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찬송가 304장) ●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2:17-20 ● 제목 : 터질 것 같은 사랑 1)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 있었지만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사랑했다는 증거를 17절을 중심으로 말해보자. 2) 바울 본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했던 이유를 데살로니가 교회의 영적 기상도를 중심으로 분석해 보자. ● 데살로니가 교회의 일부 지체들의 상태 (설교 내용을 중심으로) ● 사단의 방해: 바울의 심리적인 상태 (가벤타 교수의 해석을 중심으로) |
3) 바울이 궁극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우들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한 결과 어떻게 그들을 자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말씀을 근거로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했던 내용이 있으면 나누어 보자. ※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랑한 결론적인 내용(19-20절을 참고)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의 건강과 사역을 위하여 ② 열린모임사역과 대날개 축제를 위하여 ③ 베스트와 지명 방어 대상자를 위하여 ④ 춘계 대심방 사역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① 열린 모임 4주차 사역 기간: 베스트와 지명 방어 대상자와 2차 만남 갖기 (필요 채워 주기)
5)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5년 3월 15일 주일 예배 설교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12)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2:17-20 제목: 터질 것 같은 사랑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명품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편지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본문 19-20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격려와 감동의 메시지를 전한 것은 그들이 보여 준 명품 신앙의 요소 때문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진심어린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본문 17-18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역사하시는 능력을 기초로 많은 사람들을 헛된 신과 우상의 울타리에서 자유하게 함으로서 예수의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허나 이로 인하여 사탄의 올무에 강력하게 붙들려 있었던 유대인들의 심한 반대와 폭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베뢰아 지역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밤에 베뢰아로 피신하게 된 바울과 실루아노는 3개월여 사역하며 목회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린 신자들과 제대로 된 송별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불연 듯 사라진 바울의 빈자리가 아마도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들에게는 적지 않게 큰 자리로 다가왔을 것이고 섭섭한 마음까지도 바울에게 가졌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바울의 부재로 인해 어린 신자들이 불안하였을 텐데 바울을 눈엣 가시 같게 여겼던 데살로니가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바울을 따르는 자들에게 공격을 합니다. 도망 간 자가 무슨 지도자이고 그런 자가 말한 것을 믿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논리로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부화뇌동은 극에 달했지만 놀랍게도 대다수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부의 지체들이 유대인들의 그런 공략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전반적인 영적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기에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는 동의를 하는 부류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들 중에 단 한 명의 영혼에게도 이런 사탄적인 저의에 의해 무너지지 않기를 소망했고 그 소망은 간절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동역자이자 양아들이었던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를 다녀오면서 전해준 이런 전갈을 받고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부분적으로 퍼져 있었던 오해와 그로 인해 파급될지 모르는 부정적 여론을 감안하고 본문 17절에서 그의 진정성을 토로하면서 진의를 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바울은 내가 지금 너희들 가운데 있지 않지만 너희들 가운데 없는 것은 나의 얼굴이지 마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본문에 ‘마음’ 으로 번역된 ‘칼디아’는 ‘심장’이란 뜻으로 더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들을 지금은 떠나 있지만 나는 너희들을 떠난 것이 아니며 내 육체는 지금 너희들과 함께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내 심장이 너희와 함께 있다는 공격적 토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곧 나의 전부가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말 일 것입니다. 바울의 이 토로에 대한 진정성은 17절 하반절에서도 보입니다.