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5.03.22 셀 사역2024-04-22 15:26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베스트와의 관계 속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에피소드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 305장)
● 십자가 십자가 그 위에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3:1-10
● 제목 : 사랑은 아무나 하나
1) 본문은 두 단락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단락에 기술된 바울의 염려는 무엇이었고 둘째 단락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해 받고 염려가 기쁨으로 바뀐 내용의 설교를 기억하며 구체적으로 상기해 보자.
● 첫째 단락의 바울의 염려(3-5절 참고):
● 둘째 단락의 바울의 기쁨(6-7절 참고):  

2)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 간의 사랑의 교제를 진하게 보여주는 본문의 대표적인 진술은 무엇인가?
● 짝사랑 (ONE-SIDED LOVE) 이 아닌 쌍방 사랑의 증거인 6절을 자세히 살피자.  

3)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이란 무엇이며 그 근본적인 사랑의 출처는 무엇인가? 동시에 내가 열린 모임 중에 정의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정성이 있는 사랑을 나눌 프로젝트들을 세워보자.
※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이란? (설교를 되새기자.)
※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의 출처는 무엇인가? (설교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 프로젝트 세우기: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의 건강과 사역을 위하여
  ② 열린모임사역과 대날개 축제를 위하여
  ③ 베스트와 지명 방어 대상자를 위하여
  ④ 춘계 대심방 사역을 위하여(26일, 정은희셀)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① 열린 모임 5주차 사역 기간: 베스트와 지명 방어 대상자를 셀 예배에서 실시되는 열린 모임에 초청하기(1차)

5)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5년 3월 22일 주일 예배 설교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13)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3:1-10
제목: 사랑은 아무나 하나

