들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로 영적 자존감이 있었던 지파였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의 12번째 아들로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라헬은 죽어가며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이라고 지어주었지만 아버지 야곱은 길러줄 어미는 없지만 이 아들만큼은 하나님께서 그의 앞날을 책임져 주실 것으로 믿고 그 이름을 개명해(창 35:18) ‘베냐민-오른 손의 아들’으로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뜻대로 하나님의 오른 손에 붙들려 살아야 하는 것이 아들이 가야할 인생의 길이었고 그의 후손들이 가야할 길이건만 불행히도 베냐민의 후손들은 야곱의 뜻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랜덤으로 살았습니다. 결과, 사사 초기 시대에 기브아에 살던 베냐민지파는 멸문지화의 문 앞까지 가는 참람한 비극을 맞게 됩니다(삿 20장).
  기브아를 장악한 베냐민 지파 땅으로 레위 사람이 들어왔을 때 객이자 거류민이자 제사장 지파의 사람이었던 레위 사람을 선대했어야 마땅하나 그들은 레위 사람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브아에 살고 있었던 베냐민 지파 사람 모두가 이 레위 사람에게 냉랭했습니다. 그들은 냉랭함으로 방관했던 정도가 아니라 레위 사람을 능욕하는 집단적 폭력의 죄까지 짓습니다. 결국 그들은 레위 사람의 첩을 윤간하여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기에 이릅니다. 이들은 레위 사람에 대한 방관자의 수준이 아니라 레위 사람을 짓밟은 반 레위 공동체의 형극을 형성한 꼴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하여 베냐민 지파는 지파 공동체의 남자의 씨가 마르고 그 지파의 여성들에게는 절대로 혼인하지 말자는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거국적인 단결로 인하여 거의 지파 공동체가 무너질 뻔한 비극의 지파로 전락하게 됩니다.
  성역을 선대하지는 못할망정 반대자의 편에 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목회자의 성역을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그 선에 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성역을 무시하는 자의 반열에 서는 자는 그것 때문에 본인의 영적인 삶이 피폐해지기 때문입니다. 성역을 무시하는 쓸데없는 것에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성역을 무시하는 삶에 천착하여 본인의 역동적인 신앙 승리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복음에 관심이 없는 자들은 복음 비슷한 것으로 포장하기 일쑤이고 복음에 관심이 없기에 복음에 목숨을 거는 자들을 공격하고 복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그 무엇으로도 혹은 교회 안의 조직을 통해서조차도 영적으로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들은 이 땅에서의 그 무언가가 아닌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이외의 그 어떤 것들로 채워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복음의 반대편에 서는 자는 그래서 망가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복음답게 선포하는 사역의 반대편에 서면 그 사람은 무너집니다(고린도전서 1:18절).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여 성역이 무시되고 있는 이 비극의 시대에 성역을 무시하는 편에 서는 미련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남은 자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