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열한 번째 강해) 제목: 잘 쓰고 있습니까? 본문: 고린도후서 3:1-3 서론) 파릇파릇 새싹은/푸른색이고/어여쁜 장미는/빨간색인데/우리 선생님 마음은 무슨 색일까?/수줍은 진달래빛/분홍색일까?/아니면 깨끗한 눈송이/하얀색일까?/아마도 졸졸졸/시냇물 같은/막은 색이겠지./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정직하게 마음으로 쓰는 글쓰기에 대하여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故 이오덕 선생의 글쓰기에 나오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의 시입니다. 선생은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의 이 시를 쓴 아이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소개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직하지 않은 글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평했습니다. “이런 것을 쓰면 우리 선생님이 반가워하시겠지 하여 듣기 좋고 재미있는 말로 지어 만든 것이다. 이렇게 무엇이든지 그 실상과는 달리 겉모양만 곱게 꾸며 보이는 글이 얼마나 많은가? 책에 실려 나오는 거의 모든 아이들의 글, 무슨 상을 탔다는 거의 모든 아이들의 글이 이런 거짓 글이라고 나는 본다.”(이오덕, “글쓰기”, pp,132-133.) 나는 이오덕 선생님의 지적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동의하는 이유를 그 분이 같은 책에서 밝힌 한 대목을 소개하는 것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머리로 쓴 글은 삶이 없는 글이다. 그러나 가슴으로 쓴 글은 정직한 글이다. 가슴으로 쓰는 글보다 더 한 걸음 나아가 손과 발로 쓰는 글이 되게 하면 더더욱 좋다. 손과 발로 쓰는 글에서 온몸으로 쓰는 글도 생각할 수 있다.” (위의 글,pp,101-102) 이와 같이 선생의 글을 한 가지 통으로 조망해 볼 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 삶이 가장 아름다운 글쓰기의 소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공식을 대입할 때 조금은 비약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없다는 점 말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보면 아름다운 사람의 글 즉 편지를 만나게 됩니다. 제가 바울의 편지를 아름다운 사람의 글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오덕 선생이 말했던 것에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주인공이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네 번째 편지의 3장을 오늘부터 공부해 보십시다. 2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은 우리(바울과 디모데)들의 편지입니다. 왜 이렇게 닭살이 돋는 듯한 발언을 바울이 했을까요? 그 이유는 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이 구절을 주석한다면 이렇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이 두 번째 편지를 쓴 뒤, 고린도에 직접 방문하였을 때 그는 적대자들에게 적지 않은 수모를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수모를 당한 내용 중에 하나는 바울의 사도권이었음을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바울의 아킬레스건과 같은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리며 바울을 공격했던 자들은 본인들이 바울과 다른 권위를 내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추천서’였습니다. 주후 1세기에는 사람들이 어떤 다른 도시를 여행할 때, 반드시 지참한 것이 있었는데 1절에 기록된 ‘추천서’였습니다. 이 추천서에 대한 설명은 주석적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 즈음에서 고린도교회에 존재했던 바울의 적대자들의 정체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우리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심각한 내홍을 만나게 됩니다. 소위 말하는 구제 사역으로 인해 발생된 내홍입니다. 사도행전 6:1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초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는 믿는 자의 수가 많아졌음을 알려줍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설교를 할 때 3,000명씩이 회심할 정도였으니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조직과 행정적인 구조 부분에서 성숙하지 못했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적지 않은 리더십의 부재를 보이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구제 사역의 실패였습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예루살렘 지역 공동체 교회의 실권은 유대 출신 성분을 갖고 있었던 히브리 출신의 사도들이 갖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구제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당시에 적지 않은 헬라적인 출신 성분을 갖고 있었던 그리스도 공동체(예루살렘에 정착하여 살던 헬라 출신의 이방인들 중에 예수를 영접하여 교회 공동체에 들어온 자) 출신의 과부들을 배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심각한 교회의 파당이 생기는 내홍에 빠지게 된 일을 누가는 사도행전 6:1절에서 보고합니다. 물론 이 내홍은 예루살렘 교회의 실권을 갖고 있었던 히브리적인 출신 성분의 제자들이 성령 충만한 헬라적인 출신성분의 집사들을 세워 그들에게 행정적인 사역의 업무를 분할함으로 일단락이 되었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초대 교회(전 이방교회를 포함함)의 모교회적인 개념을 갖고 있는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항상 유대적인 색채가 분명한 율법주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들이었음을 서신서 곳곳에서 암시합니다. 고린도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자들 중에 바울의 적대자들은 갈라디아교회에서도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초래했던 율법주의적인 기독교신앙을 갖고 있었던 유대적인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들은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던 야고보와 베드로의 이름을 빙자하며 자신들이 갖고 있는 추천서의 권위를 갖고 바울을 압박하여 옥죄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하여 바울은 기득권 세력이 발행했던 그 어떤 추천서가 없었기에 상대적으로 권위를 내세움에 있어서 초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외양적인 조건으로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9: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여기에 나오는 ‘공문’(에피스톨레)의 원 의미는 편지 혹은 서신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문서화되어 있는 행정적인 서류입니다. 신약학자 행첸은 이 공문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시몬에게 부여했던 권한을 일반화시켜 어느 낯선 곳으로부터라도 산헤드린 공회가 디아스포라 공동체까지 재판할 수 있다는 권리를 갖도록 한 서류였다.”(헹첸, “사도행전”, 국제성서주석 33,p,476.) 