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송호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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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이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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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3-05-08 17:2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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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의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도서출판 이와우 간)를 읽고 우리 집에는/매일 나 홀로 있었지/아버지는 택시 드라이버/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양화대교/아침이면 머리맡에 놓인/별사탕에 라면 땅에/새벽마다 퇴근하신 아버지/주머니를 기다리던/어린 날의 나를 기억하네/엄마 아빠 두 누나/나는 막둥이, 귀염둥이/그 날의 나를 기억하네/기억하네/행복하자/우리 행복하자/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행복하자 행복하자/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내가 돈을 버네, 돈을 다 버네/엄마 백 원만 했었는데/우리 엄마 아빠, 또 강아지도/이젠 나를 바라보네/전화가 오네, 내 어머니네/뚜루루루 아들 잘 지내니/어디냐고 물어보는 말에/나 양화대교 양화대교/엄마 행복하자/아프지 말고 좀 아프지 말고/행복하자 행복하자/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그 때는 나 어릴 때는/아무것도 몰랐네/그 다리 위를 건너가는 기분을/어디시냐고 어디냐고/여쭤보면 아버지는 항상/양화대교, 양화대교/이제 나는 서있네 그 다리 위에/ ‘자이언티’ 가 대박을 터뜨린 우울한 (?) 시대 ‘자이언티’라는 예명을 가진 가수가 부른 ‘양화대교’라는 노래의 가사다. 그냥 평범한 것 같은 이 노래가 젊은이들에게 물론 예상치 못하게 중년들에게까지 인기를 얻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찾고 듣는 바람에 ‘자이언티’라는 가수는 가난한 시절을 토대로 한 이 노래의 음원 수입만으로도 억대의 수입을 올리는 그래서 요즈음 말로 대박을 터뜨렸다는 온라인상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이 노래는 대중가요의 장르상 비주류(?)에 속하는 그루브 음악이기에 대중적인 인기도는 상대적으로 불리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는 것은 음악 외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맞다. 서평자도 그리 생각하는 데 동의한다. 자이언티의 이 노래가 예상외의 선전을 한 것은 음악 자체의 몰입도나 대중성 때문이 아니라 ‘양화대교’라는 노랫말에 얽혀 있는 한국적 정서 때문인 듯 해 보인다. 이 노래는 가수의 실화를 소재로 만든 곡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이다.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작금의 택시 운전에 종사하는 분들을 결코 폄훼하려고 하는 것도 아님을 전제하면서도 세간이 회자되는 말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면 택시 운전은 막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택시 운전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에두르는 말일 것이다. 가수의 아버지가 바로 이 일에 종사했다. ‘자이언티’ 라는 가수의 연령이 1989년생이라는 데 그렇다면 우리나라 나이로 28세, 종합해 계산해 보면 택시 운전에 종사하는 그의 아버지는 약 50대 연배의 나이를 가늠하게 한다.
무슨 서평에 남의 가족사를 주민등록 조사하는 것처럼 하느냐고 타박할 독자도 있겠지만 이유가 있다. 50대의 연령이라면 그는 분명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에 일등공신의 역할을 한 베이비부머(p,55) 세대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가족계획정책이 시행된 1963년까지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윗세대 선배들처럼 보릿고개와 같은 심각한 가난을 경험한 시대는 아니었지만, 조국의 경제발전이라는 대의명분 앞에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각종 악조건 속에서도 장밋빛 미래를 바라보며 지극히 헌신하고 희생했던 세대임에는 틀림없다. 