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성령강림주일의 의미2024-02-28 18:02
작성자 Level 10

2020년 5월 3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열두 번째 강해)

 

제목성령강림주일의 의미

본문고린도후서 3:4-6

 

서론)

 

몇 년 전에 대단히 진보적인 기독교교육학자인 故 문동환 박사가 쓴 예수냐 바울이냐라는 아주 도전적인 책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문 박사 자신이 대단히 급진적인 기독교교육학자라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책의 전반에서 그리고 있는 바울은 전통적인 복음주의 교회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울과는 아주 다른 색깔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책에서 밝힌 대략적인 문 목사의 지론은 바울이 말한 예수에게서는 갈릴리 중심적인 삶을 살면서 철저하게 낮은 자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정신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민중적이지 않고도리어 부르조아적인 해석을 기초로 했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문 목사는 이렇게 있는 자의 가정(길리기아 다소 지방에 거하던 로마의 시민권이라는 엄청난 혜택을 누리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바울은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기에 예수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자라고 평가절하 했습니다.

그러면서 문 박사는 적어도 제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바울 사도에 대한 이해를 글에 적어 놓았습니다.

바울의 신학은 삶의 경험에 바탕을 둔 진리가 아니라자신의 사고에 뿌리를 둔 관념에 불과하다.” (문동환, “예수냐 바울이냐”, 삼인,p,13.)

어떤 면에서 볼 때 이단적인 발언처럼 보이는 극단적인 평가가 충격적이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은 그의 생각 때문이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십자가의 신학과 이신칭의와 같은 대단히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의 정수는 예수가 다윗의 계보를 통해 나타날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자 메시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본 바울의 사상 때문에 만들어낸 관념이라는 문 박사의 해석이 근저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문 목사가 바라본 예수는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갈릴리 청년 예수의 삶갈리리 지역에 핍박을 받던 민중들을 위해 전 생애를 사셨던 역사적 예수가 진짜 우리가 그려야 하고따라야 할 예수인데 잘 사는 가정에서 태어난 바울은 그런 예수를 볼 수 없었기에 바울의 신학은 대단히 반 예수적인 신학이자 반민중적인 인물이 바울이라는 신학적 이해에서 나온 관념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진보적인 종교교육학자이니까 이러한 바울에 대한 해석을 문 박사 개인의 것으로 한정할 때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급진적인 바울 해석은 제가 아무리 신학의 지평과 보폭은 넓혀야 발전한다는 생각을 하고 찬성을 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의 주장에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다시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 목사의 이해와 해석은 너무 편향된 해석이라는 신학적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좁힌다면 한 쪽 면만 보았지또 다른 한 편을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신학이 자신의 사고에 뿌리를 둔 관념 신학이라고 말한 부분을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강력한 반증은 바울의 신학의 기초가 관념이 아닌 인격적으로 역사하셨던 성령 하나님의 압도하심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성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령의 압도하심을 종교적인 신비주의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 하나님이 일하시는 역사적 실제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우리 교우들에게 미리 전제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압도하시며 행하시는 일하심이라는 개념의 이해를 쌍 팔 년도에 횡행했던 은사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반신학적인 무지한 부흥사들이 인용한 싸구려 성령 인식으로 몰고 가지 말라는 권면을 드리고 싶습니다.

신학교 후배가 대단히 통속적인 부흥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 교회에서 행했던 설교 중에 이런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번 집회 중에 틀니를 한 성도들썩은 충치를 갖고 있는 성도들의 이빨을 내가 다 뽑아주겠습니다집회가 끝날 때 즈음에 내가 그렇게 이빨을 뽑은 성도들의 자리에 금이빨이 나도록 해 주겠습니다.”

이런 쌍 팔 년도에 횡행시켰던 성령 팔이를 오늘 교우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담임목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성령의 압도적인 일하심은 대단히 적확한 성서적 성령 이해와 지성적 신학에 근거한 성령의 이해임을 전제합니다.

이 일하심을 제가 좋아하는 단어로 바꾸어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과 살펴볼 바울 사역의 면면에 흐르는 성령의 일하심은 철저하게 전인격적이며통전적인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본론)

 

예수 전도단 대표로 사역했던 홍성건 목사는 그가 쓴 글에서 이런 갈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성령은 인격이십니다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성령을 단지 감화를 주는 어떤 감정적인 힘이나 능력으로만 이해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붙잡아 이용하려는 태도를 가지려 할 것입니다그러나 성령을 인격자로 안다면 어떻게 하면 성령께서 나를 붙잡으셔서 나를 사용하실 수 있게 하실 것인가 궁리하게 될 것입니다.” (홍성건,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 예수전도단,p,12.)