바울은 이미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척결하러 갈 때 그가 가지고 갔던 대제사장으로부터 위임받은 서류는 본문에 등장하는 추천서보다 더 강력한 물리적 서류였음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서류가 주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얼마나 헛헛한 것이며 의미 없는 종잇조각에 불과한지를 뼈저리게 경험한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바울을 배격하는 자들이 시비를 걸고 있는 추천서에 대한 시비에 대하여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이렇게 공격적 발언으로 수비합니다. 본문 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엄청난 파워를 지닌 선포였습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여기에 나오는 단어 '편지'가 앞서 언급한 사도행전 9:2절에서 바울이 다메섹에 가지고 간 공문 즉 ‘에피스톨레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무엇이 담긴 선언입니까? 바울의 적대자들이 갖고 있는 추천서는 교회 공동체를 살리는 도구가 아니라는 직설입니다. 반대로 고린도 교회를 살리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바로 고린도교회를 이루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강력한 교회론의 선포였습니다. 바울의 목회신학의 정점은 조직이나 건물이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를 이루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장 중요한 교회를 이루는 기초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적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 써야 하는 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잘 써야 하는 편지를 이렇게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간다는 것이 적어도 바울에게는 이런 것이었음을 본문 3절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먹으로 편지를 쓰는 것과 같은 형식이나 방법론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도구 삼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 외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하여 오늘 주일 설교의 은혜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우들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 우리들이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일하심을 제일의 사역 내용으로 삼아야 합니다.
본문 3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을 잘 써진 편지로 만들기 위해 먹을 이용하여 썼다고 진단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바울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갈파를 남겼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썼다.’ 이 얼마나 엄청난 영적 혜안입니까? 우리는 이미 살펴본 고린도전서 그러니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를 공부할 때 가슴에 담았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16-17절입니다. “너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 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만들어 가는데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배제된다는 것이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로 이끌어 가는데 성령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는 이끄심이 과연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세 달 여 동안 온라인 교회를 이끌면서 맨 처음에는 이런 상태를 만든 일체의 상황들에 대하여 매우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지? 해서 제반적인 이렇게까지 만든 인간의 악의 구조에 대하여 대단히 혐오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지고 편리해진 교우들의 면면을 보면서 속이 상했습니다. 자기들이 할 일은 다하면서, 갈 데는 다 가면서 가장 적극적인 방역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의 오프라인 예배를 꺼려하는 자들을 보면서 과연 저들이 구원은 받은 자들인가! 싶어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화가 난 대상이 바뀌었습니다. 바로 저였습니다., 서재에서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 시편 92:5-6절을 읽다가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나는 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지? 나는 왜 그 분의 생각이 매우 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 그렇구나, 내가 어리석은 자고 무지한 자였구나! 깨닫고 가슴 아파하며 회개하며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며 자백하였습니다. 그렇게 막 회개의 간구를 드리고 눈을 떴는데 소스라치게 만드는 전화가 폰에 울렸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지체 한 분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목사님, 지금 제 처소에서 막 기도했습니다. 기도 중에 목사님을 위해 오늘은 조금은 더 세밀하게 중보 했습니다. 그렇게 성령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위해 중보 하라는 강력한 이끄심이 있어서 조금 더 민감하게 기도했습니다. 목사님, 별일 없으시죠?” 순간, 영적으로 한 방 맞은 것 같아 멍했지만 전율하는 감동과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 지인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제게 왜 별일이 없습니까? 너무 많은 별일이 있어서 미친 듯이 괴로웠는데 그 날 저는 다시 한 번 강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그 동안 힘들었던 것은 코로나 19의 제반적인 상황도 아니요, 성도들의 무기력한 안일주의도 아니요, 성령의 일하심을 인정하지 않고 내 힘으로 일하려 했던 성령님의 배제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절박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가 되라.” (데이빗 플랫, “복음이 울다.”,p,304) 데이빗 플랫 목사 네팔 선교지에서 울면서 쓴 ‘복음이 울다’에 기록한 벼락과 천둥을 동반한 외침입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교회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절박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절박한 교회의 상황에서 지금 우리 세인교회도 결코 예외일 수 없고 또 예외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령의 역동이 강력하게 일어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도, 성도도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을 배제하거나 차선으로 밀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성령의 역동적인 일하심은 우선입니다. 