저자는 당시의 암울했던 기상도를 이렇게 논술했다. “두루 알다시피 당시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숨 가쁜 시간대였다. 일상생활의 리듬이 빨라졌고, 개인 공간과 사생활이 왜소하게 위축되었고, 형사와 정부보원들이 눈을 부릅뜨고 거리를 감시했고, 무장한 군인들은 거리에 자주 배치되었다. 정치가 국력 신장과 경제 성장을 내세워 개인의 자유를 속속 거둬들였다. 경제는 눈에 뜨게 나아졌지만, 소비외 이탈은 허락되지 않았다. 개성 창출과 나름의 취향은 일사분란한 질서 속으로 자취를 감춰야 했다. 베이비부머는 교복 세대였다. 자신의 몸과 취향, 언어들을 가진 색깔들은 교복에 감싸이고 대량 생산을 향한 극대화에 행진해야 했다. 가정의 의례준칙이 공표되어 부유층의 과소비 허례를 불법화했고, 직장과 학교에서는 군대식 구령에 맞추어 국민건강체조로 아침을 시작해야 했다. 학교와 기업을 포함하여 모든 기관에 훈육 담당 사복 군인이 배치되었다. 어딜 가나 큰 글자로 쓰인 증산, 수출, 건설 구호가 여행자와 행인들의 뇌리를 파고들었고, 어둡고 후미진 골목 담벼락 적힌 반공방첩이란 네 글자가 공산당에 대한 공포를 자아냈다. 고백하건데, 대학을 다녔던 필자도 그 시대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역사 발전이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를 잘 몰랐다.”(p,190) 저자가 이 글에 담은 내용 중에 맨 마지막 문장이 오롯이 서평자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어둡고 침침하고 살벌했던 시기에는 그 절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무감각했다는 말이. 왜 일까? 아마도 소 팔고, 땅 팔고, 집 팔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아들이 한 명 성공하면 집안이 핀다는 부모님들의 기대감이 베이비부머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그런 것을 생각할 만큼의 여유를 주지 않았을 것이고, 도리어 수동적으로 이념과 사상과 민주화는 있는 자들의 탄식 정도로 치부하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성석제가 ‘투명인간’ 에서 등장시킨 집안의 대들보 백수에게 걸었던 개운리 사람들처럼 말이다. 기실, 국가의 국민우둔화 정책은 정권 유지를 위한 금상첨화와 같은 미끼가 아닐 수 없다. 서평자도 이 기막힌 정책에 노예로 살았던 우민이었다. 십일 칠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군사 독재 시절, 조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일주일 두 번 분식을 먹는 것은 몸에 좋은 건강한 것이라는 말에 속아(?)0 애꿎은 분식을 우겨 넣었다. 학교 점심시간에 보리를 첨가했는지 검사 받으면서 나라에 애국하는 일은 잡곡을 섞어 먹는 일이라고 확신하여 더 많은 잡곡을 넣은 뒤에 나라 사랑에 자랑스러워했던 아이였다. “십일 칠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되듯이 남북 통일되지요.” 소위 말하는 유신 찬양가를 목청껏 소리 높여 부르며 유신 헌법이 마치 대한민국의 최고의 법인 줄 알고 달려왔던 어찌 보면 참 순진했던 그러나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무자비한 심리적 폭력을 당했던 아이였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북한과 싸워 이기는 유일한 애국으로 여겼기에 개인의 인권 유린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 충실한 국가관의 사람이었다. 이것이 어찌 서평자만의 소회이리요! 설상가상으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사회학에서 소위 말하는 낀 세대의 부류이기도 하다. 저자는 글에서 자신이 포함된 베이비부머들의 나쁜 버릇을 이렇게 지적했다.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다 해줘야 한다는 무모한 의무감이 있다. 어찌 보면 주제넘은 욕심이다.”(p,44) 낀 세대의 심리적, 정서적 비극이다. 서평자는 이것을 나쁜 버릇이라고 지적했지만 서평자도 주제넘은 욕심으로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다. 해서 저자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돌이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찌 보면 이미 학습된 자아관이 분명한 베이비부머들은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족쇄를 스스로 차기를 자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목양터도 베이비부머들에게는
