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12.28 셀 사역2024-04-22 15:23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한 해를 뒤돌아보며 감사했던 일과 아쉬웠던 일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다시 일어섭니다.
● 너 성결키 위해 (찬송가 420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21:1-25
● 제목 : 사사기 강해를 마치면서
1)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총회는 대승을 거둔 이후 그들의 행보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① 본문 1절(5-12절):

② 본문 2-4절:  

2) 영적 랜덤으로 살아온 그들의 죄악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① 본문 21절: ‘하탑’의 의미, 삼하 12:1-4절, 겔 16:49-50절:

② 본문 24절, 왕상 21장, 마 11:16-17절:  

3) 말씀의 적용을 통해 영적 랜덤의 삶을 이길 수 있는 나의 비법을 나누어 봅시다.
① 폴 워셔 목사: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단지 칭의(稱義)에만 국한되지 않고 실질적이고 식별할 수 있는 성화(聖化)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② 롬 12:15절:

③ 내 삶의 적용: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의 온전한 회복을 위하여
  ② 2014년의 유종의 미를 거두는 송구영신예배가      되도록
  ③ 기도에 전심전력 할 수 있도록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중보하기
  ➁ 송구영신예배에 가족들과 함께 참석하기
  ③ 연말연시를 세속적 가치에 물들지 않고
    복음으로 승리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12월 2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104번 째 강해)
본문 : 사사기 21:1-25
제목 : 사사기 강해를 마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갑의 횡포가 더해가는 것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기초해 있기 때문입니다. 김준형, 윤상한 교수의 공저인 ‘언어의 배반’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인간의 철저한 이기성은 오늘의 시대 뿐 아니라 본문에서도 보이고 있습니다.
가나안 점령 초기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총회는 베냐민 지파와의 세 번 걸친 전쟁 끝에 극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 총회 공동체는 서로 합의를 하여 어떤 경우에든 자기 지파의 딸들을 베냐민의 남은 600명에게 주지 말자고 합의 했습니다(1절). 그런데 이어지는 2-4절을 보면 이스라엘 총회는 그런 결의를 해놓고 벧엘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다시 번제와 화목제의 제사를 드리면서 2절에 벧엘에서 하루 종일 울었다고 보고합니다. 전쟁을 할 때는 잘 몰랐지만 자신들이 행한 전쟁의 승리는 승리가 아니라 패배였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본문 3절). 베냐민의 멸절이 불행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입니다. 죽일 때는 잔인하게 죽여 놓고 결과를 보니 형제 지파 하나가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을 직시한 이스라엘 총회는 하나님께 원망 섞인 토로함을 피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의 삶이 아닌 랜덤의 삶을 살고 난 뒤 찾아온 영적인 망가짐, 그리고 패배함을 경험한 뒤에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로 돌리는 기막힌 불신앙은 우리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총회는 베냐민의 완전한 멸절을 막아내는 것이 베냐민과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요단 동쪽에 위치해 있는 야베스 길르앗 거민들을 응징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12,000명의 정예 군사들을 선발하여 야베스 길르앗으로 보내 남자를 알지 못한 여자 400명만을 남겨둔 채로 모조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베냐민의 살아남은 군사 600명을 위해 또 다른 동족의 한 공동체를 진멸하는 아이러니한 행동을 저지르고 맙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지만 사사기 역사가는 랜덤의 시대였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음을 낱낱아 고발합니다. 자기들의 딸은 주지 않기로 맹세해 놓고 베냐민의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 야베스 길르앗의 거민들 중 처녀 400명만을 남겨둔 채로 또 다른 죄악을 총회가 자행했지만 아직도 처녀가 200명이 부족한 현실이었습니다. 총회는 악의 절정을 보여 주고 있는데 600명의 살아남은 남자들과 화해를 하고 그들에게 이렇게 악을 도모하라고 종용합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땅인 실로에서 매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축제가 열리는 데 그곳의 포도원으로 잠입해 들어가 숨어 있다가 춤추러 나오는 실로의 처녀들이 있으면 그녀들을 붙들어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으로 돌아가라는 계략이었습니다.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본문 21절).
이 구절에 사용된 ‘붙들어 가지고’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하탑’은 매우 나쁜 단어의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로 직역하면 ‘유괴하다. 납치하다.’라는 뜻입니다. 유괴하는 것은 힘이 없는 대상을 향하여 힘이 있는 자가 가하는 물리적인 폭력입니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폭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총회가 한 때 피를 흘리며 싸우던 적이었던 베냐민 지파의 600명에게 알려준 악의 절정은 아연실색하게도 납치하여 강간한 뒤 너희들의 아내로 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총회입니다. 그런데도 본인들의 지파에서는 딸들을 베냐민 지파의 남자들에게 딸을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는 이 악행을 ‘알고 준 것이 아니라 납치를 당한 것’이기 때문에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였습니다. “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본문 22절).
이런 해괴망측한 논리로 죄악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 시대가 랜덤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기가 막힌 이러한 일을 자행하고 난 뒤의 이스라엘 총회, 베냐민 지파의 결국이 각각 자기의 지파,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혀 요동함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수많은 애꿎은 형제와 자매들을 살해하고, 납치하고, 강간한 뒤에도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아무런 일이 없었고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냥 일상의 삶을 돌아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본문 마지막 절이 대답을 해 줍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랜덤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얻을 영적인 교훈은, 1. 영적인 랜덤의 극치는 극단적 이기주의임을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총회는 이 극치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내 것은 안 되고 네 것으로 하라는 정의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이기주의의 절정을 보여 주는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 총회의 무리들이었습니다. 자기 지파의 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의 지파의 한 부족을 멸절시키는 것을 당연시 했습니다. 자기 지파의 딸들을 지키기 위해 남의 지파의 딸들을 강간하고 납치하는 일에 눈감았고 공범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죄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하 12:1-4절을 보면 다윗의 범죄에 대해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대화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나단이 다윗을 책망하기에 앞서 비유로 말하고 있는 이 대목에서 나단이 지목한 다윗의 범죄를 밧세바를 취한 간음이나우리야를 죽인 살인죄라고 말하지 않고 부자가 자기의 양을 잡아 손님을 대접하지 않고 가난한 자의 한 마리 양을 빼앗아 그것으로 대접한 이기성이라고 선포합니다. 간음의 근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내 여자가 아닌 남의 여자를 갖고 싶어 하는 이기주의입니다. 남을 죽이는 살인죄의 근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남의 소유를 빼앗아 나의 소유로 만들겠다는 이기주의입니다. 죄의 모든 뿌리는 이기주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사사 시대의 랜덤의 시대에서 행해졌던 어처구니없는 영적인 망가짐에서 벗어나고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I am because you are.’ 즉 우분투(ubuntu)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흔히 말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극심한 성적타락이라고 말하지만 에스겔 예언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예언의 소리를 대언합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에스겔 16:49-50절). 이타적인 삶을 살지 않자 소돔은 극도의 이기적 도성으로 변질되었고 그것이 불행의 단초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사 시대보다 더한 이 랜덤의 시대에 오늘의 소돔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타적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 믿고 진짜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기적인 삶이 아닌 이타적 삶을 사는 것이 나타나는 자라는 가르침입니다.

