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후진 주차를 못해요.
언젠가, 명예권사 한 분이 저에게 이런 소회를 전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젊은 집사들이 새벽 예배를 나오는 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에요. 직장 생활을 하며 새벽을 지키는 것을 보면 너무 안쓰럽고 엄청난 일이거든요. 우리 같이 집에 놀고 있는 나이 든 사람은 새벽예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아마도 젊은 집사들에게 새벽 예배에 나와서 기도하라고 닦달하는 담임목사가 마땅치 않았든지, 아니면 강권하지 말라는 에두름으로 저에게 슬쩍 던진 말일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그냥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마도 저에게 조언해 주신 권사님보다 제가 젊은 집사들의 상황을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는 백 번이라도 새벽예배는 너무 힘이 드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지 못함은 제가 목사로 살기 때문인 듯합니다.
지난주간에 직장 1셀 대심방이 있었습니다. 셀 사정 상 속해 있는 지체들은 직장에서 퇴근해야 심방을 받을 수 있는 가정들이기에 저녁 늦은 시간까지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마지막 가정이 이은주 집사 가정이었는데 사순절을 기해 새벽예배를 작정하고 있는 이 집사가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기도 해서 집에 방문하여 격려하려던 차, 이 집사의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를 하지 않고 아파트 외부 이면도로에 주차한 사실을 알고 한 심방대원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왜 주차를 아파트 밖에 주차했어요.”
질문을 받은 이 집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파트 내부에 주차장에 차를 댔다가는 새벽예배 못나가요. 주차 전쟁인데 이중 주차를 하는 경우가 많아 어쩔 수 없어요. 새벽예배를 나가려면, 그리고 아직은 후진 주차를 잘못해서 더 더군다나.”
이야기를 옆에서 듣는 데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약국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환자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일까를 종은 압니다. 이상한 환자가 너무 많아 약사가 처방전을 내려도 내 방식대로 약을 조제해 달라고 우기는 경우, 그 환자들과 입씨름하는 것이 다반사일 텐데, 그게 얼마나 진 빼는 일일는지도 압니다.
퇴근할 때, 천근만근의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주부로 해야 할 최소한의 살림살이도 전투태세를 갖추고 이 집사를 기다리고 있음은 안보아도 비디오입니다. 아내로, 엄마로 해야 할 일은 또 다른 영역의 봇짐인 것을 보면 이 집사의 하루가 얼마나 치열하고 벅차고 고단할지 가슴으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를 섬기는 목사는 이렇게 말해야 정상입니다.
“이 집사님, 새벽까지 부담을 갖지 말고 생활하도록 하세요.”
그런데 그 말이 목에 걸려 있지만 하지 못합니다. 왜? 만에 하나 지금 하나님께서 이은주 집사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이 새벽의 영성을 통해 그녀를 더 자라게 하시는 일일까 봐. 그건 내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역이기에. 만에 하나 그것이라면 난 하나님의 일하심을 침범한 그리고 월권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은 자가 되기에 말입니다.
교회에서 지금 이 집사가 속해 있는 ‘구원 그 이후 반’에서 나누는 교재가 달라스 윌라드의 ‘잊혀진 제자도’입니다. 아뿔싸! 지난 주간 공교롭게도 사역한 텍스트에서 이 내용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은혜의 반대는 공로이지 노력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지식을 바탕으로 적극 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닮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pp,121-122)
세인교회 담임목사는 이런 글이 눈에 크게 들어오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생긴 대로 살겠습니다. 저는 이은주 집사가 택하고 있는 아파트 외부 이면도로에 주차하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업어 주고 싶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왜? 구원 받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서 마땅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이 집사의 영성 개발이 너무 귀해서입니다. 그래서 후진 주차를 못하면 그 시간에 가서 대신 주치를 해주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못 말리는 이강덕 목사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바이올린 연주로 들리는 ‘찌고이네르바이젠’ 의 선율이 너무 아름다워 이은주 집사에게 선물로 주렵니다. 이은주 집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