저는 홍 목사의 이 지적이 우리 한국교회와 세인교회의 교우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체적으로 한국교회는 전자(성령을 인위적으로 붙잡아 이용하려는 행태)의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후자(성령께 붙들려 성령의 도구로 사용되려는 삶)를 선택한 교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한국교회가 대사회적인 지탄을 받은 이유 중에 하나가 전자와 같은 비신학적인 성령 이해였음을 깨닫고 그래도 오늘의 많은 젊은 후배 목회자들이 후자로 성령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마땅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을 이용하여 나의 무언가를 이루려는 극히 세속적인 방향에서 돌이켜 인격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 내가 철저하게 붙들려 그 분이 나를 사용하시는 은혜를 추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먼저 산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왜 그렇게 봅니까?

바울의 삶의 전 영역에는 성령의 통전적인 일하심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저는 지난 설교들을 통해서 2:14-7:4절까지가 바울이 고린도교회 적대자들에게 변론하는 사도권 변론 글이라고 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바울을 공격하는 자들이 들고 나온 것이 당시 물리적인 효력과 힘을 지탱해주는 추천서와 같은 공문(에피스톨레)이었던 반면바울은 전혀 그런 류의 동등한 그 어떤 것들을 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도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신이 사도임을 천명한 강력한 근거가 무엇이었습니까?

지난 주일에 살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주시고 산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이 가장 강력한 바울의 사도됨을 증언해 주는 추천서이자 공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강력한 사도됨의 권위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합니다.

본문 4절을 읽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이 사도임을 증언해주는 추천서 즉 공문이라고 천명한 구체적인 근거를 이렇게 힘차게 말합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 번역으로 본문 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우리(바울과 디모데)는 이것을 전적으로 확신합니다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친히 쓰신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추천서입니다.”

여러분을 예수께서 쓰셨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자신감이며 영적 자존감입니까?

바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본문 5절을 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이 부분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추천서를 쓸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하나님만이 그러한 추천서를 쓰실 수 있습니다그분의 추천서가 우리에게 권한을 주어우리가 이렇게 새로운 행동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생각해낸 자신의 사도됨을 인정하게 해 준 강력한 도구인 추천서를 고린도교회 지체들인데 그렇게 생각하게 해 준 영적 동력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해에 대하여 반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너무 명확하게 선명한 바울의 입장 표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주목할 것은 정작 다른 데에 있습니다.

바울에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사도됨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근거임을 제시할 수 있었던 역동이 본문 마지막 절인 6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엄청난 선언입니다.

재 강조하지만 바울의 적대자들이 보란 듯이 손에 들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한 (半半)의 율법적 그리스도인들이 써준 추천서였습니다.

이 율법적인 추천서는 어떤 면으로 볼 때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고린도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의 표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 바울은 찬물을 끼얹습니다.

바울은 율법 조문이라고 표현한 그 추천서는 글자로 기록된 조문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이 위험한 이유가 그 추천서는 사람을 죽이는 도구라고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반면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사도로서 사역을 하게 해 주신 추천의 역동은 문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을 사용하셨던 하나님과 그리고 궁극적으로 앞서 바울에게 일하셨던 성령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결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의 결과가 바울을 사도로 일하게 하신 신학적 근거라는 것입니다.

이제 페리코레시스라는 단어를 설명해야겠습니다.

목회자들에게 잘 알려진 신약학자 중에 한 명이 노던 칼리지(Northern College)의 스캇 맥나이트 교수가 쓴 배제의 시대포용의 은혜를 읽다가 밑줄을 그은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 단어는 둘레를 의미하는 페리’(peri)’ 라는 단어와 주위를 뱅뱅 돌며 춤을 추다의 의미인 코레시스’(choresis)가 합쳐진 합성어라고 설명합니다.

맥나이트 교수는 이 점을 감안하여 페리코레시스를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부연했습니다.

“‘창조라는 카이로스의 위대한 사건을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역으로 전제할 때 역사의 현장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상호 침투하고 상호 내재하는 협력으로 이루신 쾌거가 바로 창조 사건이다.”(스캇 맥나이트, “Embracing Grace”,아바서원, p,55.)

저는 같은 의미에서 바울을 사도로 사용하신 것은 성 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의 결과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이 해석이 왜 중요합니까?

성부와 성자께서 독단적으로 바울을 사도로 임명하여 일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령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페리코레시스라는 일하심의 결과물이 바울을 사도되게 하셨다는 해석이 담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령 하나님은 너무나 당연히 바울에게도 압도하시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바울을 사도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우들이 2020년 성령강림주일에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 인격적이지 않은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종교적이라도 성령과 전혀 관련이 없음을 분명히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격이라는 단어를 쓸 때 세 가지가 종합적으로 조화를 이룰 때만 사용합니다.

너무나 잘 아는 지정의의 조화입니다.

성령 하나님께 갖고 계신 인격의 세 가지 속성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① 지성입니다.

고린도전서 2:11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저는 이 구절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성령 하나님은 언제나 생각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당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입장에서 생각해주십니다.

지성적으로 일하시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입니다.

