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12.07 셀 사역2024-04-22 15:2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성탄 축하의 밤 축제 행사 준비와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께 가오니 (복음성가)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 305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20:17-35
● 제목 : 너나 잘하세요.
1) 이스라엘 총회가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에서 얻은 결과를 분석해 보자.
① 1차 전쟁의 결과에 따른 원인 분석과 하나님의 의도는?
② 2차 전쟁
③ 3차 전쟁  

2) 1항의 분석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교훈은 무엇인가?
① 설교의 테마와 관련하여 적용해 보자.
② 설교의 1인칭 화.
③ 토마스 롱 교수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 대들지 않기.  

3) 실습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① 너나 잘하세요. (반드시 주의할 것 - 나에게 내가 말하는 것이다.)
② 고백 뒤에 행함에 대한 결단들을 구체적으로 나눈 뒤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지명 방어 대상자들의 영적 결실을 위하여
  ② 중보가 필요한 지체들을 위하여
  ③ 성탄절 행사를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중보하기
  ➁ 수요기도회 참석하기
  ③ 성탄 축하의 밤을 위해 준비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12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102번 째 강해)
본문 : 사사기 20:17-35
제목 : 너나 잘 하세요
  신앙의 연수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날마다 새겨야 하는 것이 말씀 적용의 1인칭화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의 기사에서 보이는 베드로의 반응처럼 자신에게 제 2의 사명이 주어지는 은혜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개인화를 부담스러워하는 베드로를 보며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신앙적 덕목이 나에게 주어진 말씀의 성찰을 통해 알게 된 은혜와 진리를 삶으로의 적용해 나아가는 것은 곧 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1인칭인 나에게는 너무 관대한 것에 대하여 심각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베냐민이라는 형제 지파와 일전을 치러야 하는 내전의 소용돌이 안으로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총회의 군사력은 400,000명이었고 베냐민의 군사력은 26,700명이었기에 이 싸움은 이미 판세가 기울어져 있는 전쟁이었지만 총 3회에 걸쳐 벌어진 내전의 승패는 ① 17-21절: 첫 번째 전쟁 – 패배, ② 22-25절: 두 번째 전쟁 – 패배, ③ 26-35절: 세 번째 전쟁 – 승리 로 마무리되었습니다.
  40만 명이나 되는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 총회는 당시 신앙적인 구심점의 역할을 하는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여쭙는 모양새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과 싸울까요?’ 라고 묻자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가라고 반응하셨습니다. 유다 지파는 전열을 정비하고 기브아로 올라가서 전투를 벌렸으나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전투에서 유다 지파는 22,000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합니다. 왜 하나님도 올라가라고 하신 전투에서 패했을까? 그들은 고민했을 것입니다.
  대체적인 성서학자들의 의견은 두 가지입니다. ① 이 전쟁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전투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벧엘로 올라와서 다짜고짜로 하나님께 이렇게 강요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유다와 싸우리이까?” 이 물음은 하나님을 식물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질문이었습니다. 적어도 이스라엘 총회가 벧엘로 올라와서 하나님께 전쟁에 대한 질문을 하려 했다면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 선은 이렇고 후는 이런데 우리가 형제 지파인 베냐민과 싸우는 것이 맞습니까? 전쟁을 하는 것이 맞습니까? 안 하는 것이 맞습니까?”그런데 이스라엘 총회는 이런 하나님께 대한 예의를 상실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는 데 발 빨랐습니다.
  ② 하나님께서 승리를 약속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올라가라고만 하셨지 승리를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전쟁을 이스라엘에게 선포하실 때 “내가 저들을 네 손에 붙여 주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전투에서 이 약속은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22,000명을 잃은 이스라엘 총회는 벧엘로 돌아와 하나님께 밤새 운 뒤에 전열을 정비하고 성소로 가서 하나님께 두 번째로 묻습니다(본문 23절).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두  번째 전투에 나아가기에 앞서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내 형제 베냐민과 싸우리이까?” 맨 처음 해야 할 질문을 두 번째 드린 것입니다. 우리들이 행하는 전투가 옳은 전투인가? 에 대한 정체성 문제에 대해 격론이 오고 갔으나 결론은 또 스스로 관대하게 진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총회를 향하여 하나님은 또 냉랭하게 올라가서 싸우라고 하십니다. 이 두 번째의 주님 말씀에도 유감스럽게 승리의 약속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전투의 결과는 18,000명이 전사합니다. 모양새를 갖춘 것 같은 두 번째의 전투에서도 희생자의 수가 조금 줄었을 뿐 이스라엘 총회의 패배로 결말이 납니다.