2. 무감동, 무감각의 2무에서 벗어나는 것이 영적 랜덤을 극복하는 방법임을 직시하십시다.

본문 24절에서 두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돌아갔더라’입니다.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르고 돌아간 것이 전부인 사사 시대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무감각, 무감동입니다. 열왕기상 21:16절을 보면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아합의 비극은 나봇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포도원으로 내려간 것이었습니다. 일국의 왕이 나봇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하여 모를 리 만무인데 억울하게 죽은 나봇에 대한 아합의 반응은 열왕기상 21장에 보이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기자가 아합이 그냥 내려갔다고 기술한 것은 아합의 무감각과 무감동에 대한 무거운 고발입니다. 우리 시대의 아픔은 영적인 몸져누움조차 없고 아니면 몸져누움의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해 보려고 하지 않고 영적으로 고민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위대한 대서사시인 로마서의 행동 편이 시작되는 12장에서 1-11장의 교리를 믿는 자들이 행하여할 수칙으로 선포한 강령 중에 로마서 12:15절의 가르침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무감각, 무감동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마태복음 11:16-17절에서 주님께서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하셨습니다. 피리를 불면 춤추는 것이 정상이고 누군가가 울면 가슴을 쳐 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이 감동이고 그것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의 감각입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랜덤화 되면 무감각과 무감동의 2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영적으로 둔감하거나 이기적이지 마십시다. 도리어 날마다 주의 말씀에, 주의 은혜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합시다. 동시에 그 민감함으로 인해 날마다 감동으로 살아 이 무시무시한 오늘의 사사 시대보다 더한 2015년의 랜덤의 시대를 넉넉히 이겨 나아가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