  존 오트버그 목사님의 ‘누더기 하나님’에 나오는 글 중 “내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를 위하여 돌아가시게 한 것은 정말 비극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실 만큼 나를 가치 있게 여기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는 글처럼 주께서 나를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시고 주님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고 있다면 우리는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크게 두 단락으로 구분하면 첫 번째 단락은 1-5절까지, 두 번째 단락은 6-10절까지입니다.
왜냐하면 두 단락의 내용을 회상하고 있는 바울이 회상의 장소와 시기를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고 있는 지금 고린도에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시작하여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에 이르는 제 2차 전도여행의 노정에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에서 바울은 초창기에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빌립보에서 교회를 세운 뒤 쫓겨났고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도 동일한 일을 당했습니다. 할 수 없이 타의에 의해 바울은 아덴에 도착을 했으나 아덴의 금욕주의자들인 스토아 철학자들과 반대의 입장에 있었던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람들, 그리고 헬라 철학에 심취해 있었던 아덴 사람들로 인해 이전 지방에 비해서 복음 증거 사역에 적지 않은 곤혹을 당했고 열매도 많이 맺지 못한 채 고린도로 넘어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로 바울에 의해 재 파송된 상태였고 실루아노는 아마도 선교적인 차원에서 아덴에 남아 있기로 하였기에 또 다른 우상의 도시였던 고린도로 넘어갔던 바울은 정말로 철저히 고독한 상태에서 홀로 고린도에 머물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 편지를 쓸 때는 바울이 나름대로의 고독한 싸움을 어느 정도 인내한 상태였고 더불어 데살로니가로 파송했던 디모데와 아덴에 머물던 실루아노까지 고린도로 다시 돌아온 상태였기에 바울은 이전 보다는 힘을 얻고 고린도 사역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상황을 전제로 본문을 살펴보면 1-5절은 바울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파송할 때의 심정을 토로한 기사이고, 6-10절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고린도로 다시 돌아와 바울에게 데살로니가의 상황을 보고한 뒤의 내용입니다. 이런 배경적인 차이가 있기에 본문을 나누어서 봅니다.
  첫 번째 단락인 1-5절은, 바울이 실루아노와 아덴에 머물러 있었을 때를 회상합니다. 아직은 고린도로 넘어가기 전에 실루아노와는 함께 있었을 때입니다. 아덴에서의 사역이 힘에 달린 것은 분명했지만 그 보다도 더 바울이 염려했던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린 신자들이었습니다.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본문 3절 전반절)”,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러므로 나도 참다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본문 4-5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린 신자들에게 장차 받을 환란을 말한 적이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아마도 이 회상은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 임하는 대 환란에 대한 교리적 설명(4장)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것은 대 환란의 시기에 받을 환란을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이 먼저 받을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그 환란은 구체적으로 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험하는 자들의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하는 자들의 시험은 ① 유대인들의 공격적인 핍박입니다. ② 로마 황제 숭배자들의 직간접적인 공격의 시험입니다.③ 신비주의였던 카비루스 파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관점 중에서 바울이 가장 염려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핍박이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도전하고 있는 유대 종교주의자들의 시험과 공격이었습니다. 이들의 집요한 공격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복음의 근간을 세우고 제시한 바울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 하는 사탄적인 공격들이었습니다.
  어린 신자들이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은 얼마든지 이런 공격에 노출되어 시험에 빠질 수 있으며 잘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빗나갈 수 있는 요인이 다분했기에 바울은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급거 파송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본문 2절).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하나님의 일꾼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동역자인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형제들을 위해 보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의 단락을 살펴 보면, 디모데는 바울의 명령을 받고 데살로니가로 파송되어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린 신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파악하고 바울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지리적 배경은 이제 아덴이 아니라 고린도입니다. 무척이나 데살로니가 교회 형제들의 영적 상태를 염려하던 바울에게 돌아온 디모데의 보고는 바울을 영적으로 흥분하게 만드는데 충분했습니다.
  6절 전반절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린 신자들이 바울이 염려한 것과는 달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고 보고하며, 7-8절은 바울로 하여금 감사의 고백이 흘러넘치게 하는 보고입니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이 대목을 톰 라이트 교수는 자신의 저서 ‘모든 사람을 위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 있으니 즉 여러분이 주님께 충성을 다하는 삶과 그 분의 가족에 속한 신분이 지금까지 무사하니 이제는 우리가 정말로 살 것 같습니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번역에도 “우리가 여기에서 고난과 역경 가운데 있지만 여러분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게 되었으니 우리가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살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우리가 살겠습니다.”
  바울이 죽을 것 같은 마음의 심정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염려하고 또 염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감동입니다. 이 염려 가운데 있었던 바울에게 행한 디모데의 보고는 한 줄기 사막에서 솟아오르는 오아시스와 같은 샘물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보고를 받은 뒤에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린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본문 9-10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로 인해 진심으로 기뻐한다고 선포합니다. 더불어 밤낮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위해 중보하며 직접 얼굴을 보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는 따뜻한 인사를 전합니다.
  6절 하반절에서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바울이 술회하는 것을 통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린 신자들과 바울의 사랑은 쌍방사랑이었음을 알게 해 줍니다.
※ 사랑한다는 것은 상황과 관계없이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20절을 보면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는 이 기막힌 비유 구절의 압권 구절은 ‘아직도 거리가 먼 데’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이후 다른 공간에 거주하면서 고생할 것을 염려하면서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매일 집 대문 밖을 주시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은 둘째 아들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 곧 사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실천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을 보면 주님의 죽으심 이후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주님이 그곳으로 오셨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셔서 그들과 함께 있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있고 싶어 했던 마음이 있을 때만,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이 바울과 함께 있고 싶어 했던 마음이 전제될 때만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둘의 사랑은 환경을 뛰어 넘어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우리들을 향한 사랑과 닮아 있습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 주님이 도무지 가까이 할 수 없는 부족한 것 투성이었던 자기에게 오셔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고 그 사랑을 말 뿐만이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실천하셨던 주님의 사랑에 붙들려 그 사랑에 목메어 울었던 바울처럼 우리들도 그 사랑에 파묻히는 귀한 주간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