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더 더욱 필요합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3:7-11
서론)
오늘 설교를 위해 본문을 묵상하다가 2015년에 방문했던 터키의 갑바도기야에 있는 데린구유 지하도시가 생각났습니다.
로마의 기독교핍박의 시절, 기독교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 지하로 파내려가 건설한 도시가 바로 데린 구유입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약 지하 15층 아파트의 규모로 되어 있는 엄청난 규모의 데린구유 지하도시는 안전상의 이유로 8층까지만 개방되어 있어서 당시 제가 속해 있었던 성지순례 팀 역시 지하 8층만 관람했습니다.
당시 성도들이 거하던 방들이 지천에 있었고, 동물들을 키우던 지하 축사, 물을 담아두었던 우물, 식량을 저장하던 창고, 외부의 침입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의 일환으로 미로처럼 엮인 길들을 설계했던 데린구유를 보며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감동은 지하 8층에 있는 예배당과 신학교 건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감격의 예배를 드리던 신앙의 선배들이 보이는 것 같아서.
약 20,000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던 지하 도시에서 그들이 가장 위대한 삶의 가치로 여겼던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밤이 깊은 시간이 되어야 지상으로 나와 숨을 돌렸던 그들이지만 그들이 이 어려운 삶을 영위했던 유일한 이유는 신앙의 자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소중함 때문이었습니다.
언젠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지하도시에서의 삶을 살아냈던 데린구유의 크리스천들을 생각하면서 너무나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던 그때의 소회를 갖고 있습니다.
왜 부끄러웠을까요?
나는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목사로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데린구유의 지하교인들이 갖고 있었던 그 영성을 소유하고 있는가?
나는 핍박의 시대에 이 신앙을 정말로 지킬 수 있는 신앙의 도를 사수할 만한 성숙함이 있는가?
나는 순교자의 신앙을 따라가고 있는가?
뭐 이런 복잡한 마음이 몰려와 데린구유 방문기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데린구유 지하도시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데 제게 울렸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17-18절이었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데린구유에서 제게 임했던 벼락같은 소리였습니다.
같은 기간 소아시아 성지순례 막바지에 터키 최대의 도시인 이스탄불 탐방에 나섰습니다.
그때 방문했던 아야 소피아(하기야 소피아)라는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세계사를 공부한 분들은 알겠지만 기독교가 서방 기독교인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기독교인 정교회인 분열된 것은 1054년이었습니다.
표면상으로 성상(聖像)문제라고 하지만 뿌리 깊은 동서양의 문화적, 사상적 차이로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 교회로 분열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분열된 동방교회의 정치적 수장이었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 종교적인 거점 도시로 콘스탄티노플을 만들고 대도시로 발전시켰습니다.
그 때 이 도시에 세운 성당이 하나 있는데 바로 하기야 소피아 성당입니다.
콘스탄티우스가 세운 하기야 소피아 성당은 제일 처음 세워졌을 때는 지금처럼 엄청난 규모의 성당은 아니었는데 황제 유스티아누스가 이 성당을 새로 신축할 때 지금 규모의 하기야 소피아라는 엄청난 규모의 성당을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이 성당을 대성당으로 만든 이유가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정치적 산물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유스티아누스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이 일으킨 소위 말하는 ‘니카 반란’(주후 523년)에 연관되어 있는 자들 약 30,000명을 학살했는데 이 인원은 당시 콘스탄티노플 전 인구의 15%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던 유스티아누스가 자신의 죄책감을 종교적으로 덜어내기 위해 계획적으로 세운 것이 바로 하기야 소피아 성당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이러한 하기야 소피아의 성당에 얽힌 그릇된 신앙의 흐름을 그대로 놔둘 리 없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비잔틴 제국은 1453년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콘스탄티노플은 말 그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동방교회의 모든 것이 이슬람 제국에 의해 초토화되었기에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콘스탄티노플에서 살아남은 것이 있는데 바로 하기야 소피아입니다.
