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칼 트루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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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지평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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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3-05-22 17:1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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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트루먼의 ‘진보보수 기독교인’ (Republocrat)를 읽고 모 종편에서 방송한 80년 5월의 광주 이야기가 국가기념일로 정부에서 이미 확정했고 역사가 판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치졸한 색깔 논쟁으로 변질시킨 것이 화두가 되어 소모적이고 질 나쁜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확산되는 느낌이 있어 매우 유감스럽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류의 극단적 파시즘적인 몰아붙이기는 가장 질 나쁜 지식인의 범죄적 행위로까지 정의해도 무방하다. 본서의 저자인 칼 투르먼은 책에서 윈스턴 처칠의 어록을 다은과 같이 소개한다. “민주주의는 나쁜 것이지만 이제까지 존재해 온 정치제도 중에 그래도 제일 괜찮은 제도이다.” 적어도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사상의 자유를 전제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보수와 진보는 어느 시대, 어느 국가, 어느 종족에든 존재해 왔다. 또 존재할 것이다. 문제는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구도가 잘못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서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시에 굳어져 있다는 비극이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표현한다면 이해가 되어도 이해를 하지 않으려는 두 극단의 사상적 교만이 기저에 있다. 이런 차원에서 개혁신학적인 즉 보수적인 색깔이 농후한 미국 신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역사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영국 출신의 신학자 칼 트루먼에 제시하고 있는 ‘진보보수 기독교인’은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진부한 보수성을 뛰어넘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물론 역사 신학자이기에 역사성의 혜안을 갖고 시대를 보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천편일률적인 선입관을 갖고 트루먼을 보는 것은 큰 패착이었음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이 책의 역자인 김재영 교수(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 는 이 책을 번역한 뒤 책의 제목을 ‘진보보수 기독교인’이라고 정했다. 일반적으로 진보와 보수라는 두 이데올로기를 표현할 때는 진보를 쓰고 난 뒤에 스페이스를 갖고 보수를 쓰는 것이 상례이다. 즉 ‘진보-보수’ 혹은 ‘보수-진보’의 표현으로 말이다. 그런데 역자인 김교수는 ‘진보보수’ 번역하면서 두 단어에 스페이스를 주지 않았다. 그의 번역 예술은 저자의 의도를 아주 잘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책의 원제인 ‘Republocrat’ 밑에 칼 트루먼은 다음의 부제를 달아놓고 있다. “confession of a liberal conservative” 부연하면 ‘진보적 보수의 고백’이라는 단어를 적절하게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 때문에 아예 이 두 단어를 묶어버린 의도가 엿보인다. 번역의 제목을 이렇게 정한 것은 억지로 갖다가 붙이기 식의 번역이 아니라 역자는 liberal 과 conservative 라는 두 단어를 합친 것이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자가 견지할 조화롭고 건강한 사상적, 정치적 배경으로 여겼던 원저자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저자는 영국인이다. 그러기에 미국에서 사는 외국인으로서 미국적 정치에 대하여 조금은 더 객관적인 비평을 할 수 있는 스펙트럼을 곳곳에서 연출한다. 주목할 것은 저자는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행보가 선거철이나 특별한 이슈들에 대하여 너무 정치적(?)이라는 점에 대하여 비판한다는 점이다. 정치를 하는 집단이 정치적이라는 데에 더 무슨 딴죽 걸기가 필요할까?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경우에 따라서 정치적인 이슈에 따라 ‘공화당적인 좌파’와 ‘민주당적인 우파’ 우리로 이야기 하면 새누리당적인 좌파 민주당적인 우파로 결집되는 정체성을 수시로 바꾸는 정치 철학이 없는 이합집산을 보면서 미국 정치를 맹공한다. 물론 저자는 본인의 고국인 영국에 대한 정치에 대해서 별 다름이 없음을 꼬집는다. 