  이 두 번째 전투를 통해 주시는 교훈은 이 전쟁의 승패는 사람의 전술, 계획, 명분, 방법에 있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번째 전투에서도 승리를 약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일으키게 된 레위 사람의 소위가 악함을 깨닫게 하시는 의도가 농후한 전쟁이었음을 알게 하고 싶었던 것이 맞습니다(본문 26절).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두 번째의 패배는 공동체 전체의 충격이었음을 단적으로 보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도무지 패배의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모든 공동체의 지체들이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답을 요구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랜덤의 시대에서 드디어 나름 여호수아 시대의 영적인 방향으로 그들의 태도를 터닝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26-27절입니다.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두 번의 패배를 경험한 이스라엘 총회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영적인 돌이킴 뒤에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이어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드린 번제는 하나님과의 단절에 대한 회개였습니다. 화목제는 베냐민과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급전직하한 공동체와 단절한 것에 대한 회개였습니다. 드디어 패배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과의 전투가 정의의 전쟁이라고 믿었습니다. 마땅히 악을 제어하는 공의의 전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심판에 대한 목소리는 높였지만 자기들의 죄악에 대한 성찰은 배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못된 전쟁을 하나님께 무조건 사인하라고 압박했습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베냐민과의 전쟁을 자신들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결론까지 맺은 뒤에 하나님께 보고한 뒤 사인을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인의 뜻은 하나님 없는 전투, 하나님과 관계없는 전투의 결과를 맛보게 하심이었습니다.
  두 번째의 전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스라엘 총회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전투가 쓰라린 패배로 끝나자 이스라엘은 드디어 하나님을 무시한 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얻게 된 그들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번제와 화목제였습니다(본문 28절).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시는지라” 이스라엘 총회의 질문이 180° 바뀌었습니다. “내 형제 베냐민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28절 중반절) 
  이제 본인들의 죄를 깨닫고 이 전쟁의 근본에 대하여 하나님께 질문하기에 이릅니다. “내 형제 베냐민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나님의 답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본문 28절b)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이것이 정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파악하는 것, 이것을 파악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그들을 승리하게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답을 들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총회는 결국 베냐민 군사 25,000명을 전멸시키는 승리를 얻게 됨을 본문 29-35절이 보고합니다. 이상의 본문 주해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테마를 받으십시다. *남이 아닌 나를 직시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오늘의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나에게 냉정하기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덕목이요 요소입니다. 바울은 신약시대에 살았던 사람 중에 예수님의 삶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이후의 바울 사역을 기록한 저자 누가는 그의 행적을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동선과 거의 의도적으로 프레임을 맞추어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갈릴리에서의 사역하신 예수님의 전도 여행에 빗대어 안디옥을 포스트 삼아 이방 지역을 전도 했던 바울의 행적을 그렸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심각한 고난과 핍박을 받은 예수님의 동선을 빗대어 바울도 밀레도 항구를 떠나 예루살렘을 올라간 뒤 심각한 핍박을 받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결국은 핍박의 끝으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처럼 바울은 로마의 단두대에서 순교를 당함으로 동일시시키는 치밀함까지 누가는 바울을 예수님의 가장 근접한 사도로 선포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근접 모델로 누가가 그리고 싶었던 바울, 그는 스스로 자기를 정의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절”,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15절 하반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린도전서 9:27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8-10절” 바울은 자기에 대하여 날마다 직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답이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한 바울을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이방의 사도로 마음껏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의 행동 강령 중에 ‘성서적 앎을 실천적 삶으로 연결하기’라는 표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리얼 크리스천으로 살 때만 제이미 스나이더 목사가 질문한 “당신은 주일이 없어도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그리스도인인 줄 알게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자기의 삶 속에서 창문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 삶을 살지 말고 거울로 자기 자신의 나를 보는 삶을 살라고 권합니다. 내 삶의 밑줄을 긋는 사람이 되십시다. 다른 사람들이 삶에 빨간 줄을 긋든 파란 줄을 긋든 상관하지 말고 내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삼아 밑줄을 긋는 삶을 살기를 기대합니다. 나에게 철저히 냉정하여 나를 직시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시는 위대한 도구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