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09.28 셀 사역2024-04-22 12:36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이번 가을에 꼭 가보고 싶은 곳 소개하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하나님이시여 (복음성가)
●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찬송가 585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18:21-29
● 제목 : 무력(武力)의 무력화(無力化)
1) 단 지파 공동체가 미가와 라이스에게 공통적으로 행한 것은?
● 본문 성경을 참고하여 말해 보자.
● 1) 본문 25절 참고
● 2) 본문 27절 참고  

2) 단 지파 공동체가 무력을 사용함으로서 얻게 된 보이는 결과와 보이지 않는 결과를 말해 봅시다.
● 보이는 결과
● 보이지 않는 결과  

3)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행하지 말아야 할 무력들을 점검해 보자.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육체적으로 연약한 지체들을 위하여
(송은호, 서태원, 윤춘자, 김순자, 유영남, 이제면, 신태일, 김재만, 권혁순 외)
  ② 가을 열린모임 사역을 위하여
  ③ 재생산 사역자로 세워질 두날개 양육2기 사역자들을 위하여(김경옥, 고수자, 송은호, 심재희, 정은영, 전갑규, 최정희, 권영옥, 김정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중보하기
  ➁ 수요기도회 참석하기
  ③ 정기 선교주일 예배 기도로 준비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9월 28일 주일 예배 설교 (사사기 92번째 강해)
본문: 사사기 18:21-29
제목: 무력(武力)의 무력화(無力化)

  영적으로 무너진 랜덤의 시대는 정의롭게 사는 것이 힘이 아니라 힘이 정의라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오늘 본문은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잘 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가장 큰 비극을 경험한 단 지파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단 지파 공동체는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서 우상 제사에 쓰이는 기구들을 전쟁을 위해서 도둑질하는 죄악을 자행했고, 레위 출신의 젊은 제사장을 협박 반 회유 반으로 포섭하여 자기들의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이 탈취할 땅 라이스를 향하여 진군합니다.
  자기 집의 물건들이 탈취를 당할 때 부재중이었던 미가는 뒤늦게 집에 도착하여 이 사실을 알고 자기의 사설 호위병들을 모집하여 단 지파 공동체를 추적합니다. 본문에는 무장한 단 지파 공동체가 600명으로 기록이 되어 있지만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지파 공동체 전체가 이주할 땅으로 옮기는 상황이었기에 그 숫자는 당연히 많았을 것이고 특히 기동성에 있어서 취약한 아이들이 무리 중에 있었기에 무장한 군사들 중에 일부는 후면 쪽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며 행진하였을 것이기에 당연히 그들의 진군은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미가의 추적대가 단 지파 공동체를 따라 잡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가의 일행이 단 지파 공동체의 이동 동선까지 따라 붙어 그들이 불의하게 도둑질을 한 일련의 일들을 거세게 항의합니다.(24절) 그러자 단 지파 공동체가 미가에게 보인 반응이 본문 25절입니다. “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이 말은 네 생명과 네 가족들의 목숨이 아까우면 입 닥치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단 지파 공동체는 적반하장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미가는 단 지파의 협박을 받고 힘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단 지파의 협박에 굴복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수모를 경험합니다(26절). 미가가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지파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단 지파는 미가에 비해 월등한 물리력을 갖고 있어서 자기들의 범죄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힘의 마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27-29절은 드디어 단 지파 공동체가 라이스를 손에 넣는 장면입니다. 단은 라이스를 공략하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아주 손쉽게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단은 라이스를 힘으로 밀어 부쳐 아무런 죄가 없는 라이스 사람들을 도륙한 것입니다(27-28절). “단 자손이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되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거리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단 자손이 성읍을 세우고 거기 거주하면서”
  걱정이 없이 사는 라이스를 침략한 단 지파는 그들을 도륙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들이 이런 죄악을 자행한 것은 하나님이 없는 백성들이 갖고 있는 힘을 자원으로 하여 선량한 백성들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결국 힘을 갖고 있었던 단은 그 땅을 그렇게 피로 물들이고 자기들의 땅으로 선포합니다. 그들은 라이스라는 이름을 지워버리고 그곳의 이름을 단이라고 개명합니다.
  단 지파의 라이스 점령 이후에 발견되는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라이스에 정착하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의 내증을 파헤치면 단이라는 이스라엘 지파 공동체는 통일 이스라엘 초기 왕정시대와 분열 왕국 시대를 지나가면서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한 뒤에 즉 포로기 시대 이후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지파 공동체의 역사 선상에서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이토록 라이스라는 좋은 땅에서 잘 나가던 단 지파가 역사의 정중앙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아이러니입니다.
  단 지파는 이스라엘 역사의 테두리 안에서 자취를 감춘 것과 그들이 라이스를 점령한 뒤에 그곳에 자기들이 빼앗은 우상의 도구들을 모시는 우상의 단(壇)을 만들어놓고 그곳을 우상 숭배의 근거지로 삼아 놓았다는 점입니다. 라이스 즉 단 지파가 빼앗은 그 땅은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는 땅으로 그 땅은 훗날 분열왕국시대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북왕국 이스라엘의 통치 지역이 되었습니다. 단 지파 공동체가 라이스를 빼앗은 뒤에 그 지역에 제단을 만들어놓았는데 그 단은 훗날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의 진원지가 된 것입니다.
  신명기 역사가는 열왕기상 12:28-30절에서 북 왕국의 범죄 사실을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단 지파의 악행으로 인해 이어진 범죄의 끈은 역사의 대를 통해 이어집니다. 단 지파 공동체가 빼앗아 차지한 그 땅 (라이스)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2대 근원지 즉 벧엘과 단이라는 오명을 안게 됩니다.
단의 또 하나의 치명적인 비극은 요한계시록 7장에 있는 144,000명의 기사에 담겨 있습니다. 144,000명의 부류는 구원받은 자의 수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환란의 시기에 구원을 받은 백성들의 상징적인 표시인 이스라엘 12지파에 대한 목록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본문에 기대어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7:3-8절을 보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마지막 때에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은 지파 공동체 가운데 단 지파 공동체가 여기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축복된 시간에 그 축복의 대상에서 단 지파는 빠져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요한계시록 기자가 실수로 단 지파를 누락시킨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요한계시록 저자는 단 지파를 의도적으로 빼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보인 명령 속에서 단 지파를 주님이 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해석을 통해서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 하나를 레마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 인간의 무력(武力)은 하나님이 무력화(無力化)시키신다는 교훈입니다.

