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 물댄 동산 (복음성가)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가 585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사사기 18:14-20 ● 제목 : 쉿, 소리 내지 마시오. 1) 단 지파 공동체가 정탐꾼의 부화뇌동으로 인해 자행한 미가 집에 대한 폭력은 무엇이었는가? ● 본문 17절 참고 ● 1) 물리적인 폭력 ● 2) 종교적인 폭력 |
2) 단 지파 공동체와 젊은 제사장의 서로 연관된 죄는 무엇이었는가? ● 단 지파 공동체 – 19절 참고 ● 청년 제사장 – 20절 참고 |
3) 선포된 설교를 통해 오늘의 언어로 적용하여 나누어야 하는 은혜를 곱씹어 보십시다. ● 테마 ① ● 테마 ② ● 궁극적인 교회와 성도의 역할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육체적으로 연약한 지체들을 위하여 (송은호, 서태원, 윤춘자, 김순자, 유영남, 이제면, 신태일, 김재만, 권혁순 외) ② 인턴 셀과 양육 4기 하반기 사역을 위하여 ③ 하반기 열린모임 사역 준비를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중보하기 ➁ 수요기도회 참석하기 ③ 정기 선교주일 예배 기도로 준비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4년 9월 21일 주일 예배 설교 (사사기 91번째 강해) 본문: 사사기 18:14-20 제목: 쉿! 아무 소리 마시오.
오늘의 시대가 사회 뿐 아니라 교회도 침묵할 것을 요구하며 교회의 대사회적인 예언자적인 기능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시도들이 오늘 본문의 랜덤 시대의 극치의 보여주고 있는 사사 후기 때의 암흑의 시대와 같습니다. 단 지파는 정탐꾼들의 긍정의 보고에 힘입어 중무장한 600명이 출정하여 그 동안 숙영하며 살고 있었던 소라와 에스다올을 떠나 라이스로 향하기 위해 전진기지로 삼았던 유다 지역에 있었던 기럇여아림에 도착하여 그곳 이름을 마하네단이라고 부르고 그곳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라이스로 가기에 좋은 길목인 에브라임 산지로 동선을 옮깁니다. 폭력 집단으로 변한 단 지파는 이전 정탐꾼들이 사전 정탐을 통해 알아낸 미가의 집으로 향하는데 그 이유는 5명의 정탐꾼이 제시한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에 미가라는 사람의 집이 있는데 거기에는 사설 제사장이 있고 에봇과 드라빔이라는 종교적인 기구들을 통해 종교적인 행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보고와 그곳에서 상주하는 제사장으로부터 라이스 출정에 대한 길 예언(吉 預言)을 듣기도 했는데 그곳을 먼저 방문하여 접수하면 이번 전쟁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과 샤머니즘적인 탐욕의 보고가 단 지파 공동체에게 발동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탐심이 가득한 단 지파 공동체는 미가의 집에 이르러 5명은 미가의 집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600명의 무장한 군사들은 그 집을 에워싸 주인의 허락도 드라빔과 에봇을 강탈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이 종교적인 기구들을 집 밖으로 가지고 나오자 마침 그 광경을 본 제사장이 그들에게 ‘너희들이 무엇을 하느냐?’(18절 하반절)고 항의하자 5명의 정탐꾼이 제사장에게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본문 19절)고 반응합니다. 그들이 미가의 제사장에게 제시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① 이제는 미가의 집을 떠나 우리와 함께 가자는 것과 ② 한 사람의 가정에 사설 제사장으로 있지 말고 이제는 우리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일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안을 받은 제사장이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본문 20절)로 응대합니다. 그는 즉각적으로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개인에게 고용된 사설 제사장의 위상에서 단 지파 공동체의 제사장으로 급거 상승하는 신분상승을 이루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 지파의 제안에 대하여 심사숙고하지도, 그 공동체가 어느 정도로 망가진 신앙공동체인지도, 또 그 지파가 지금 무슨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신분 상승이라는 쾌거에만 눈이 멀어 미가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와 예의는 안중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 두 가지의 레마를 나눕니다.
