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설 명절 연휴 기간 동안 들은 이야기와 전한 이야기 중에 영적인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주만 바라볼지라 (복음성가) ● 천지에 있는 이름 중 (찬송가 80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2:1-8 ● 제목 : 사람에게서는 1)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을 적극적으로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변호하려고 했던 내용은 사도권이었다. 그 배경을 다음의 두 가지 경우를 들어 설명해 보자. ● 빌립보 성에서의 일들. (사도행전 16장 참고) ● 데살로니가 성에서의 일들. (사도행전 17장 참고) |
2) 바울의 사도권 변호가 사자후의 영적 포효 같았던 이유를 설교를 근거하여 말해 보자. 3)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흘러넘쳐야 하는 메시지와 설교를 듣는 나도 변화해야 할 내용을 셀 원들과 진정성이 있게 나누어 보자. ※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어야 할 메시지. ※ 위의 내용을 전제하여 내가 설교를 들으면서 바뀌어져야 할 태도 ※ 사람을 위한 메시지이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지이어야 하는가? (참고)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의 회복과 사역을 위하여 ② 사순절의 영성 훈련을 위하여(18~) ③ 베스트를 위해서(3명 전도) ④ 대날개 축제(귀빈초청주일: 4월 12일)에 열매 맺을 영혼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① 열린 모임을 통한 영혼 구원을 위해 중보하기 ② 제 4차 말씀 축제 참석하기(24~27일) ③ 카풀 사역 잘 감당하기 5)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5년 2월 22일 주일 예배 설교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9)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2:1-8 제목: 사람에게서는
오늘 본문의 바울 사도의 글에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신앙적인 삶이 진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라는 편지가 바울이 쓴 것이기는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그들의 교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본서의 1:1절을 통해 공동 집필의 동역자들이 데살로니가교회의 지체들이 지닌 귀한 명품 신앙의 요소를 견지하며 아름답게 신앙의 경주를 경주해 줌에 대해 마음을 다해 격려하고 칭찬하고 있는 내용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1장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주인공이었다면 2장에서는 주인공이 서신의 공동 집필자로 바뀌고 있습니다(살전 2:1). 바울은 지금 이 편지를 받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동역자들인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 처음으로 들어갔을 때의 상황을 회상하며 데살로니가에 들어갔던 일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데살로니가 형제들이 알아주기를 기대한다고 술회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울 스스로가 빌립보 지역에서의 사역을 감당한 뒤에 우여곡절 끝에 데살로니가로 들어갔을 때의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었던 형제들의 상황과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바울이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의 데살로니가 지역의 형제들의 영적인 상태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성숙해져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명품 신앙의 지체들에게 확신에 찬 어조로 우리들이 너희들에게 맨 처음 들어갔던 것이 은혜였고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재천명한 것입니다. 이런 확신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자신과 동역자들에 대한 갖가지 좋지 않은 소문들에 대하여 혹 모를 노파심을 이해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데살로니가 지체들이 혹시 오해할지도 모를 노파심의 내용은,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의 서막을 알렸던 빌립보 선교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과 실루아노는 성령의 강력한 조명으로 아시아 선교를 포기하고 유럽으로 사역지를 옮겨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거쳐 무시아와 드로아로 내려가서, 드로아에서 마케도냐의 환상을 보고 배편으로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네압볼리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 성에 이르러 빌립보의 한 지경이었던 두아디라 지방에 살고 있는 자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에게 복음을 증거 하여 그녀를 회심시키는 데 성공을 했고 그녀의 집을 전진기지 삼아 빌립보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윽고 그곳을 포스트 삼은 바울과 실루아노는 능동적인 복음 증거 사역을 시작합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점치는 귀신들린 여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귀하여 그녀를 자유롭게 해 준 것이 불씨가 되어 그 여인을 이용하여 돈을 벌던 질 나쁜 빌립보 지역의 장사치들이 돈 버는 수단이 사라진 것에 앙심을 품고 바울과 실루아노를 붙잡아 빌립보 관리들에게 데리고 가서 로마의 속국이었던 빌립보의 치안을 어지럽히며 이상한 풍속을 전하면서 성을 요란하게 만드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고소를 하기에 이릅니다. 졸지에 고소를 당한 두 사람은 심한 매질을 당하고 구금되어 빌립보 성의 감옥에 수감되는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루아노는 감옥에 찾아오신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구출되었고 감옥의 간수장도 구원시키는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감옥에서 구출되는 믿기지 않은 일을 목도한 빌립보의 치안을 맡은 관리들은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뒤늦게 알고 자신들이 바울에게 린치를 가한 것에 대한 후한이 두려워 그를 방면하면서 빌립보를 떠나줄 것을 종용합니다. 