술탄이 아름다운 하기야 소피아를 파괴하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기야 소피아는 살아남기는 했지만 더 큰 수모를 당하게 되는데 그 엄청난 동방 기독교의 정신이자 상징이었던 하기야 소피아는 아야 소피아라는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는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더 치욕스러운 것은 지금 이 성당은 아야 소피아라는 박물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저는 바울의 여정인 소아시아 성지순례를 하면서 하나님의 압도하시는 역사의 주관으로 몸소 느끼며 소름이 끼쳤던 기억이 너무 생생합니다.
지하 도시에 건설된 데린구유에 살고 있었던 핍박받는 기독교인과 지상에 건축된 어마 무시한 규모의 건물로 건축된 하기야 소피아가 지금은 박물관을 전락되어 관광객들이 즐거워하며 사진을 찍는 배경이 된 것을 보면서 도대체 누가 승리했는가를 너무 선명히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는 교회와 성도는 추락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배제된 교회와 성도, 이미 그것은 살아있다고는 하나 죽은 송장과 다름없다는 교훈을 배웁니다.
저는 소아시아 성지순례를 통해 어떤 것이 정말로 우리들이 붙들어야 하는 영적 아딧줄인가를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견했던 추억이 생생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저는 오늘 본문 여행을 통해 제가 경험했던 진정성이 있는 승리 그리고 영광이 무엇인가를 교우들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이제 본문 여행을 떠나 보십시다.
본론)
오늘 본문을 공부하다가 제 눈에 연속적으로 선명하게 들어온 단어가 있습니다.
8절에 ‘더욱’, 9절에 ‘더욱’, 10절에 ‘더’, 11절에 ‘더욱’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바울이 도대체 무엇에 빠져 있었기에 이 단어를 불과 5절 밖에 안 되는 본문에서 무려 4번에 걸쳐서 연속으로 사용했을까?
이것을 푸는 것이 오늘 설교의 키워드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 이해는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말씀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출애굽기 32-34장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것처럼 출애굽기 32장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불신앙적인 행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시내 산에서 벌인 금송아지 난장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3장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실망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동행을 거부하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진 것과 이런 하나님의 분노를 돌이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중보 한 모세의 중보기도를 소개합니다.
34장에서는 극적으로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다시 시내 산으로 불러 금송아지를 부서뜨리는 도구로 사용된 돌 판 대신 모세가 새롭게 새겨 가지고 올라간 두 돌 판에 다시 제의적인 계명 즉 십계명을 주시며 언약을 갱신하시는 장면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배경을 갖고 있는 출애굽기 32-34장을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을 포함한 성도들에게 상기시키며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립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다분히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의 주류는 이미 설교를 통해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이 젖줄과도 같이 여기는 타나크(토라-오경, 느바임-예언서, 크투빔-성문서) 즉 율법을 사수하려는 변칙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기에 그들에게 구약성경에 있는 말씀을 도구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최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 율법적인 사상이 농후한 저들에게 아주 민감한 부분을 이렇게 터치합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7절)
여기에서 언급된 돌에 써서 새긴 율법의 조문은 말할 것도 없이 모세가 받은 십계명 돌 판입니다.
직분도 유대 율법적인 권위를 말합니다.
7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구절을 톰 라이트 교수의 번역을 읽어 보십시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이 돌 판에 문자로 새겨졌을 때. 그것은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사실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에 잠시 나타난 영광 때문에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고린도후서”, IVP,p,51.)
바울은 율법이 한시적으로 중요한 것이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그 중요성을 인정했습니까?
대단한 명쾌한 비유를 동원했는데 그 율법을 수여 받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회중이 볼 수 없을 정도로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났다고 전승하는 출애굽기 말씀을 소개합니다.
그 빛이 너무나 부셔서 모세 스스로가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고 할 정도로 빛이 났음을 출애굽기 34:33-35절은 보고합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무슨 말입니까?