  주님은 아주 철저한 비폭력을 사용하셨던 분입니다. 요한복음 18장의 기사에서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종교지도자들의 수하들에게 체포를 당하실 때 가롯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과 말고를 비롯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수하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 베드로는 그의 칼로 말고의 귀를 자르는 정당방위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떨어진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시면서 하셨던 주님의 일성을 요한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18:11). 이 구절을 마태는 조금 더 세밀하게 묘사하였는데 마태복음 26:52-53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우리가 힘을 의지하는 것은 그 힘이 눈에 보이는 요구를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힘을 가지고 있으면 그 힘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힘은 오늘 당장 나를 만족시켜 주지만 그 힘의 마력에 빠져 들어갈 때 그 힘이 얼마나 마약 같은 존재인지에 대하여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힘의 칼을 칼집에 다시 꽂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사도행전 13: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이 무너졌던 때가 그가 모든 것을 다 가졌을 때였습니다. 전쟁에 나가면 백전백승하던 그 때 그가 거느리고 있었던 수하들은 1:100을 상대할 정도의 강력한 충성심을 갖고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의 등 뒤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랬던 그가 무너진 것은 그 힘의 원천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있다고 믿으면서 부터였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힘이라고 믿으면서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가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편 18:1).
  스가랴 9:9절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예언자의 메시아 예루살렘 입성 예언입니다. 왕으로 오셨지만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미리 알려주는 예언입니다. 정말로 힘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아주 볼품이 없는 모습으로 입성하셔서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의미 없이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이셨지만 그 분은 그 죽음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인류 구원이라는 해피엔딩을 이루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메시아 상을 예언한 것이 스가랴 9:9절인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십자가라는 無力으로 종교적인 기득권인 武力을 이기셨다고 차준희 교수는 그의 책 ‘12예언자의 영성’에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인간의 무력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도구가 아니라 도리어 인간을 무너뜨리는 악의 요소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힘을 이용하면 안 됩니다. 힘은 사탄적인 도구이지 하나님의 도구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 지파가 자행했던 힘이라는 무기 대신에 사랑이라는 무기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무력은 하나님이 무력화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