이제 저자의 이야기가 아닌 서평자의 이야기로 잠시 넋두리를 해보자. 대한민국 현대사의 길목에서 가장 아픈 사건이 있었던 1980년에 그렇게도 원했던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영문학 교수가 되리라는 청운의 꿈을 안고 상아탑 입성에 성공했다. 그렇게 시작된 꿈에 부푼 대학 생활은 물안개처럼 곧 사라졌다. 4월이 되자 학교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것이다. 신군부의 정권 찬탈 시나리오의 서곡 때문이었다. 벌써 36년이 된 오래된 추억이지만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4월부터 9월 초까지, 기대했던 대학 1학년의 낭만은 그렇게 빼앗겼던 것을. 그래도 서평자의 아픔은 뒤돌아보면 애교 수준이었다. 그 해 봄의 자락에, 남녘에서는 국민이 나라를 지키라고 낸 돈을 가지고 이 땅의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정치군인들이 총부리를 돈 낸 국민에게 겨누어 피비린내를 진동하게 했던 참극이 일어났던 것에 비하면 말이다. 베이비부머의 상징적인 존재였던 1961년생 서평자의 청춘도 그렇게 시작이 우울했다. 그러나 이것은 베이비부머(1955년생-1963년생) 세대의 미래의 일상을 보여주는 서곡이라고나 할까. 치열한 입시 전쟁을 뚫고 대학 입성에 성공했지만 서평자는 신군부독재의 암울한 시기를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잠잠함이라는 비겁함을 택하고 그렇게 젊은 날을 소비했다. 신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나름 위로를 받던 서평자는 주군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한 뒤 신학대학교로 도피처를 옮겼다. 그러나 신학교에서조차도 돌을 던지며 데모를 하는 동기생들을 보면서 당시 극히 은혜로웠고(?) 보수적 관점을 갖고 있었던 서평자는 적지 않은 실망감을 갖고 군으로 도피처를 삼았다. 그 곳에서 숨 쉴 시간을 가졌지만 그것도 잠간, 군에서 제대를 한 뒤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로 거듭나 현장으로 파송(?)되었을 때의 끔찍함은 지금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일반 사회보다 더 치명적인 갑을의 관계로 형성된 교회 구조가 그랬다. 인간이 최소한으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경제적 보장을 사명이라는 이름에 헌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양 받아들이는 구조가 또 그랬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마땅한 도라고 부축이며 사역하게 하는 현실도 무서웠다. 기실, 일련의 구조적 모순들은 신앙의 모습으로 포장되었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 목회의 현장에서 생존과 싸워야 하는 현실 때문에 무너져 버린 목양의 거창한 삶이 베이비부머인 서평자에게는 현장에서 제일 먼저 직면한 자괴감이었다. 베이비부머의 사람들은 세속이나, 성직의 일을 감당하는 목양터나 별반 다름이 없이 그렇게 무조건적인 헌신과 희생을 강요당하는 세월을 견뎌왔는데 유감스러운 것은 목양의 현장에서 그런 삶은 26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현재진행중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한국교회의 저명한 모 목회자가 사회관계망 서비스에 올린 글을 보면서 왠지 서글퍼졌다. 그는 한국교회의 건강한 교회상을 만드는데 혁혁한 공이 있다고 여론에서 인정하는 목회의 선배이다. 그가 SNS 상에 올린 글의 내용은 본인이 섬기는 교회에는 정년 후, 원로 목사 제도가 없기에 현직에 있는 동안 사역을 마치고 나오는 교회에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저축을 하려고 한다는 내용이다. 목사가 말년에 추해지는 이유는 욕심 때문이기에 그런 욕심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은 임기동안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저축을 감당하여 교회에 누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서평자는 그 선배가 한국교회에 미친 지대한 선한 영향력에 박수를 보내는 후배이다. 더불어 그 선배가 태동시킨 바른 교회 아카데미라는 한국교회의 바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포럼에 태동 멤버이기도 하다. 이 말은 그 선배가 한국교회의 나아가야 항 방향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말한 목회자가 사역하는 동안에 최선을 다해 물질을 저축해야한다는 역설이 못내 안타깝고 씁쓸하다. 서평자 역시 목회를 하는 어간, 섬기는 교회에서 별반 물질적인 어려움이 없는 안정된 사역지에서일을 했던 목회자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환경에서 목회를 하게 된 것은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순전히 운(?)이 좋아서이다. 목회자가 이렇게 말하면 신령하지 못한 자가 되는 돌팔매질을 당해도 할 수 없다. 사실이니까. 