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열네 번째 강해) 제목: 너울을 걷어 내자 본문: 고린도후서 3:12-18 서론) 한 성공한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와 아들은 미술 애호가였습니다. 둘은 함께 세계 여행을 하면서 피카소, 반 고흐, 모네와 같은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했습니다. 둘의 수집품은 10억 달러 가치를 넘어섰습니다. 그는 자신과 같이 예술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아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애국심이 깊던 아들은 조국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자 했습니다. 전쟁 중 군으로 소집된 아들은 기꺼이 조국의 부름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투입된 아들은 몇 주 뒤에 실종되었습니다. 며칠 후 아들에 관한 두려운 소식이 사업가에게 도착했습니다. 아들이 부상당한 동료를 구해내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다 사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집에 걸린 훌륭한 미술품도 그를 괴롭혔습니다. 잃은 아들과 함께 여행했던 즐거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젊은 군인이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구해줘 목숨을 부지한 바로 그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구한 다른 군인들의 이야기와 동료들이 아들을 얼마나 좋아하고 존경했는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와 동료일 뿐 아니라 벗이었습니다. 저도 미술을 좋아했거든요. 아버님의 아들, 저의 벗인 친구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아버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머뭇거리며 말했습니다. 그 초상화는 사업가의 집에 채운 다른 걸작들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이 없는 작품이었지만, 위대한 사랑으로 탄생한 작품이었습니다, 사업가는 벽난로 위에 걸린 명화들을 치우고 아들의 초상화를 걸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가장 사랑한 작품이 된 것입니다. 6달 후에 슬픔과 상실로 인해 쇠약해진 사업가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단 하나의 아들을 잃은 그에게는 상속자가 없었기에 그의 수집품들은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사람들은 명화를 입찰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경매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걸작이 아니라, 한 군인이 그린 전사한 아들의 초상화였습니다. 몇 몇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고, 다른 작품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러나 사회자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이 팔리기 전에는 절대로 다른 작품을 팔지 말라는 고인의 유언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자는 입찰을 기다렸지만 누구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회자는 맨 처음 10,000달러에서 입찰 가격을 시작했지만, 곧 100달러라도 살 사람이 없느냐고 사정할 형편이었습니다. 죽은 청년의 선한 인상이 잘 그려진 초상화라고 그 부자를 잘 아는 지인이 100달러에 사겠다고 했습니다. 사회자는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할 사람이 없냐고 되물었지만 결국 아무도 없어 그 초상화는 100달러에 낙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이어 나올 명화들을 기대했습니다. 전 세계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걸작을 목표로 달려온 그들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사회자의 말에 사람들은 기절할 만큼 놀랐습니다. “경매를 종료합니다. 초상화 속의 청년의 아버지는 이 초상화를 사는 사람에게 모든 소장품의 소유권을 넘기겠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조니 램, “남김없이 내려놓음”, 바이탈북스,pp,105-107.) 저는 이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며 또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그러다가 불현 듯 제게 강하게 밀려온 소회는 바로 ‘의미(meaning)’이었습니다. 이 ‘의미’라는 개념은 단순히 철학자들만이 이해 개념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개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목양터 이야기마당에서도 밝혔지만 왜 사람들이 조지 페리 플로이드를 추모하고 있습니까? 반면 왜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 미국의 현직 대통령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를 인간 말종(末種)처럼 여깁니까? 사람의 의미를 항상 돈으로 보는 그의 천박성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본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오늘 설교의 화두를 던지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사람은 언제나 의미를 갖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갖고 사는 존재입니까? 말하나마나 ‘영적 의미’(spiritual meaning)를 갖고 사는 자들입니다. 본론)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라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영적 의미를 대단히 강하게 역설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시내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서 너무 엄청난 광채(빛)가 나서 시내 산 밑에 있었던 사람들이 도무지 모세의 얼굴을 보지 못하자 모세가 회중들에게 연설을 마친 뒤에 스스로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출애굽기 34:33) 이 구절에 기록된 ‘수건’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쓰베’는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수건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문자적으로 조선 시대 여성들이 외간 남자들에게 자기 얼굴을 가릴 때 치장하던 천조각과 같은 ‘너울’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조금은 세밀한 강해가 필요합니다. 출애굽기 34장의 정황을 더 세밀히 연구하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 올 때, 자신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지를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다고 출애굽기 34:29절은 증언합니다. 다만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아론을 비롯한 회중들이 그를 보지 못할 정도로 모세는 빛이 난 것입니다. 자신의 얼굴에 빛이 나는지를 잘 몰랐던 모세는 회중들에게 연설을 하고 난 뒤에야, 그의 상태를 직시하고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바로 그 다음, 출애굽기 기자는 아주 의미 있는 모세의 행동을 보고합니다. 