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2)2024-02-28 18:06
작성자 Level 10

2020년 7월 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열일곱 번째 강해)

 

제목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2)

본문고린도후서 4:13-15

 

서론)

 

오늘은 한국교회가 같은 마음을 갖고 지키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삼차 하나님 앞에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을 따라서 3대 절기를 지켰습니다.

첫 번째 절기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지킨 절기였습니다.

이 절기는 7일 동안 발효되지 않은 딱딱한 무교병을 먹으면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로 지키는 절기였습니다.

두 번째 절기가 맥추절인데 이날은 오순절이라고도 하고 칠칠절이라고도 하는 절기로 유월절이 지난 다음 7주 후에 보리와 밀을 추수하고 나서 첫 열매를 볶은 후 가루로 빻아 기름과 유황을 얹어서 화제 즉 불로 태워서 제사를 드린 날입니다.

맥추절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절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밀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절기는 초막절이라도 부르는 수장절입니다.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은 것의 수확물을 창고에 들여 놓고 가을의 들판에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생활하며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간 초막을 짓고 생활하던 것을 기념하며 지키던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이 세 가지의 절기를 아주 철저하게 준수하고 지켜 왔습니다.

오늘은 이 세 가지의 절기 중에 한국교회에서도 맥을 이어 지키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다만 우리의 농사 월력으로 보리 추수의 첫 열매를 드린다는 것의 의미가 절기적(節氣的)으로 맞지 않기에 우리가 지키는 맥추감사절기는 지난 상반기 동안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로 지키는 것이 상례입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대단히 의미 있는 절기인 오늘정말로 내가 감사할 내용이 무엇인가를 본문을 통해 살펴보는 것도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기에 함께 본문을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설교를 통해 앞선 구절에서 바울이 말했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질그릇에 담긴 보배라는 깨지기 쉬운 존재이지만 역으로 그래서 하나님이 더욱 세밀히 우리를 살피시는 귀한 존재라는 정체성이 있음을 살폈고더불어 이 정체성을 갖고 있는 자는 언제나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존재라는 또 다른 정체성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선포하는 또 다른 영적 정체성을 나누어볼까 합니다.

 

3) 다시 살 것을 믿는 백성이라는 정체성입니다. (소위 말하는 부활신앙입니다.)

 

본문 14절을 읽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또 들은 설교와 말씀을 들라면 아마도 지금 담임목사가 다시 또 언급하는 부활 믿음에 관한 설교일 것입니다.

이 말은 아주 조심스럽게 부활신앙에 관한 메시지는 그만큼 중요하다는 교훈의 의미도 있겠지만그 반면에 교우들이 매우 식상해할 가능성이 높다는 매우 우려스러운 진단을 할 수 있는 메시지라는 말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메시지는 우리들이 그렇게 판단할 정도로 가볍거나 식상해할 테마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신앙이라는 테마는 단지 부활이라는 단 한 가지의 개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관련한 아주 선명한 또 다른 연결고리가 있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부활신앙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사고의 구조가 반드시 직선적인 사고를 가져야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문 14절 후반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적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부활은 단선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곧이어 부활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직선적인 연장선에 있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이라는 또 다른 굵직한 선이 부활 신앙들에게는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런 부활신앙을 갖고 있는 자라면 한 가지 삶의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는 말도 포함합니다.

 

※ 부활신앙인은 랜덤(마구잡이의 삶)으로 살지 않습니다.

 

다시 14절 후반절을 읽겠습니다.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여기에 그 앞에 서게 한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파라스테세이라는 단어는 아주 가끔은 타동사의 의미로 번역되는데 그때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혀 놓는다.’

이 원칙에 따라 본문을 가장 잘 번역한 번역이 공동번역 성경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옮겨놓았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우리를 그분 곁에 앉히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 곁에 앉히시리라

공동번역 성경으로 이 본문을 읽다가 므비보셋 생각이 불현 듯 났습니다.

므비보셋이 누구입니까?

다윗이 그토록 어려웠을 때 다윗의 편에서 끝까지 그를 지켜 주었던 다윗의 친구인 요나단의 아들이자 사울의 손자였습니다.

