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스스로를 위한 위로의 방법 나누기 (예: 나는 ??? 때 기분이 좋아진다.) | 경배와 찬양 (WORSHOP)● 하나님의 나팔 소리 (찬송가 180장) ●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4:13-18 ● 제목 : 서로 위로하라 1)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 대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염려를 바울이 재림과 관련하여 해소해 준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 첫 번째 테마를 중심으로 설명해 보자. (죽은 자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해석) ● 참고 성경구절: 요한복음 11:11, 다니엘 12:2, 요한복음 11:25-26 ● 참고: ‘데리고 옴’에 대한 해석 |
2)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휴거(携擧)에 대한 바울의 해석을 정확하게 짚어보자. ● 참고 성경구절: 데살로니가전서 4:17절 ● 순서를 분명히 이해하자. (설교를 중심으로) |
3)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무기는 무엇일까? ※ 설교 제목을 적용하여 나누어 보자. (데살로니가전서 4:18)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의 건강과 사역을 위하여 ② 전교인 야외 예배를 위하여 ③ 영육의 연약한 지체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① 수요기도회 참석하기
5)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5년 5월 3일 주일 오후 예배 (데살로니가전서 18번째 강해) 제목: 서로 위로하라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사회 구조의 최소 단위라고 말하는 가정마저도 붕괴되는 조짐들이 보이는 현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해답을 말씀 속에서 찾아봅시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영적인 향후 상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사역을 할 때 부활하여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좌정하고 계신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분명한 소망의 교리를 가르치며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이 교리로 인해 많은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되었고 믿음을 견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예수님의 소망을 믿고 따르던 자들 중에 실제적으로 미리 죽음을 당했던 자들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었습니다. 이들은 죽었기에 육체적으로 살아있는 자들과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주님과도 분리되어있는 상태였기에 주님이 이 땅에 혹시 강림하시면 그들의 구원의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해석으로 인해 살아 있는 자들이 몹시 낙망해 있었습니다. 즉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에 대한 명확한 교리적 지침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3-15절에서 본인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며 그들의 고민을 해결해 줍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바울은 죽은 자들을 지칭하여 죽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잠자는 자들이라고 정의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근거는 다니엘서 12:2절과 요한복음 11:11절입니다. 이렇게 한시적인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인식한 바울은 그 다음 단계로 또 하나의 교리적인 지침을 제시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강림하실 때 살아 있는 우리들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먼저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워주실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본문 14절 후반절은 이 점을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그 날이 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아들과 함께 죽은 자들을 먼저 데리러 오신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이 선포는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주님을 믿음으로 주 안에 있는 자들이 갖고 있었던 답답함을 해소하는 지침이 되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 역시 이와 비슷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선언으로 인해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오실 때에 예수님이 함께 오실 것인데 그 이유는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것처럼 그들을 다시 살려 자기와 함께 연합하게하기 위함이었다. 이 믿음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생성되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야기 시키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된다는 것과 살아남아 있는 자들과도 분리된다는 고통인데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이러한 두 가지의 비통한 분리는 진정한 것도 아니며 영원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엄숙하게 확신시켜준 것이다.” 바울의 해석은 육체적으로 사망하여 예수와 완전히 분리됨으로 인해 주님과의 만남이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그릇된 이해를 불식시키고 도리어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먼저 부활시키셔서 그들을 부르시고 만나시며 그들과 함께 연합할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제시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 번째 은혜는 ※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 있을 때 죽음을 극복하게 된다는 은혜입니다. 본문은 죽은 자에 대하여 아주 여러 차례 영적인 혜택을 소개합니다(13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예수 안에 살다가 죽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본문은 자고 있는 것으로 인하여 슬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어 있는 현장에 주님이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이미 울고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비웃는 자들도 있었지만 주님은 개의치 않으시고 선포하셨습니다(막 5:39-42).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본문 14,15절에서 바울의 역설은 살아 남아있는 자보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설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종교 개혁자인 존 캘빈도 자신의 데살로니가 주석에서 “죽은 몸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실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듯이 무덤 안에서 쉬고 있다.”고 갈파했습니다.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은 육체적으로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이단의 가르침에 동의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죽음이라는 절망을 다시 삶이라는 부활의 은혜로 극복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25-26절에서 선언하신 사실을 믿는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삶을 마감하는 관문이라고 생각하면 두려워지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한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라고 믿는 자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18절).
두 번째로 ※ 가장 좋은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강림하시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워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주를 영접하게 된다고 설파한 점입니다(17절).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휴거(rapture)라는 교리로 우리들 가운데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휴거에 대한 성경적 접근은 휴거라는 개념의 극단적인 해석을 주의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공중에 재림하실 때 분명히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그런데 그들이 먼저 하나님이 만드신 유토피아적인 낙원으로 휴거될 것이라는 해석이 한국교회에 팽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었다가 살아남은 자와 똑같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되어 주님을 맞이하게 된다고 가르쳐 줍니다. 또 하나 유의할 것은 공중으로 끌어올림에 대한 신학적 바른 이해입니다. 통상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으로 끌어올려져 구름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주님의 낙원으로 견인될 것이라는 고정화되어 있는 투철한 믿음이 있습니다. 한 가지 동의하는 것은 주 안에 거하는 살아 있던 자 혹은 무덤에 있던 자 공히 주님이 이 땅에 공중재림하실 때 한시적인 끌어 올림 (그러나 어떻게 끌어 올려 질 것인지에 대하여 전적인 주님의 방법이기에 정의하기가 쉽지 않음)입니다. 다만 그 끌어 올림으로 인해 우리들이 그곳에서 영원히 거할 것이라는 착각은 버립시다. 데살로니가전서 본문을 통해 바울은 17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천명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과 함께 항상 있다는 말은 유토피아적인 낙원에 영원히 머문다는 것이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목적은 지상 재림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획하신 신천신지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시적인 끌어 올림이라는 은혜가 끝난 뒤에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주님과 함께 재림하는 역사에 동참하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본과 말이 전도되지 말아야 하는 엄숙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휴거라는 신비주의에 열광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함이라는 소망을 품고 살라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의 신앙이 신비적인 것을 추구할 때 그것이 곧 보이는 은혜라고 생각하여 현상적인 은혜만을 추구하는 신앙의 변질을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기적, 이적, 표적, 신유, 예언함 등의 현상적인 능력 행함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시인의 고백대로 가장 좋은 소망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소망입니다.
가정마저도 진정한 위로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시대에서 진정한 소망과 위로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수 있다는 것으로 서로 위로합시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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