한국교회의 상당수의 목회자들은 소위 말하는 성공(?)한 대형교회의 목회자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영성, 지성, 감성들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사회현상적인 체계로 인해, 혹은 자본주의의 아주 특정적인 상황에 의해 그냥 그렇게 어렵게 목회하며 생존을 걱정하고 있는 동역자들이 지천이다. 그들은 원로 목사가 되어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사역의 임기 중에 사례를 저축하여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회자의 일설이 다른 별이 이야기로 들릴 수 있는 아픔이 있는 동역자들이다. 그러기에 잘 나갔던(?) 선배의 말 한 마디에 그들은 또 다른 치명타라는 비수를 맞게 된 자들이다. 그들의 아픔은 싸매어주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그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언어 남발은 어떤 의미로 보면 무서운 폭력이다. 언어는 대중성이 있고, 선동적이라 더 조심해야 한다. 한 개그맨이 방송에서 퍼뜨린 유행어가 갑자기 생각났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갑자기 패러디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선배님, 여기서 이러시면 되겠습니까?” 몇 년 전, 한동대에서 언어학을 가르쳤던 언어학자인 윤상현 교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어 메모해 둔 글이 있었다. “나의 인식 너머, 나의 주관 바깥에 ‘없음’으로가 아니라 ‘있음’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객관의 실재들-내가 ‘있다.’고 선언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있음’으로 존재하고 그 존재를 인식한 개념이 ‘있다.’라는 언어로 표상되는 것이지, 설혹 내가 인식의 끈을 놓쳐버려 그만 ‘없다.’고 선언할지라도 그 존재는 나의 주관적 인식의 세계에서만 비존재일 뿐 사실은 엄연히 존재하는 소위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실제적 진실은 이 객관성에 대한 인식과 닿아 있는 것이다.” 서평자는 이 글을 읽으면서 라인홀드 니버의 글감이 떠올랐다. “단순한 도덕적 판단의 필연적 결과는 독선이다.”
베이비부머들은 세속이나, 교회 영역이나 상처가 많은 세대이기에 어떤 의미로 보면 같은 동질성을 갖고 달려가야 하는 연대감이 더 필요한 위로가 절실한 세대이다. 그것은 잘 나가는 한 그룹에 의해서 초 뿌려져서는 안 되는 공생의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 번 소리 내 울어보자.
저자가 쓴 베이비부머들의 인생 보고서인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는 베이비부머들의 눈물 나는 보고서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피눈물도 보인다. 책의 말미에서 송 교수가 인용한 사이먼과 가펑클의 불후의 명작인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의 가사 말처럼 세대론적인 측면에서 고령화 된 부모들을 끝까지 책임져야 하며 자식들의 부양책임까지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이 시대의 마지막 부류인 우리 베이비부머들은 운명론적으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의 장본인들로 남아 있다는 말이 왠지 극히 부담스러운 표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감이 가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일까? 노후 대비에 전혀 무방비인 우리들 베이비부머들은 남은 시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자기 인생인 아닌 떠밀려온 쥐어 짜이는 인생(squeezed life)을 산 우리 베이비부머들의 진정한 위로는 무엇인가? 를 한 번 즈음은 피드백하고 싶다면 송 교수의 책을 읽으시라. 물론 또렷한 대안은 이 책에서 주지 못한다. 그러나 위로가 된다. 그러기에 섭렵해 보심이 어떨까? 나름 무거운 책이지만 읽고 나서 나는 개인적으로 위로를 받았기에 조금은 가벼워졌다. 물론 사람마다 느낌과 감흥은 다르겠지만. 저자는 지금이라도 독립하라고 하지만 독립선언이 우리 베이비부머들의 생리 속에 실제로 가능한 것인지는 물음표이다. 왜 그럴까? 아직 서평자도 9년이라는 정년이 남아 배짱 튀기는 것일까? 서평자가 섬기는 교회의 정년은 65세이기에. 이렇게 억울한 줄 알았으면 얼마 전 태동한 죽을 때까지 정년을 보장하고 있는 모 교단으로 들어갈 것 그랬나보다. 하지만 서평자는 태생 자체가 거기와는 맞지를 않아서 유감이다. (ㅎㅎ) 저자는 그들은(베이비부머) 소리 내 울지 않았다고 갈파했는데 서평을 마무리하면서 반골기질이 살아난다. 소리 내 울어보자. 베이비부머들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