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11.30 셀 사역2024-04-22 15:2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① 지명 방어 대상자의 영혼 구원을 위한 사역을 금년 연말까지 연장하는 결실을 맺기 나누기(2)
② 12월 성탄 축하의 밤 행사를 위한 준비 나누기(2)  

 
경배와 찬양 (WORSHOP)

● 왕이신 나의 하나님 (복음성가)
● 예수 우리 왕이여 (찬송가 38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20:12-16
● 제목 : 목숨을 걸 데 걸어야지
1) 본문에 기록된 내전이 발발하기 직전 이스라엘 총회와 베냐민 지파에 대한 유감을 나누어 보자.
● 이스라엘 총회에 대한 유감
● 베냐민 지파에 대한 유감  

2) 설교를 통해 나누었던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의 본말전도 내용을 살펴보자.
● 사도들의 본말전도
● 돌이킨 본말전도를 통해 원상으로 회복된 예루살렘 공동체의 실질적인 내용은?
● 교회에서 적용해 본다면?  

3) 주일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결기해야 할 본질은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나는 어떤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에 대하여 심도 있는 나눔을 나누어 보자.
● 성도의 결기(䤿期: 단단히 새기고 결정하는 것)할 본질
● 삶에서 행할 구체적인 신앙적 행위들 :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지명 방어 대상자들의 영적 결실을 위하여
  ② 중보가 필요한 지체들을 위하여
  ③ 고입과 대입 수험생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중보하기
  ➁ 수요기도회 참석하기
  ③ 성탄 축하의 밤을 위해 준비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11월 3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101번 째 강해)
본문 : 사사기 20:12-16
제목 : 목숨을 걸 데 걸어야지!

  오늘날 현대인들의 비극 중에 하나는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살라고 종용하여 분별력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찰이 없을 때 전혀 중요하지 않는 것에 집중함으로 비극을 맞을 수 있음을 오늘 본문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레위인이 보고한 일방적인 보고만을 듣고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 대한 분명한 심판을 결의한 12지파의 두령들은 보병만 400,000명이 모인 상태에서 베냐민 지파에게 사람을 보내어 레위 사람에게 행한 악행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그 천하에 공로할 만행을 저지른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끌어내어 넘기라는 최후통첩을 합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총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일전도 각오한 군사를 모집하여 양손을 매우 잘 쓰는 훈련된 군사들 700명과 일반병사 26,000명 도합 26,700명이 모여 400,000명 대 26,7000명의 내전이 발생합니다(본문 13-14절). 이스라엘 총회와 베냐민 지파의 전투는 숫자 싸움에서 이미 승패가 결판이 난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총회는 의외로 두 번이나 국지전 전투에서 패배한 후, 결국 세 번째 전투에서 대승하여 이스라엘 총회의 승리로 끝나지만 결국 이 전쟁은 승리자가 없는 모두가 패배한 전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 진영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우여곡절 끝에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지만 그 전쟁의 대가가 컸습니다. 1, 2차 전쟁의 패배(1차 전쟁 22,000명, 2차 전쟁 18,000명)로 도합 40,000명의 군사들이 사망하는 고통이 임했고, 베냐민 지파는 26,700명의 인구들 중에 25,100명이 멸절을 당하고 1,000명은 실종되었거나 죽음이 무서워 탈영한 자들일 가능성이 크며 600명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습니다(20:35절). 라헬의 소생이자 특별한 은혜를 받았던 베냐민 지파에 남은 남자의 수가 고작 600명이라는 사실은 이 내전의 비극이 얼마 컸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을 양산한 이스라엘 총회는 그래도 전쟁 이후 한 형제 지파인 베냐민 지파의 완전한 괴멸이라는 파국을 막기 위해 다른 이방의 여인들을 납치해서 베냐민의 600명 남자들의 아내로 주는 엽기적인 또 다른 범죄를 저지릅니다(삿 21장). 자기네 지파의 여자들을 베냐민 지파에게 시집보내기를 거부한 이기성 때문에 이렇게 극악한 방법으로 동족 살리기에 나서는 어처구니없는 만행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서 또 다시 자행되고 있는 이유는 랜덤 시대이기 때문입니다(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내전의 비극은 분명히 영적으로 또 다른 이유에 기인하고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겉모양 신앙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사자성어 본말전도(本末顚倒)를 풀이하면 ‘본(本)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말(末)로 취급하고 대신 末을 本처럼 거꾸로 대입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범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겉모양 신앙의 가장 심각한 아킬레스건은 본말전도입니다.