율법의 조문에 얽힌 직분자도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당사자가 바로 모세였다는 말입니다.
이 구절이 주는 영적 교훈 즉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는 메시지가 담고 있는 내용은 다음 주일 볼 텍스트가 더 상세히 말하고 있기에 일주일 뒤에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모세에게 나타났던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던 영광은 율법의 영광인데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 있다는 점을 밝힌 것입니다.
본문 8절을 읽겠습니다.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렇습니다.
율법 조문의 직분에 나타나는 영광보다 더 빛이 나는 영광이 있다는 말인데 바로 영의 직분에서 나타나는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평행 법칙으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중요한 교훈을 새기기 위해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9-11절을 연이어 보겠습니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우리는 바울과는 2,000년이라는 시간의 갭이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또 그때로부터 약 1,300년(출애굽 시기를 구약학자들은 라암셋 2세 때인 주전 1290-1280년을 추측한다.) 이라는 시간의 갭이 있는 모세 사건과 연결하여 이해를 해야 합니다.
결국 저와 여러분은 짧게는 2,000년 길게는 3,300년이라는 시간과 무대의 이질감을 극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기에 무척이나 본문이 어렵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산이기에 말입니다.
지금부터 저는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가능한 쉬운 표현으로 오늘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일부 적대자들에 의해서 사도권이 심대하게 도전받는 일이 있었음을 지난 설교를 통해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사도권을 시비하던 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대변해 주는 문서 즉 추천서를 가지고 바울을 공격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유대 율법적인 사상이 아주 농후한 자들이다 보니 바울은 그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도적인 권위에 대한 항변과 변론을 위해 자료로 삼은 것이 바로 역설적으로 바울이 더 세밀하게 알고 있는 구약 성경의 권위였다는 점은 바울의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바울이 들고 나온 것이 바로 모세의 율법 수여 사건과 시내 산 관련 금송아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야 반대자들뿐만 아니라 경계선에 있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도권의 권위를 분명히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요(要)가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인들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율법이라는 멍에에 함몰되지 말하는 권고이자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어디에서 이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까?
‘더욱 더’ 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율법 조문의 영광보다 ‘더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직분의 영광입니다.(8절)
정죄의 직분보다 더욱 더 중요한 직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의롭게 하시는 직분입니다.(9절)
없어질 영광보다 더욱 더 귀한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길이 있을 즉 영원히 남을 영광입니다.(11절)
그러면 궁금해집니다.
성령이 주시는 직분의 영광, 의롭게 하시는 직분의 영광, 길이 있을 영광이 도대체 누구와 관련되어 있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바울의 사도권과 관련하여 답을 제시합니다.
이 세 가지의 특별한 영광을 주시면서 바울을 이방의 사도로 삼으신 분입니다.
누굽니까?
※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지난 성령강림주일에 하나님의 영 즉 성령께서는 전인격적으로 역사하는 영이심을 살폈습니다.
그 성령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만족할 만한 새 언약을 주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던 본문 6절을 복습해 보십시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새 언약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문자적으로 말하면 NEW TESTAMENT 즉 신약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주어진 새 언약이 무엇입니까?
우리기 지금 보고 있는 신약성서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주후 55년경에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는 마가복음(주후 약 59년 즈음)도 존재하지 않았는데 무슨 신약 성경이 존재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바울이 그토록 강하게 역설하는 새 언약이 무엇이겠습니까?
모세가 받은 율법입니까?
바울은 대단히 도전적인 용어를 사용합니다.
“율법의 조문은 사람을 죽이고, 정죄하는 것이다.”
유대 율법주의자들 즉 바울의 반대자들에게 강력한 카운터펀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조문, 정죄하는 조문은 경우에 따라 영광을 나타내기도 했다고 두둔합니다.