회중들과의 만남을 마친 모세가 다시 여호와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갈 때는 자신이 가리고 있었던 수건을 벗었다고 보고한 점입니다. 출애굽기 34:34절을 주목하십시오.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왜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는 수건을 벗었을까요? 묻는 자체가 우문이지 않겠습니까? 모세의 얼굴이 아무리 빛난다고 하더라도 그 빛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빛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너무나도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는 수건을 벗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한 절만 더 접근해 보십시다. 출애굽기 34:35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하나님과 대면을 마치고 다시 모세가 이스라엘 회중들 앞에 설 때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집요하게 출애굽기의 서사를 짚고 있습니까? 모세가 쓰고 있는 너울의 상징성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출애굽의 기록에 의하면 모세가 이 너울을 쓴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회중과의 소통 그리고 교제를 위함이었습니다. 모세에게서 비추는 빛 때문에 시내 산 밑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회중들이 도무지 모세에게로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너울의 권위적인 상징성은 오직 회중 앞에서라는 제한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모세의 너울에 대한 해석을 바울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고린도교회의 율법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시킵니다. 왜? 그들이 아주 익숙히 알고 있었던 바로 이 모세에 대한 전승을 끄집어냄으로서 그들도 도무지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바울 신학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본문에서 던져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본문 13-15절을 읽겠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바로 이 구절에서 주목할 내용이 보입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는 모세가 본인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빛의 광채로 인해서 모세가 너울을 쓴 것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에서는 모세가 자신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가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서 너울을 썼다고 해석했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해석으로 모세의 너울 사건을 선포했을까요?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바울의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설명하겠습니다. 모세도 자신에게 나타나는 영광의 빛이 제한적이고 한시적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상징인 모세는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영광의 빛이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 없이 사라지는 제한성과 오직 회중들 앞에서나 위력이나 권위를 발휘한다는 한시적 상징성을 바울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차례 우리 교우들에게 소그룹 사역을 통해 전했던 것처럼 성경이 말하는 시대적 구분을 복음주의 권에 있는 교회에서는 대체적으로 이렇게 나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① 양심심판으로 인해 구원의 시대: 아담으로부터 모세 이전까지 ② 율법심판으로 인한 구원의 시대: 모세로부터 예수님 이전까지 ③ 복음심판으로 인한 구원의 시대: 예수님 초림시기부터 재림 시기까지 이 공식을 그대로 대입한다면 율법의 의미가 적용되는 시기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부여 받은 이후부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라는 한시적 설정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분명히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강하게 역설한 것입니다. 다시 13절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분명히 그렇습니다. 바울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한시적 권능을 알기에 그 율법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그러면서 무엇을 지적합니까? 14-15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바울은 자기를 공격하고 있는 율법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고의적으로 모세가 쓴 너울을 벗어던지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비판이라는 단어를 쓴 자신 있는 이유는 바울이 갖고 있었던 마음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바울이 이렇게 단호하게 고린도교회에 산재해 있는 적대자들에게 너울의 한시적 의미를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너울의 권위가 예수께서 오심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런 본질적인 의미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기독교라는 종교의 상징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자들은 자꾸만 예수라는 본질 외에 여타 다른 쓸데없는 너울로 자신의 신앙적인 약함을 가리려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자행합니다. 본문 16절을 읽어 보십시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정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너울이 필요 없다는 믿음의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 17-18절이 그 답을 제시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바울이 이 적확한 설명을 읽으면서 바울의 천재성을 저는 느낍니다. 시내 산에서 왜 모세와 회중들이 서로 대면할 수 없었습니까? 한 쪽은 빛나는 광채가 나는데 또 다른 한쪽은 금송아지를 섬기던 패역함으로 인해 감히 그 빛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처사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은 그 너울이 필요 없음을 강력하게 제시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그 분 안에 있는 자는 너울을 벗어도 괜찮은 영적인 영광의 상태에 모두가 거하기 때문임을 바울이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성령의 일하심의 결과임을 본문 마지막 절에서 피력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복음서의 한 구절이 귓가를 때려 원고에 올려놓았습니다. 