② 정적인 감성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로마서 8:26절을 나누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번역되어 있는 스테낙모이스 알라레토이스를 문자적으로 직역을 하면 땅을 치며 깊은 한 숨을 내뱉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누가 땅을 칠 정도로 안타까워하신다는 것입니까?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이렇게 감성적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성령님의 압권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살피신다고 까지 바울은 역설합니다.

로마서 8:2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성령은 언제나 생각하시는 감성의 영이십니다.

③ 올바른 것에 뜻을 굽히지 않는 의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2:11절을 묵상하십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성령 하나님은 우유부단하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좌고우면하지 않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언제나 분명하신 당신의 뜻을 갖고 관철하십니다.

특별히 죄에 대하여는 단호한 당신의 의지를 표명하십니다.

이 세 가지를 갖고 계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기에 성령 하나님은 일하실 때 언제나 이 속성을 발휘하시면서 일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성령 하나님은 언제나 인격이 통하는 시공간에 거하시며 일하신다는 점입니다.

저는 사도행전 10장 전반에 기록된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기사에서 큰 감동을 받곤 합니다.

사도행전 10:44절을 소개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 말이 무엇입니까?

고넬료의 가정에 모여 있던 식솔에게 주의 말씀을 갖고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 일어난 현상을 누가가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읽을 때언제나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교훈에 국한하는 누를 범합니다.

그러나 이 기사를 통해 얻어야하는 큰 감동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욥바에서 엄청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던 베드로는 욥바까지 찾아온 고넬료 식솔들의 심방 요청을 받고 가이사랴로 출발하여 고넬료의 집에 도착합니다.

베드로를 만난 고넬료가 먼 길을 찾아준 베드로를 맞이하면서 예의를 갖추며 보인 반응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행 10:25)

그러자 베드로가 즉시 고넬료에게 보인 반응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행 10:26)

베드로와 고넬료 사이에 있었던 인격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이 두 사람의 인격적 관계에서 나타났던 백미는 인격적으로 일하시는 성령의 강림이었습니다.

대단한 감동입니다.

인격적이지 않은 행위가 아무리 종교적이라도 거기에는 성령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하시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인 장소에 임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2주 전제가 섬기던 진해 교회에서 충성하고 있는 지인 권사께서 남편을 하나님의 나라에 파송했습니다.

권사님의 남편은 하나님의 교회를 너무 아름답게 섬겼던 성도였고제가 시무할 때 그 분에게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지금 진해 교회의 담임목사님에게 목회적인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사별한 권사님께 다음과 같은 위로 전문을 SNS를 통해 보냈습니다.

당신이 살아가면서 무언가 잃어갈 것들에 대해 정녕 두려운가하지만 우리네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반복 속에결국 완성되어가는 것이다그러니 상실이란 모두가 끝났다의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의 증거가 된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상실 수업” 인빅투스 간,p,287.)

권사님약 2년 전에 섬기는 교회에서 이별해야 했던 집사님들을 암으로 잃고 무척이나 힘들어 했을 때 손에 잡고 읽었던 책에 나오는 글 때문에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먼저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집사님의 영혼 위에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새벽에 중보 했습니다제일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수고하셨다고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원거리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권사님의 애씀과 애틋한 마음 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말씀으로 하늘의 위로를 전해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그리고 장례 일정이 완전히 끝나고 조금은 쉬십시오집사님과 삶속에서 진하게 자국 되어 있는 곳곳그리고 시간을 되새길 때마다 많이 힘드시겠지만 믿음 안에서 잘 이기실 줄로 믿고 기도로 돕겠습니다집사님의 소천에 대하여 깊은 애도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입성에 대해 축하드립니다.”

사랑하는 세인성결교회 지체 여러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인격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인격적 나눔은 사람이 지켜야하는 기본행실이라기보다는 최고의 행위여야 합니다.

이런 관계가 지속될 때 관계를 맺고 있는 서로의 관계는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하물며 성도가 따르는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큰 감동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인격적으로 알고 진정성이 있는 관계를 맺을 때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수 있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께서도 저와 여러분의 삶의 영역에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전부를 알고 계시기에 인격적으로 응원하십니다.

그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바라기는 성령강림주일에 나는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의 일하심이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압도적으로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강림주일에 주시는 의미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모든 민족에게

모든 민족에게 주 성령 부어주소서 하나님의 백성 주의 말씀 주시고

꿈과 환상 주사 주의 비밀 알리소서

우리 믿사오니 하늘이 주의 날 선포케 하소서

그 날엔 주의 영이 임하여 큰 부흥 이 땅 위에 일어나리라

모든 영혼 깨어 일어날 때 주 예수를 부르는 자는 구원되리

모든 열방에게 주 성령 부어주소서 영광중에 오사 주 경외하게 하시고

크신 능력으로 땅과 하늘 흔드소서

주를 기다리니 만물이 주의 날을 보게 하소서

그 날엔 주의 영이 임하여 큰 부흥 이 땅 위에 일어나리라

모든 영혼 깨어 일어날 때 주 예수를 부르는 자는 구원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