율법의 한시적인 필요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한시적인 그리고 제한적인 율법에 매이지 말고 더욱 더 귀한 영광에 주목하라고 주문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이라고 했고, 의롭게 하시는 영광이라고도 했으며, 이 길이 남을 영광은 새 언약을 통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새 언약의 당사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주체이십니다.
새 언약의 주체이신 예수께서 바울을 직접 이방의 사도로 세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도행전 9:15)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세인교회 성도들이 더 더욱 추구해야 하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영광의 주체가 누구인가? 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 세인 지체들이 주목해야 하는 의롭게 하시는 영광의 주체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 세인 지체들이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영원히 함께 있을 영광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젠가 성경을 읽다가 가슴 치며 아파했던 한 구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마가복음 13:1절입니다.
비장한 마음으로 묵상하십시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당신이 강도의 굴혈로 변질되어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시며 청결하게 하신 헤롯 성전을 나가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기득권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율법을 포장삼아 부를 일삼고 하나님의 나라와는 전혀 상반되는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과의 치열한 영적 싸움에서 한판승을 거두신 주님은 성전을 떠나시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드디어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주님은 헤롯 성전을 떠나 동쪽에 있는 문을 통과하셔서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셔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 주님이 영적으로 항상 승리하셨던 감람산(올리브산)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마가복음 13:1절은 바로 예수께서 그 성전을 나가실 때 있었던 일을 아주 간단하지만 마가복음 기자가 놓치지 않고 기록한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때 성전을 나가신 후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다시는 성전으로 들어가시지 않습니다.
이 구절 다음에 나오는 마가의 기록을 담으십시다.
마가복음 13: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기가 막힌 마가의 필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가신 교회, 제 아무리 휘황찬란한 위용을 뽐내는 건물이라도 그것은 무너진 돌들이 나 뒹구는 영적 폐허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를 예수의 사람으로 견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작가 유시민 씨가 로마를 여행하고 쓴 유럽도시기행(1) 이라는 책을 보면 그가 경험했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합니다.
바티칸 박물관과 대성당을 관광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 데 관광객이 너무 많아 입장권을 구입하려고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그로 인해 다른 스케줄에 차질이 생겨 대단히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바로 그때 교황청 공인 가이드라는 사람이 일종의 팁을 더 주는 비용을 대가로 기다리지 않고 대성당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급하게 만들어 주어 얼떨결에 그 대열에 들어서서 시간을 허비 하지 않고 관광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글에서 고백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유 작가가 의도하여 만든 작품이 아니라 여행사의 오피스에서 관행처럼 바티칸 당국자 사이에 해온 소위 말해 급행 티켓이었다고 술회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너무 쪽(?)팔렸던 부분은 무신론자 유시민 씨가 이 일을 경험한 뒤 쓴 사족 때문이었습니다.
① 교황청 관광가이드와 여행사가 합작한 이 일이 분명하다면 교황청은 이런 일을 묵인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P,142)
② 이렇게 들어간 대성당은 적어도 내게는 신의 숨결이나, 예수의 고뇌를 감지하기에는 적합한 공간이 아니었다.(P,149)
돈 바꾸는 자들이 득실거리던 강도의 소굴, 장사하는 자들로 판을 깔고 있었던 헤롯 성전은 더 이상 만민이 기도하는 집 일리 없었고, 그로 인하여 주님은 그곳에 거하실 수 없었기에 성전에서 떠나가셨다고 마가의 보고와 저는 바티칸이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로 시선을 돌립시다.
오늘 정말로 우리 세인교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차고 넘치는 물질입니까?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몰려오는 급성장입니까?
아니면 다른 교회에서 줄 수 없는 우리만이 갖고 있는 엔터테인먼트식의 노하우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세인교회에 더욱 더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더욱 더 절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바울을 철저하게 사용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을 이방의 빛으로 사용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편지하는 서신에서 이렇게 감히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1: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나를 구원한 주의 십자가 그것을 믿으며 가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나 여전히 부족하나
나를 품으신 주의 그 사랑 그것을 믿으며 가네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예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