예를 든다면 동성애, 낙태, 명분 없는 전쟁, 의료보험의 전 국민적 실시에 대한 논쟁, 빈곤과 환경에 대한 문제 등등이 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될 때 얼마든지 정치적인 철학과는 상관없이 표의 향배에 따라 배를 갈아타거나 혹은 반대적인 측면에서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치적인 의도를 반드시 관철시키기 위해 도를 넘는 매도의 일탈도 서슴지 않는 정치권력의 생리에 대하여 칼 트루먼은 맹렬히 공격한다. 여기까지는 엄격한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이 감 나라 배 나라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세속적 권력의 필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루먼의 본색은 그 다음이 압권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색깔 논쟁에 대한 교회의 선택에 대한 제문제가 더 심각함을 저자는 제기한다. 그러기에 트루먼은 이 책의 서언에서 이렇게 책 저술의 목적을 밝힌다. “미국에서 복음주의 교회가 보수적인 정당 정치와 기독교적인 충성을 너무나 밀접하게 연관시킴으로서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는 위험을 초래하게 하였다는 확신을 나는 갖는다. 이것은 비극이다.” 저자의 의도는 분명히 일면 보수적 가치를 갖고 있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견으로 보아도 좌시할 수 없는 위험요소이며 이런 일들이 교회에서 자행 되는 것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적어도 교회가 이런 무모함에 대하여 각성할 필요를 강하게 느꼈기에 이 책의 기록 목적이 내포되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런 저자의 비판은 한국교회를 바라보아도 매일반이다. 아니 더 솔직하게 역설하면 한국교회의 보수적이며 복음주의적이라고 자부하는 교단의 지도자들의 정치적 편견과 타협은 치료 가능성이 불투명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는 절망감을 준다. 그렇다고 보수적 교회의 행태만을 비판할 여유가 진보적인 교회에도 녹록하지만은 않다. 진보적인 교회 역시 정치적인 행태에 있어서 편협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음은 보수적인 교회와 비교해 볼 때 오십보백보이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보수적인 교회의 정치적인 타협과 실패를 보면서도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조금 도 공격적으로 표현하면 막시즘의 좁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여전히 사상의 우상 앞에서 허덕이고 있는 진보적인 교회의 우왕좌왕함이다. 이것은 또 다른 오늘의 교회 공동체의 비극임을 저자는 분명히 하고 있다. 그 예로 데이빗 웰즈의 갈파를 소개한다. “교회가 세속적인 기관과 다를 바 없이 세속적인 야심과 방법을 추구하는 것은 동일하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기독교 국가로서의 미국을 추구하는 보수적 교회나 가난과 전쟁 그리고 환경에 관하여 그들만의 논리 외에는 전혀 듣지 않으려는 진보적 교회들의 배타성이나 모두가 세속적인 야망을 이루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음이 이것을 증명한다.” 양측의 이런 피곤한 소모전이 교회를 약하게 하며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하는 이유로 작용됨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교회 뿐만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미국적일 수 밖에 없는 한국교회의 작금의 자화상이 슬프다. 칼 트루먼은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기를 거부한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두 가지의 예언적인 사상을 건강하게 겸비해야 함을 역설한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책의 말미에 중요한 교회 역할을 제기하며 충고하는데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현재 기독교는 정치에 대하여 너무나 쉽게 큰 소리를 치며 공격하곤 한다. 그러나 각종 쟁점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을 하고 정확히 알고 가담해야 하며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참여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문화가 변해야 하며 우리는 더 폭넓게 읽고 살펴야 한다. 우리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에 대해 비판하듯이 우리기 좋아하는 해설가들과 이야기들에서 대해서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세계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들에 대하여 훌륭한 청지기들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 실천적인 본질의 측면에서 기독교를 너무나 보수적인 정치와 일치시키는 것을 견제하지 않고 비판 없이 그대로 둔다면 오늘날 교회는 많은 세대의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내몰게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차별금지법안으로 교회가 뒤숭숭하다. 분명한 정치적 철학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강력한 insight 를 책을 읽는 내내 가져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