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1일 월요일 성서일과 묵상
성결, 성결하지 말아야지.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19:121-128, 열왕기상 3:16-28, 야고보서 3:13-18, 시편 65:8-13
창세기 30:25-36
꽃물 (말씀 새기기)
야고보서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마중물 (말씀 묵상)
무시무시하다. 야고보를 통해 제시된 단어들이 그렇다.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 편견, 거짓 등등의 단어들이 열거되었다. 이 단어들의 전제는 위로부터 난 지혜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구절 묵상 중에 성큼 다가온 것이 ‘첫째’라는 단어였다. 야고보 기자가 그것이 성결이라고 명명했다. 나는 성결교회에서 자랐고, 성결교회에서 양육 받았고, 성결교 산하 신학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성결교회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나사렛 성결교회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내 인생에서 ‘성결’이라는 단어는 영적인 젖줄과 같다.
어떤 의미에서 내 인생은 ‘성결’이라는 단어와 함께 했던 인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벽증이라고 말해도 괜찮은 모 교단에서 마치 성경의 원본처럼 떠 받드는 KJV 는 이 단어를 ‘purity’로 번역했다. 문자적인 의미로 그 뜻을 접근하자니 낯 뜨거워진다.
이 단어에 가장 근접한 메타포를 하나 언급하라고 하면 ‘아침이슬’을 예로 들고 싶다. 대학 학부 시절, 마음 놓고 부를 수 없었던 노래를 저항하는 마음으로 목청 높여 불렀던 노랫말이 있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진주보다 더 고운 것이 아침 이슬이란다. 아침 이슬을 예로 들었지만 불가피한 일이었고, 어찌 ‘성결’을 아침이슬 정도로 표현할 수 있으랴. 이 땅에 존재하는 언어로 그렇게 표현했지만, ‘성결’이라는 단어의 설명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성서일과는 성결을 위로부터 주어진 지혜의 가장 우선순위로 제정했다.
나는 성결한 목사로 살았는가? 를 반추하면 얼굴을 들 수 없는 송구함과 죄송함이 밀려온다. 더더군다나 성결교회 목사로 나는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를 물으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갈 태세다.
그래서 그럴까, 건방지게 성결, 성결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다가 귀천하는 것이 더 정직한 것 같다. 7월을 마감하는 오늘 아침, 묵상을 통해 다가온 이 구절이감사하기도 하지만 뼈아픈 회한으로 나를 타격한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두레박 (질문)
수없이 성결을 외쳤다. 그런데 나는 성결한 목사, 아니 성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하나님의 마음, 생각을 닮는 것이 성결인 줄 압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삶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긍휼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주옵소. 주님, 긍휼이 여겨 주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8월을 앞두고 있다. 언제나 성결한 삶이 저 멀리 있지만, 포기하지 말자. 치열하자. 또 일어나 보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