누가복음 23:44-46절입니다. “때가 제 육 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헤롯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의 한 가운데가 찢어졌음을 보고하는 누가의 글말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휘장이라는 단어가 바로 다른 단어로 바꾸면 오늘 본문에 자주 나오는 수건 즉 너울의 또 다른 단어인 ‘베일’(카타페타스마)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구속사의 대업을 성취하시는 바로 그 시간, 지성소와 성소를 가리고 있었던 너울이 벗겨졌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베일이 벗겨졌습니다. 개역개정판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수건을 걷어 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를 통해 우리 세인성결지체들이 담아내야 하는 영적 교훈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일체의 종교적 너울을 우리도 걷어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사택 전기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사택 전기가 곳곳에서 누전이 되는 데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서 전기업체에 의뢰를 해서 누전이 되는 것을 해결했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이 너무 잘 알고 있는 제천 소재 모 전기업체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와서 전기 누전의 원인을 진단했습니다. 약 30분 정도의 기술적 진단을 했습니다. 누전의 원인이 진단되었습니다. 사택 공사를 할 때 겨울 공사를 한 탓에 완전히 양생되지 않은 벽면에 전기선을 매몰하고 공사를 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속에서 마르지 않은 콘크리트 안에 매설되어 있는 전기선이 습기에 노출되어 누전 경보가 그렇게 빈번했던 것이었습니다. 진단을 마친 엔지니어들이 아주 능숙한 방법으로 습기에 찬 전기선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정격 규격의 전기선으로 바꾸는데 들어간 시간은 약 1시간 30분이었습니다. 도합 약 2시간 만에 사택 전기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옆에서 일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 본 저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전이라는 경고등이 빨간색에서 파란색을 바뀌도록 하는데 도입된 것은 단 한 가지, 습기 찬 전기선을 걷어내고 새 전기선으로 교체한 것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내 심령 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가지 못하는 영적인 누전 경고등이 번쩍이고 있다면 그렇게 만들고 있는 치명적 너울 전선을 걷어 내야 합니다. 그 너울을 걷어내지 않고는 내 신앙의 여정에서 대형 화재사건으로 비화되는 비극을 맛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 한 가지는 아주 전문적인 기술력을 전제로 한 문제 진단 능력이 너무 뛰어난 그들을 보면서 배운 교훈입니다. 소위 말하는 전문성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바울의 역설로 바꾸어 말하면 바로 영적 집중력인 영력입니다. 저는 12절 말씀의 의미를 아주 감동적으로 곱씹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 앞에서 결코 주눅 들지 않고 말했습니다. 어느 정도였습니까? “담대히”입니다. 바울에게 어떻게 이런 담대함이 있었습니까? 본문 16절이 정답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는 종교적인 껍데기인 너울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고도의 영적 집중력이 바울의 영력이었고 무기였습니다. 오늘의 언어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지금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 가고 있습니까? 지금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까? 지금 당신은 예수님과의 거리 간격이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지금 당신의 영적 시야 안에 주님이 들어와 계십니까? 혹시나 여러분은 신앙의 승리에 전혀 쓸모없는 껍데기 너울을 쓰고 여러분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혀 예수님을 향한 신앙과는 관계없이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예수 믿은 지가 얼만데, 내가 그래도 교회에서 이런 위상을 갖고 있는 직분자인데, 내 신앙의 이력서는 앞 장에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뒷면을 할애해야 하는 경력의 소유자인데, 나는 지금 신학교에서 학위과정을 하고 있는데, 그리고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는데, 나는 성경 일독을 수백 번 수십 번을 했는데, 나는 이런 저런 영성 훈련을 마쳤는데, 내가 받은 은사가 얼만데. 이 너울 때문에 주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다면 너울을 걷어 내십시오. 너울을 쓰고 주님과 멀리 있는 것보다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사모하는 것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겠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면서 요 근래 저는 스스로 저의 목양적인 여백을 뒤돌아보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나름 몸부림치려는 진동함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과의 거리 좁히기입니다. 정말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영적 팩트입니다. 이것을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배우게 되는 엄청난 도전이 있습니다. 주님과 거리를 좁히려면 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껍데기를 벗어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목이 졸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며 슬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들이 너무 많은데 성경책 들고 교회 앞에서 포즈를 취하면서 거룩한 폼 잡는 목사로 남아서야 되겠습니까? 자기가 난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가방 속에 의붓자식을 9시간이나 가두어 끝내는 죽게 만드는 짐승들이 즐비한 기막힌 죄악의 시대에 뒷짐 지고 있는 목사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목사인 나도, 그리고 섬기고 있는 제천세인교회의 지체들이 더 가까이 주님과의 거리 좁히기에 승리하도록 엎드리는 목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조금 더 치열해지려 합니다. 그러려면 나를 그리스도 예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일체의 너울을 걷어 내야합니다. 아주 공격적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이 우리 교우들 전체에게 임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난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난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영광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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