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금요일 성서일과 묵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45:8-9, 14-21, 이사야 51:17-23, 로마서 9:6-13, 시편 17:1-7, 15 이사야 41:8-10 꽃물 (말씀 새기기) 이사야 51:17, 22 이사야 51:17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이사야 51:22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마중물 (말씀 묵상)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주님 날 먼저 안으시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사랑하시는/내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모든 걸 덮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안아주시는/내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라 부르죠 가끔 부르는 복음성가에 담겨 있는 가사다. 복음성가는 유행의 때가 지나면 금방 식어지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가끔은 가사에 울먹일 때가 있다. 이 접속사가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낳고 온갖 정성을 다해 애지중지 키우고, 장성시켜 출가시키고 나니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목이 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이렇게 키우셨겠지, 부모님이 이 마음이셨겠지, 그래 엄마가 그랬었지, 아버지의 마음이 그때 어떠하셨을까? 이렇게 마음 졸임을 얼마나 하셨을까? 등등을 반추하다보니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 이론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물밀듯 스며든다. 언제나 먼저 안아주셨다. 나는 그걸 몰랐다. 미련하리만큼 알면서도 모든 걸 덮어주셨다. 나는 당연한줄 알았다. 그렇게 사랑하셨다. 나는 그게 부모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라고 당연시 여겼다. 그걸 지금에야 뼈저리게 깨닫다니 유구무언이다. 유다가 자행한 비틀거림의 온갖 랜덤의 일상을 야훼께서 그냥 당하셨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제 2 이사야는 오늘 성서일과에서 그 아픔을 당하셨던 주님의 궁극적 반응을 이렇게 일갈했다. 비틀거림의 온갖 잔을 다 비워버린 랜덤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그 잔을 치우신 분이 야훼라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유다가 나였다. 아니, 유다보다 더 심한 존재가 나다. 그런데 야훼는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오셔서 안아주셨다. 덮으셨다. 사랑하셨다. 심지어 너무 망가져서 주님 앞에 감히 나아올 수 없는 상태까지 무시하시고 오셨다. 뭐 하나, 손톱만큼이라도 내세워 항거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나를 안아주셨다. 로렌 커닝햄이 고백했던 절규를 나도 오늘은 토로해 본다. 하나님,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죠? 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 두레박 (질문) 꼼짝하지 못하게 사랑이라는 동아줄로 나를 묶으신 이유가 뭐죠? 하나님,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지요? 손 우물 (한 줄 기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랑의 하나님, 당신께 포로 됨에 감사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이심에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에 보답할 수 없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다만 주님께 떨리는 불온함을 상실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하느님께서는 행복에 겨워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과 사람의 고통 중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갈파한 이 통쾌한 통찰을 오늘 내 심비에 새기며 주님의 이 眞意를 실천하며 살아보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야훼 하나님, 아픈 자들이 삼복의 무더위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아픈 자들과 함께 하셨던 주님, 저들의 현장에 미리 가셔서 저들을 안아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