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심장’ 즉 ‘칼디아’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본문 18절에서 바울은 다시 데살로니가로 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헬라어 표기의 관용적 어법 중에 ‘한 번 두 번’이라는 숫자적인 열거법은 단순히 문자 그대로 1, 2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지속적으로’ 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가려고 했던 것은 지속적으로 여러 차례입니다. 그러나 증언대로 바울의 길을 사탄이 막았습니다. 학자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았다는 대목에서 사단이 막은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하여 많은 의견들을 내놓았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설교의 목적에 부합하는 두 명의 학문적인 주석을 제시합니다. 한 명은 20세기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권의 강해 설교가이자 신학자로 평판이 난 존 스토트 목사의 해석입니다. 그는 자기의 책 ‘데살로니가전후서 강해’에서 4가지의 이론을 소개합니다. ① 계속되는 데살로니가 지역의 유대인들의 방해와 음모 ②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육체의 가시 ③ 야손과 그의 가족들에게 내린 법적 금지령 (바울이 돌아오면 심한 벌을 내리겠다는 협박) ④ 고린도에 머물던 바울에게 누명으로 씌워진 어떤 죄나 추문들 그 어느 것 하나 녹록한 것이 없는 영적인 올무들이 바울을 운신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네 가지로 추측되는 내용을 사단이 막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비버리 로버츠 가벤타 교수의 이론입니다. 그의 ‘데살로니가전후서 주석’의 해석을 요약하면 이와 같습니다. “바울이 갖고 있었던 심리적인 부담이었다. 만에 하나 자기가 데살로니가로 다시 돌아갈 경우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들에게 임할 적지 않은 고난과 환란을 바울은 염려했다. 본인으로 인하여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들의 형제들에게 임할 물리적인 공격이나 혹은 변절을 유도할 유대인들의 심각한 시험 그리고 이미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임할 복음에 부합하지 않는 종교적, 사회적 행위들을 강요받게 될 상황에 대해 바울이 갖고 있었던 영적이고 심리적인 부담 말이다.” 가벤타 교수의 해석으로 볼 때 바울 본인 스스로가 당하는 고난과 환란이라면 바울은 얼마든지 그 고난을 달갑게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본인이 데살로니가로 다시 돌아갔을 경우 본인 한 사람으로 인해 당하게 될 고난의 영역이 어린 신자들이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에게도 임하는 아픔을 바울은 참으로 무겁게 바라보았고 바로 이 점에서 바울은 사탄의 계략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격에 공격적으로 반응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바울의 심정을 사탄이 노렸습니다. 이렇게 결론을 맺으면 바울은 사탄의 공격에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공격에 패하게 된 결과보다 더 중요한 교훈이 보입니다. 사탄도 어쩔 수 없이 이용했던 수단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한 터질 것 같은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이것입니다. ※ 바울의 터질 것 같은 사랑에서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보인다는 교훈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육체가 고린도에 있었지만 그의 심장은 데살로니가에 있었고, 그의 얼굴은 고린도에 있었지만 바울의 심장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명품 성도들을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이런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7-8). 바울은 로마로 추측되는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썼다고 학자들이 대부분 동의합니다. 바울의 말년은 외롭고 쓸쓸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물론 힘든 일이었지만 바울을 더 외롭고 힘들게 했던 것은 빌립보 교회에 있었던 제자군들 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해야 할 그들이었지만 도리어 그들은 바울의 구금을 기뻐했습니다. 이유는 바울의 구금이 그들에게는 사역의 주류가 되는 기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동안에는 바울로 인해 항상 2등이었는데 이제는 1등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섭섭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빌립보 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자신의 구금을 기뻐하는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사랑은 터질 것 같은 사랑입니다. 미쳐버릴 것 같은 사랑입니다. 빌립보서 1:8절의 감동은 상투적이지 않는 가슴 절절한 사랑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사랑한 그 사랑의 심정으로 자랑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이 이 땅에 강림하실 때 내가 주님께 자랑할 것이 있다고 말입니다(본문 19-20절). 바울의 이러한 사랑은 그 사랑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5:8-10절). 만삭되지 못한 영적 팔삭둥이인 바울,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바울, 도무지 사도 될 자격이 없는 바울에게 오셔서 내가 너를 내 심장(칼디아)을 도려내는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선포하시면서 바울이 달린 십자가에 대신 달리셔서 죽으셨던 그 터질 것 같은 그 사랑을 바울은 받았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사순절 주간, 주님이 나를 위해 주셨던 터질 것 같은 사랑의 언어들이 우리의 심장을 뒤흔들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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