그는 절뚝발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울 왕가가 몰락할 때왕궁에 남아 있었던 사울의 친족들은 급히 왕궁을 떠나 피신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므비보셋을 키우던 유모도 급하게 피신하던 탓에 므비보셋을 떨어뜨려 다리가 부러졌고 폐족이 된 이유 때문에 므비보셋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평생 부러진 다리로 인해 불구가 된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이 정권을 잡고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폐족의 신분으로 로드발이라는 황무지에서 숨어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폐족의 신분이 노출되면 죽을 수 있음을 알았기에 불안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였는데 드디어 염려했던 것처럼 다윗왕의 호출이 떨어집니다.

아마도 사울 왕가의 폐족이었던 므비보셋은 죽음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이 므비보셋을 호출한 이유는 은혜에 대한 보답 차원이었습니다.

아버지 요나단이 다윗에 베푼 그 은혜에 대한 보답 말입니다.

므비보셋을 부른 다윗은 벌벌 떨고 있는 그에게 베푼 은혜를 사무엘하 9:7절은 이렇게 보고해 줍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주목한 문구가 보이십니까?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무슨 말입니까?

같은 식탁에서의 식탁공동체를 허락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므비보셋을 자식을 여겼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자기의 최고의 근(자리에 앉힌 것입니다.

즉 파라스테세이한 것입니다.

그만큼 신뢰하며 애지중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 이후 므비보셋에 대한 아슬아슬한 역사가의 보고를 접합니다.

이후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왕궁에서 피신하여 떠돌이 신세가 됩니다.

그때 다윗의 사람들은 일제히 다윗을 따라 초라한 형색인 것은 분명하지만 망명의 길에 동참합니다.

허나 그 자리에 므비보셋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므비보셋이 보이지 않은 이유를 그를 섬기던 하인인 시바가 이렇게 다윗에게 보고합니다.

사무엘하 16:3절입니다.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아주 쉽게 설명하면 므비보셋이 다윗을 배신했다는 말입니다.

압살롬으로 인해 자신이 잃어버린 사울의 왕가를 다시 복원되기를 소망한다고 피력했다는 것입니다.

시바의 말을 그대도 받아들이면 므비보셋은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의 전형적인 배신자의 행위를 벌인 것이 됩니다.

사무엘하 역사가의 보고를 통해 잘 알지만 이후 하나님은 다윗의 군대가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하게 하시고 다시 왕으로 원대 복귀하게 하셨습니다.

이 드라마틱한 현장에서 숨 가쁘게 들쳐보아야 하는 것은 므비보셋의 배신행위입니다.

다윗이 왕궁으로 복귀하는 날므비보셋이 그를 마중 나옵니다.

다윗을 정중하게 영접한 것입니다.

살기 위한 비겁한 행위일까?

해석을 뒤로 미루어 봅시다.

그 장면을 복기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9:24-30절을 읽습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므비보셋의 말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므비보셋이 거짓말쟁이입니까?

아니면 시바가 주인의 기업이 탐이 나 모함한 것입니까?

대단히 예민한 것은 다윗도 므비보셋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이렇게 성경에 등장한 이 담화 대한 해석을 유보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주 신중하게 이런 해석의 여백을 남기겠습니다.

시바도 아니요므비보셋도 아닌 다윗의 삶 말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이라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역사가는 그가 경험했던 기가 막힌 아픔을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사무엘하 15:30절입니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이런 기막히고 참담한 일을 경험한 다윗이기에 시바에 대하여도 아니면 므비보셋에 대하여도 감정적인 태도로 그들을 심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삼하 19:29)

다윗은 자기에게 이런 기막힌 고난이 임했던 이유가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고의적으로 살해한 천하가 공로할 죄악을 저지른 것에 대한 대가임을 알았기에 시바와 므비보셋에 대하여 평가하는 일체의 일을 랜덤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막 살지 않았던 다윗의 행보에 적지 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목도하는 자의 삶은 결코 랜덤으로 인생을 내던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목도하는 삶을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갈무리합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4)

 

4) 상황을 감사의 내용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그리고 편지 안에서 여러 가지의 정황에 맞물려 압박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편지에서 압박에 굴하지 않고적대자들까지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공동체로 만들려고 하는 이유를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성도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에서 성경 다음으로 귀중히 여기는 신조가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입니다.

그 중에 107가지의 소요리 문답의 내용들은 장로 교인들이 보물처럼 여기는 대단히 중요한 신앙생활의 목적을 알리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예정론에 대한 부분에서 상당한 신학적 이견의 내용을 담고 있어서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문답집이지만 그럼에도 첫 번째의 질문과 답은 교파를 초월하여 함께 같은 마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소요리 책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문제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답변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견이 있어서는 안 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피조 된 자인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자 책무입니다.