1. 죄를 지적하지 말라는 세상은 랜덤 세상임을 알려주는 교훈입니다. 본문에서 단 지파는 주인의 허락 없이 무단 가택 출입이라는 강수의 폭력을 사용하여 도적과 같이 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율법 강령인 십계명의 최종 계명인 10계명을 위반한 것이며 죄를 지적하는 미가 집안의 청년 제사장에게 “쉿! 아무 소리 마시오.”(본문 19절a, 유진 피터슨 번역)라고 소리쳤습니다. 마땅히 죄를 지적하는 지적에 대하여 소리를 내지 말라고 강요하는 랜덤의 시대가 후기 사사 시대라고 할 때 오늘날에도 이 땅의 교회들이 이사야처럼, 예레미야처럼, 미가처럼, 아모스처럼 시대의 예언을 선포해야 하지만 한국교회 강단에서 금기시되며 공히 선포되지 못하는 몇 가지의 설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상황이 아무리 불리해도 중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죄에 대한 단호한 정죄요 돌이킴의 설교입니다. 강력한 죄에서의 돌이킴을 선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교회를 이탈할 것을 염려하여 목회자들이 타협하고 설상가상으로 교회 성도들이 그런 예민한 설교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쉿! 조용히 하세요.’ 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죄에 대하여 선포하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기초로 죄를 지적하고 선포하면 이구동성으로 쉿! 하라고 종용하는 시대가 오늘입니다. 우리 세인교회는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돌이킴을 선포하는 민감한 죗성 터치의 교회가 되고, 이 땅을 짓누르고 있는 무감각과 무디어진 회개의 칼날을 가는 교회가 되며, 모일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나의 죗성을 토로하고 고백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날마다 공급 받아 은혜 안에서 사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죄에 대한 강력한 회개를 선포하지 못하는 시대는 랜덤 시대입니다. 죄에 대하여 말하지 못하는 목사는 본문의 제사장과 같은 거짓 예언자요 성직자입니다. 제천 열방을 향하여 죄에 대하여 날카롭게 지적하고 돌이킴을 선포합시다. 회개의 메시지가 살아 있는 공동체가 됩니다.
2. 죄와 타협하는 세상은 랜덤의 절정기임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미가의 집에 고용되어 있던 청년 제사장은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죄를 눈감아 줍니다. 눈감아 준 것에서 모자라 그 죄악의 집단, 폭력의 집단으로 들어가 합류해 버립니다.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본문 20절). 제사장은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자의 사탕발림을 기뻐했다고 사사기 기자를 통하여 고발당합니다. 20절에 ‘기뻐하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야타브’는 마음에 만족함을 느끼는 희열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청년 제사장은 이미 단 지파의 제안에 마음이 녹았음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은 그 제안이 마음에 들어 에봇과 드라빔과 은을 입힌 목상을 받아들고 그 무리들 가운데로 들어갔다.”(표준 새번역 20절의 번역) 죄와 타협을 한다는 것은 죄의 주변을 어슬렁대는 것이 아니라 죄의 한 복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용인하거나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청년 제사장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제사장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급조된 제사장이었음로 그의 일탈과 종교적인 죗성에 대한 기본적인 자질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것은 그가 레위 출신이었다는 점입니다. 종교적인 특권층이었다는 말입니다. 죄는 종교적이라고 해서 덜 짓고 비종교적이라고 해서 더 짓는 류의 것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죄는 철저하게 인간의 본질적인 성향의 일탈입니다. 그래서 선교신학자인 레슬리 뉴비긴은 ‘죄와 구원’에서 “죄의 본질은 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죄는 전인 즉 몸과 마음, 영혼 전체를 타락시키는 뿌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죄를 조금이라도 우리들의 전인에서 타협의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되는 철저한 격리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타협하는 것은 죄에 대하여 스며들 수 있는 틈새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 틈새가 근래 들어 혼합주의로, 종교다원주의로, 과학만능주의로, 맘몬니즘과 물질만능이라는 새로운 우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런 포괄적인 종교성을 대치할만한 새로운 우상들을 들고 나와 복음의 핵심가치를 누그러뜨리려 합니다. ‘종교전쟁’(사이언스북스)이라는 책에서 무신론자 과학자가 기도와 기적의 무용론을 과학적인 데이터를 추출해서 기도는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자기방어기제와 같은 몽상이라고 맹공을 했습니다. 그러한 맹공에 대하여 신학자가 아닌 불가지론자인 종교학자가 그의 공격을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기도나 기적은 과학의 데이터로 분석되거나 이해되는 효과의 문제가 아니라 기도라는 영적인 행위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종교적 의미의 문제이다.” 그는 과학자가 말한 기도의 무용론에 대하여 이어서 이렇게 항변합니다. “기도의 행위에 있어서 기도가 효과가 있느냐 기도에 응답하는 신이 정말로 존재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대상이 누구든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기도라는 행위를 한다는 것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삶이란 기도 응답의 통계 수치에 갇히지 않는 숱한 차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적인 영역을 과학만능주의로 해석하려는 발상 자체의 무모함을 질타했습니다. 과학이라는 세속에서 영적인 틈새를 공격하며 노리는 속셈은 기독교가 죄와 타협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실험 결과, 물리학적, 수학적 정확성 그리고 준비된 데이터 중심의 완벽성을 기초로만 말하는 과학이 요구하는 결정체는 리처드 도킨슨의 말처럼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입니다. 랜덤으로 살기 위해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인생을 즐기라는 문구로 에둘렀지만 진심은 막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 오늘의 과학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이 주장하고 있는 세속적 이론들 중에 죄를 부추기는 일련의 행태들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초토화의 대상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와 타협하지 마십시다. 신앙생활은 과정 자체가 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싸우는 외롭고 힘든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울며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빛이 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빛이 되기를 위하여 세속에서 “끈질기게 쉿, 아무 소리 마시오.” 라고 종용하고 겁박한다할지라도 분연히 죄에 대하여 싸우며 돌이킴을 선포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예언자적인 소리를 외쳤던 영적 세례요한들이 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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