바울과 실루아노는 다시 빌립보 교회가 서 있는 루디아의 집에 방문하여 교회가 견고히 서 줄 것을 당부하고 위로한 뒤 데살로니가로 전도 사역지를 옮기게 됩니다. 바울과 실루아노는 빌립보에서 고난을 당했고, 감옥에 구금되는 고통과 매질을 당했습니다(행 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영국 멘체스터 대학의 성경해석학 교수인 FF 브루스(Bruce) 교수는 자신의 주석서에서 이 대목을, “바울과 실루아노는 로마시민이었고 또 로마의 시민은 법적으로 면책특권을 부여받았지만 이들은 구금을 당한 정도가 아니라 조사도 받지 않고 공적으로 옷을 벗은 채로 매를 맞았다. 이러한 대우는 이들이 로마 시민이든 아니든 능욕적인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브루스 교수의 이 설명을 전 이해로 당시 바울과 실루아노의 상황을 적용해 본다면 빌립보의 여론은 두 사람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고 후에 방면되어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로 가게 되었지만 바울과 실루아노의 데살로니가 행은 추방의 성격이 훨씬 더 강해 보입니다. 이렇게 타의의 강요에 의해 자리를 옮긴 곳이 데살로니가였다면 바울과 실루아노가 데살로니가에서 얼마나 자신의 신변이나 활동 반경에 적지 않은 부담감이 있었을까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두 사람은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불과 3주 사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헬라의 큰 무리들이 회심을 하여 예수께로 돌아오고 적지 않은 고위 계층의 귀부인들까지 회심을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데살로니가의 터줏대감 유대인들이 이 상태를 방치했다가는 데살로니가의 유대 종교적인 판세가 무너질 것을 염려하여 다시 두 사람에게 천하를 어지럽히는 불순분자라는 누명을 씌워 데살로니가에서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강수를 두자 두 사람의 신변의 위협을 걱정하던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이 그들을 베뢰아로 피신시키는 기록이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과 실루아노의 제 2차 전도여행 중에 일어났던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지역의 기록들입니다. 지금 이 편지는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를 지키고 있는 명품 신앙인들 사이에 주고받은 따뜻한 편지입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의 따뜻한 관계는 본문 8절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관계였습니다. 목숨을 주어도 괜찮을 사랑의 대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를 섬기는 모든 지체들이 다 그러한 관계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모이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의견이 다 같을 수는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도 매일반이었습니다. 지금 고린도에 머물고 있는 바울의 사도권이나 바울에 대한 호감도에 있어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지체들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빌립보에서 고소를 당하여 감옥에 갇혔던 전력을 아직 선명하게 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혹시 바울과 실루아노가 진짜로 질서를 어지럽혔던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지체들이 있음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울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바울에 대한 에도스(인격적인 신뢰)를 확신하고 있지 못한 데살로니가 지체들을 향하여 바울이 자신에 대한 변호를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것이 본문입니다(3-6절).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 사람이 복음이라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맙시다. 하나님이 복음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사람에게 목을 걸지 않고 하나님께 목을 걸고 데살로니가 지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바울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있는 회색지대의 성도들을 향하여 언어의 마력으로 그들을 자기편 만들려고 하는 그 어떤 일체의 간사함과 부정함과 속임수가 섞인 인간적인 시도를 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에게 위탁받은 복음의 능력을 재삼 전하고 있는 바울을 본문에서 발견합니다. 열왕기하 22-23장을 보면 므낫세와 아몬의 치세 동안 하나님과 결별하고 우상들의 판이 되어 영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유다의 왕으로 요시야가 등극을 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인해 극도로 타락한 유다를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갱신시키는 요시야의 개혁 운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야는 제일 먼저 우상의 제단으로 바뀐 성전에 사반을 보내 성전 수리를 지시하고, 서기관 사반을 위시하여 제사장 힐기야, 여선지자 훌다,다수의 뜻을 같이한 동역자들이 성전으로 나아가 망가진 성전을 수리하고 고치는 일들을 진행합니다. 일을 하는 동안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여 그것을 사반이 읽고, 율법 책을 읽는 순간, 무엇을 유다 공동체가 그 동안 잘못했는지를 깨닫고 공동체적인 그리고 거국적인 회개 운동이 벌어집니다. 이제 망가진 솔로몬 성전 수리는 뒷일이 되었습니다. 즉 패러다임 쉬프트가 되었고 유다는 하나님을 회복합니다. 우리 교회를 비롯한 조국교회가 소프트웨어에 정신이 팔려 사람의 마음에 맞는 교회로 전락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사람을 보면 하드웨어이신 하나님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무섭도록 치열하게 하나님이 위탁하신 복음에 집중하고, 무섭도록 치열하게 사람을 보며 그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기대감을 버립시다. 무섭도록 치열하게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않도록 경성하십시다(갈 1:10, 행 4: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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