바울도 이것을 삶의 제일 목적으로 알았기에 본문 15절에서 이렇게 강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가만히 보면 바울의 상태는 이미 강해 설교를 통해 나눈 것처럼 별로 녹록하거나기쁘거나범사에 모든 일들이 잘 진행되어 가는 그런 순탄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불만도 표출하고짜증을 낼 수도 있고반대자들을 향하여 표적을 삼아 비난의 화살을 날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이견 없이 같은 마음으로 아멘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져야 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본문 15절 중반절에서 바울은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한 가지의 과정을 소개합니다.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감사라는 은혜를 경험해야 가능합니다,

이 선언이 바울의 선언이기에 저는 그의 진정성이 보여 그의 외침을 받아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이 편지를 쓸 때 감사가 충만한 상태였습니까?

조금 전에 언급한대로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감사는커녕 바울의 상태는 대단히 곤비하고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후에 살피겠지만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자신이 당했던 그리고 당하고 있는 지난한 고통을 11:23-27절에서 토로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구구절절에 어디 감사의 내용이 등장합니까?

눈을 씻고 보아도 감사의 내용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안타까운 토로를 거침없이 내뱉었던 바울의 결론이 중요합니다.

너무 감동입니다.

이런 일을 경험했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주의 사역과는 담을 쌓겠다고 주님께 선포하고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께 대한 기대감을 아예 버리는 것이 낫다고 종용했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런 기막힌 고통의 토로 뒤에 바울이 얻게 된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깨달게 됨에 감사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30-31절을 감동을 받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 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오늘 설교의 네 번째 교훈에 맞게 제가 문장을 바꾸겠습니다.

내가 부득불 감사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감사하리라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너무나 중요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감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인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교훈 말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 드린 7월 월삭예배에서 제게 증거 한 본문은 순서에 따른 에스겔 36:1-15절이었습니다.

에스겔 예언자에게 들려주셨던 신탁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며 부유하게 되어 즐거워하고 있는 에돔에 대하여 경고한 메시지임을 전했습니다.

그 에돔을 제거한 뒤에 내 사랑하는 내 백성을 다시는 넘어뜨리지 못하게 되어 내 백성들은 회복될 것임을 전했습니다.

그날 교우들과 함께 나누었던 메시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은혜는 내 안에 있는 에돔을 척결할 때 임하는 것임을 전했습니다.

그날 예배를 참석했던 한 지체가 이렇게 전언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에돔이 무엇인가를 살피게 되었고다시 내 안에 있는 에돔을 제거하고 척결함으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리라고 다짐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결론그 날 말씀의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체의 보고를 들으며 이런 감사가 밀려왔습니다.

종이 해석한 말씀을 듣고 회복이라는 영적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성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 지체는 말씀을 해석함으로 들려주는 종이 있어 감사했고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감사를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감사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감사를 찾아내는 성도의 정체성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류호준 교수의 글에서 절절하게 공감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보내느라 밀렸던 온갖 일과 대소사를 찾아다니느라 정신없는 토요일을 보낸 성도들에게 주일 아침은 결코 신나거나 활기찬 아침이 아닙니다그들이 누구입니까설교자가 상대할 사람들입니다지금 회중석에는 온갖 유형의 사람들이 떡하니 앉아 있습니다상처 입은 사람거만하기 그지없는 사람삐딱한 사람몽유병자 같은 사람심야 드라마를 보다가 부족한 잠을 교회당에서 채우고 있는 사람축 처진 어깨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사람저 뒤쪽 기둥 뒤에 숨어 있는 젊은 권사어젯밤에 외도를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뻔뻔스럽게 앉아 있는 남자 집사자존심이 상했다며 지긋하게 눈을 감아 그 누구도 표독한 눈을 알아채지 못하게 위장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영혼의 어둔 밤을 지내며 퀭한 눈망울로 천장을 응시하는 남자신혼의 달콤함에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고 있는 젊은 커플세 번째 취업 시험에 낙방하고 실패하여 멍한 눈으로 설교자를 바라보는 취업 준비생인생 황혼의 늙어감에 대한 회한으로 그늘진 얼굴을 하고 있는 노부부 등 온갖 유형의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설교자에게는 숨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그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전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류호준,“교회에게 하고픈 말”,p,134.)

