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이번 설 명절에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족과 친척들에게 보여줄 정체성 한 가지씩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송가 94장) ●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찬송가 179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1:8-10 ● 제목 : 엑기스 신앙 1) 베드로 사도가 욥바의 무두장이인 시몬의 집에 머물렀던 것을 설교 제목과 맞물려 해석해 보자. ●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된 동기(베드로에게 있어서) |
2)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엑기스 신앙으로 들어가는 전 단계의 세 가지 내용과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엑기스 신앙의 내용 두 가지는 무엇이었는가? ● 세 가지의 놀라운 단계: 설교를 중심으로 ● 엑기스 신앙의 내용은? |
3) 내가 개신교 신앙의 엑기스를 놓치고 유사 엑기스를 먹었던 것이 있으면 고백하고 설교 후반부에 담임목사께서 강조한 신앙의 엑기스를 먹는 방법을 자신의 말로 적용하여 말해 보자. ※ 유사 엑기스를 마신 것 고백하기. ※ 신앙의 엑기스를 먹는 나만의 방법 결단하기.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의 회복과 사역을 위하여 ② 사순절의 영성 훈련을 위하여(18~) ③ 베스트 선정을 위해서(3명 전도) ④ 대날개 축제(귀빈초청주일: 4월 12일)에 열매 맺을 영혼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① 전반기 열린 모임: 베스트 1명과 그룹 지명 방어 대상자 2명 선정을 위해 중보하기 ② 말씀 축제(귀빈초청축제): 4월 12일(주일) ③ 주중 셀 사역 필히 감당하기 5)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5년 2월 15일 주일 예배 설교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8)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1:8-10 제목: 엑기스 신앙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욥바라는 도시는 예루살렘에서 약 60km정도 떨어진 항구 도시로, 이곳은 우상숭배가 심했던 이방종교가 판을 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곳에 신실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거주하며 예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웃들에게 선행을 아끼지 않았던 여 제자 다비다가 살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그녀가 병사(病死)하게 되어 욥바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슬픔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 슬픔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던 욥바의 지도급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룻다에서 중풍병에 걸려 있는 애니아를 고치는 등 기적의 역사를 일이키고 있었던 베드로를 찾아와 심방해 주기를 요청하자 베드로는 룻다에서 욥바로 동선을 옮겨 다비다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리는 기적을 베풀어주었습니다.(사도행전 9:36-42) 그러다보니 욥바에서 베드로의 위상이 대단했지만 그는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습니다(행 9:43). 무두장이는 가죽 제품을 만드는 사람으로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동물들의 시체를 만지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불가촉천민 중의 천민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 공동체는 무두장이의 인권을 유린한 것은 다반사이며 그들을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율법적으로 하등의 문제가 없는 그냥 상식적인 일이었습니다. 허나 그렇게 인권을 유린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짓밟았던 유대인들은 이율배반적으로 무두장이들이 만든 가죽제품들은 서로가 갖고 싶어 하는 애호품 중에 으뜸이었기에 무차별적으로 가죽제품들을 소장하려고 하는 자기모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도 당연히 율법적 전통에 의하면 마땅히 무두장이를 경계하고 그와 접촉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 마땅했을 텐데 베드로는 아주 여러 날, 욥바에 있는 수많은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 신자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저주받은 직업군인 무두장이의 집에서 거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행 9:43). 신앙의 엑기스는 말(末)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본(本)을 붙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죽은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의 삶의 족적을 보면서 그가 가졌던 신앙의 엑기스가 무엇이었는지 가름 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베드로와 함께 하시면서 보여주셨던 그 분의 삶의 족적들이 베드로를 그렇게 하도록 한 영적인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가졌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엑기스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뛰어난 신앙의 명품 요소를 갖고 교회를 섬긴 결과, 데살로니가 지역을 뛰어 넘어 고린도와 그리스를 아우르는 아가야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에게 믿음의 좋은 소문을 펼치면서 아주 귀한 영적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좋은 소문은 고린도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바울을 기쁘게 했고 바울로 하여금 데살로니가 형제들에게 격려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까지 하여 격려 편지를 쓰게까지 한 것입니다. 이 격려의 편지에서 바울은 세 가지를 술회합니다. 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어린 교회의 지체들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동역자 특히 디모데의 일행들을 아주 귀하고 따뜻하게 맞이하였고 환영해 주었다는 것에 대한 술회와 (9절 전반절), ② 당시 성행하고 있었던 우상 숭배(로마의 황제인 가이사를 신으로 섬기는 황제 숭배의 민간 신앙, 제우스의 두 아들 중 한 명으로 상징되는 카비리를 섬기는 우상 숭배, 유대신앙)를 단호하게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술회와 (9절 후반절), ③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놀라운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술회였습니다. (10절) 신약학자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이견 없이 ‘어린 교회’라고 통칭합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를 섬기고 있는 성도들 역시 ‘어린 신자들’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어리고 어린 교회인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의 말처럼 어른들도 감히 접근하거나 시도하거나 견지하기가 쉽지 않은 칭찬 받은 교회로 자리매김하고 빠른 시간 안에 이러한 교회로서의 면모를 이룰 수 있었던 근본적인 요소는 바로 ※엑기스 신앙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엑기스 신앙은 본문 10절 하반절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의 엑기스 신앙의 요체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10절 하반절에 번역된 ‘건지시는’의 원어의 원 뜻의 의미는 ‘구원하다.’의 의미입니다. 즉 예수께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결코 초점을 잃지 않았던 바울 사상의 엑기스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결코 바울이 잃지 않았던 신앙의 엑기스, 동시에 태생 자체가 어렸지만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데살로니가 신앙 공동체 지체들의 신앙의 엑기스가 예수께서 우리 모두의 구주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적 고백의 엑기스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구원자이심을 진실하게 믿는 자라면 그 분이 베푸신 은혜 때문에 결코 막 살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어둠의 터널 속에 있었던 나를 빛이 비추는 영적 터널 밖으로 인도해 주셨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다시는 어두컴컴한 죄악의 터널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나의 영혼을 잠잠히 구원해 주신 진정한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라면 그 분이 말씀하신 것 외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너무나 마땅합니다. 매트 첸들러 목사는 그의 저서 완전한 복음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에 대하여 중립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듣는 자로 하여금 불안한 상태에 처하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을 듣는 자의 마음은 그리스도께 다가서든지 아니면 멀어지든지 반드시 둘 중의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라고 갈파했습니다. 예수께서 나의 주 나의 그리스도이신 구원자이심을 진정성이 있게 믿는 자는 회색지대에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크 뷰캐넌 목사의 ‘경계선상에서 머물러 있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신앙의 엑기스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한 가지의 선택권 말고는 선택할 수 있는 여백이 없습니다. 그것은 나를 구원해 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재림의 신앙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본문 10절 중반절) 이 엑기스의 신앙의 그 어떤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의 여정에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믿음의 경주와 선한 싸움과 달려갈 길을 지치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신앙의 엑기스는 나의 구원자 예수께서 나의 눈에서 흘린 눈물을 씻어 주시며 위로해 주시고 격려할 그 날에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종말론적인 믿음입니다. 이 믿음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자신이 영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담임목사님의 설교에 목을 매고 있거나, 남의 간증에 열광하면서, 나에게는 왜 부스러기 은혜도 주시지 않는가 낙심하고 있다면, 예수께서 나를 건지신 구주이심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남이 받은 은혜, 남이 받은 감동, 남이 받은 기적으로 연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매일 마셔야 하는 신앙의 엑기스는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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