이선이 아니라 일선이어야 합니다. 이 영적 공식이 흔들리지 않아야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편지라는 영적 자존감을 갖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명심하십시다. 성령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를 만들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 민감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주보에 실린 목양터 이야기 마당은 지면의 제한 때문에 제가 쓴 글 전부를 다 싣지 못했습니다. 해서 전체의 글을 교우들에게 읽어드림으로 설교를 마감하겠습니다. ‘성결’(Holiness)이라는 이름을 다시 새기면서 “대한기독교 나사렛성결회는 전 세계 156개국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국제적인 교단으로서 감리교 선구자인 요한 웨슬레의 성결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성결교단입니다. 대한기독교 나사렛성결교회의 최우선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성결을 전파하고 보존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있습니다.”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총회 홈페이지에 링크되어 있는 교단 정체성을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읽다가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어줍지 않은 신학생시절, 절대예정론에 대하여 적지 않은 비평적 성찰을 하던 제게 소낙비가 같이 시원하게 신학적 대안의 통찰을 주었던 ‘웨슬레 신학’이라는 이름을 다시 만났고, 무엇보다도 11년 만에 잠재적으로 마음에만 간직했던 성결교회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어서였습니다. 제가 ‘성결’이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갖는 이유는 ‘성결교회’라는 표제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의 신학적 무게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성결’은 제 신학의 결정판이라는 또 다른 측면이기 때문입니다. 신학대학교를 다니면서 교단 신학의 전도표제인 소위 말하는 사중복음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배웠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 평신도 시절에는 ‘중생’(거듭남)의 의미에 대단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신학에 대하여 전혀 문외한이었던 저는 고향 교회를 섬길 때 담임목사께서 중생(거듭남)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가르쳤던 그 학습에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신학생이 된 이후, 중생(거듭남)이라는 것은 신앙의 문으로 진입하는 첫걸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언제나 영적으로 버걱 대던 저의 갈급함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성결’의 신학적 의미를 알면서 열광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기에 제게 있어서 ‘성결’은 교단의 이름이라는 자부심보다 앞서 ‘성결하게 살기’에 더 천착하게 만들었던 신학하기의 동기부여였습니다. 성결교회 전도사 2년, 목사로 18년 그렇게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역했습니다. 그러다가 타의에 의해 11년이라는 시간동안 저는 ‘성결’이라는 이름은 가슴에만 간직하고 성결에 대한 교리적인 강조는 숨고르기를 했습니다. 혹시나 모를 ‘성결’이라는 이름을 도용했다는 시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성결이라는 이름은 조심해야 할 단어가 되었기에 사역은 현장에서 신학적 방향성으로 ‘성결’을 설정할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의 지난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이 아픔을 인지하신 주님은 그리고 이제, 또 다시 남은 10년이라는 마지막 목회의 필드에서 종에게 ‘성결’이라는 이름을 되찾게 하셨고, 수면 밑에 숨겨져 있었던 ‘성결’이라는 단어를 다시 목회 사역의 무대 위에 올리게 해주시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해서 ‘성결하기’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에 제천세인교회라는 이름으로 11년간 달려왔던 교회 외벽에 교단 이름을 삽입한 교회이름이 새겨집니다. 교회 홈페이지도 교회 소개 콘텐츠에 성결교회 이름을 덧붙인 글로 이미 개편했습니다. 적당한 시간에 교회 주보도 독립교회 연합회 제천세인교회에서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제천세인교회로 갱신될 것입니다. 교회 봉고 차량 마크도 성결교회의 이름을 되찾고 달릴 것입니다. 일련의 이런 일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교회가 대한기독교나사렛 성결교회로 가입하게 된 자연스러운 행정적인 변환의 일환입니다. 여기까지는 긍정의 멘트입니다. 그러나 이런 변환에 즈음하여 세인지체들에게 당부 드리고 싶은 담임목사의 소회는 부담스럽습니다. “제천세인교회가 제천세인성결교회가 되는 결정적인 요소는 행정적인 이름의 변화가 아닌 세인지체들이 성결하게 사는 삶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이 삶을 살아내지 않으면 제천세인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결교회일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에 속한 성결교회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성결교회에 소속된 성도라 하더라도 주님이 살아내셨던 성결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결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세인교회의 지체들이 성결교단에 속해 있는 이름뿐인 성결인들이 아니라 주군이 요구하시는 성결한 삶을 반드시 살아내는 진정한 성결인들이 되기를 저는 두 손 모아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절절하게 필요한 하나님의 사람은 성결교회에 속한 성결인이 아니라 성결한 삶을 살아내는 성결인들입니다. 사랑하는 세인성결교회 지체 여러분! 성결한 성도는 성령의 역사하시는 것을 제일의 우선순위로 삼는 성도입니다. 성결교회는 성령의 역동적인 일하심을 제일의 우선순위로 삼는 교회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성결교회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의도하신 편지들인 성결한 그리스도인들이 차고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우리 세인성결교회가 성령이 가장 자유자재로 역사하시는 도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기 위해 매일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 판에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기록하는 철저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따스한 성령님 마음으로 보네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만족함을 느끼네 사랑과 진리의 한 줄기 빛보네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그 사랑을 느끼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 곳에서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