글을 읽고 밑줄을 그어놓았는데 오늘 설교 원고에 삽입한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긴장감 속에 있는 것이 목사와 성도의 관계인데 이 숨 막히는 긴장 관계 안에서 서로가 말씀으로 인해 은혜를 나누었다면그리고 영적인 결단까지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만들어내고찾아냄으로 이루어낸 감사의 클라이맥스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감사를 만들어내고 찾아내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2주 전기도원에 가지고 올라간 책 중에 하나가 우리나라에도 상당히 많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의 숲)’이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신드롬이라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 수작으로 꼽히는 그의 명 소설(?)을 늦깎이로도 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가지고 올라가서 독서했습니다.

설교의 마무리를 해야 하는 부분이라 자세한 줄거리는 이야기를 할 수 없고결론만 말씀드리자면 독서의 소회는 이렇습니다.

도대체 왜지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에 열광했지!”

전후 패망한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다시 돈을 벌어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하던 어간물질적인 풍요로움이 갑자가 찾아온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경제 발전의 극점에 있었던 일본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었던 대학생들이 누리던 자유라는 테마거기에 걸맞게 윤리나 도덕을 하나의 폐기물로 전락시키고 오로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온갖 육체적 탐닉과 자유(설교자인 내가 볼 때는 극도의 방종)만을 외치는 아류들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승화시킨 이 소설을 왜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물론 이제장년의 반열에 서 있는 3-40대까지 열광했을까?

이 책에 대하여 상당한 호감을 나타낸 북 리뷰어 한 사람이 이렇게 극찬했습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동시대성의 감각을 잘 표현한 소설

하지만 목회자인 내가 설정한 코드에 맞는다면 저는 이렇습니다.

랜덤의 호황기를 그리고 선망하도록 만든 괴물 같은 소설.”

 

우리 제천에서 지청장으로 근무를 했던 김회재 장로께서 여수 지역구를 발판으로 국회에 입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국민일보 신문에 크리스천 포럼에 강사로 나선 그의 간증이 실려 오랜만에 SNS 상에서 그와 함께 교제했습니다.

제가 김 장로께 이런 글로 안부를 물었습니다.

김회재 장로님께

주 안에서 장로님께 안부를 전합니다제천세인교회를 섬기는 이강덕 목사입니다먼저 귀한 선량(選良)으로 선택되심을 축하드립니다제천에서 장로님과 귀한 사역을 감당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 데 뒤돌아보니 빠른 세월의 유속을 새삼 느낍니다한국교회가 많이 아프고국가도 많이 아픈 시기에 국민을 대변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셔서 영적 부담감이 남다를 줄 압니다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크리스티아노스’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처음으로 받은 별칭)로서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장로님에게 힘주실 줄로 믿고 박수를 보내며 중보 합니다지난 주간에 장로님의 간증 사역을 국민일보 포럼 기사를 통해 의미 있게 읽었습니다정말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찾기가 너무 어려운 시대해서 하나님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단 한 사람의 의인을 예루살렘에서 찾으라고 했을 때 유감스럽게도 찾을 수 없었던 그 한 사람으로 장로님이 서 주기를 기대합니다.

교회는 이타적일 때만 교회다.”라고 선포했던 디트리히 본회퍼의 일갈이 교회뿐 아니라 성도에게도 적용되는 촌철살인인 것을 믿기에 그런 동역자로 장로님이 서 주시기를 부탁합니다건강하시기를 바라며 언제나 공의와 정의로 무장한 그리스도인이 장로님이라는 것을 여론을 통해 듣겠습니다기쁜 소식이 전해지기를 소망합니다.

이 글을 접한 김 장로님이 저에게 이런 답신을 보내 주었습니다.

목사님감사합니다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정치인으로서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국가와 국민을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목사님 뵌 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서울 오실 일 있으시면 꼭 연락 주십시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특히 오늘은 2020년 상반기의 감사를 결산하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맺겠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무엇으로 증명하겠습니까?

부활의 믿음을 갖고 그 날 하나님 앞에 가장 가까이 설 것을 믿고 랜덤이 아닌 은혜로 살아나는 삶으로 증명해 내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를 찾아내 그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진실한 삶으로 증명해 내기를 바랍니다.

이런 삶을 살아내는 당신을 주군께서는 응원하실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