1) 이스라엘 총회
  레위 사람이 보낸 시신에 대한 충격적인 사건을 만난 이스라엘 총회는 신중을 기해 분별력이 있게 행동했어야 합니다. 어떤 사건이든 그 사건을 가장 지혜롭게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은 사건의 쌍방을 공평하게 이해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일방적인 이야기만을 듣고 그 이야기가 진짜인 양 가늠하는 것은 지성적 행동도 아닐뿐더러 영성적인 혜안을 갖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적어도 이스라엘 총회는 레위 사람의 극단의 행위에 대하여 비판적인 신중함을 기해야 했음이 마땅합니다.
  레위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준행하는 자로서 시신을 훼손하거나 시체와의 일체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신을 보낸 자가 레위 사람인 것과 동물의 사체가 아닌 사람의 사체를 12토막을 내어 보낸 사건이라면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레위 사람의 행위를 먼저 진단했어야 마땅합니다. 적어도 이런 영적인 신중함과 분별력을 갖고 대처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은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총회는 이런 본(本)을 무시하여 말(末)의 각설을 본(本)으로 착각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하여 돌이키지 못할 전쟁의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 비극을 경험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결코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할 일에 목숨을 건 미련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2) 베냐민 지파
  이스라엘 총회는 베냐민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기브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에게 악을 행한 불량배들을 내놓으라고 압박을 가합니다. 그들을 죽여 일벌백계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입니다. 단순한 세포적 감각으로 죄를 지어 신앙공동체를 더럽히려고 했던 자들을 심판하겠다는 것은 정당성이 있는 요구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내적인 분위기는 전통적으로 신앙적이었기에 두령들이 기브아 불량배들을 일벌백계하려는 차원에서 범죄자를 인도하라고 했지만 베냐민 지파는 집단적 패역의식으로 단호하게 거절함으로서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기 위함이라는 상식적 제안을 악으로 거절한 셈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같은 지파 공동체의 일원들이라 할지라도 악을 행하였다면 마땅히 그 악에 대하여 판결과 심판을 받도록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고 바른 방향성인 것인데 집단적 패역함으로 패역한 몇 사람의 죽음으로 끝날 수 있었던 사건이 지파 공동체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괴멸되는 비극을 초래한 실수를 확대한 것입니다. 이 또한 본말을 전도시켰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부흥하며 성장하던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 문제로 인해 분열될 뻔한 위기를 극복한 기사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과부들이 있었는데 아람어를 잘 쓰며 히브리적인 전통에 계대를 이루며 살던 여인들과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하던 헬라어를 쓰던 과부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공용어가 헬라어였기에 불편이 없이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굳이 배우지 않았던 이 여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태어나고 거주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부모들이 고향을 떠나 헬라지역에서 살다가 다시 이스라엘로 이주한 자들이다 보니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안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주류에 의해 비주류가 상대적 박탈감을 받게 된 점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구제 사역이었습니다.
  이 비주류의 여인들은 세속적 예루살렘 공동체에서도 조국을 떠났던 자라는 비토를 당하며 많이 힘들었는데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구제가 히브리어를 하는 과부들에 비하여 상대적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의 지도력은 히브리적인 사도들도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갈등이 점점 불거져 과부의 구제 문제로 야기된 것이 히브리파와 헬라파의 파벌 헤게모니 싸움으로 번져나갔기 때문입니다. 감정싸움으로까지 치닫던 이 사건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 사도행전 6:2-4절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12사도는 히브리적인 전통의 지도자들로서 예루살렘 공동체의 제 2그룹 지도자들을 향하여 본인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2선으로 물려놓고 부차적인 접대에 공을 들였던 본말전도에 대하여 사과를 한 후 본이 말이 된 것에 머물지 않고 원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으로의 회귀를 합니다. 末로 천덕꾸러기 화 되었던 말씀 전함과 기도의 전무함을 本으로 바꾸는 혁명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구제 사건의 깨달음을 통하여 이제부터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말씀 선포와 기도라는 사역에 올인 하겠다는 선포를 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접대의 사역을 맡은 7명의 집사(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전부를 헬라어를 쓰는 섬김이로 임명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들은 아람어로 말하는 예수님의 활동 내용, 그리고 가르침과 교훈을 주는 히브어로 드려지는 예배에서 당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이제는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예배하게 해 주었다는 파격이 담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걸어야 할 本과 그렇지 말아야 할 末에 대한 분명한 선을 긋는 획기적인 실천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영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체의 것에 쓸데없이 목을 걸지 않겠다고 선포한 반면에 베냐민 지파는 그 반대의 길에 서서 쓸데없는 것에 목을 걸었습니다. 영적으로 잘못된 패거리 의리에 집착되어 죄를 다스려야 공동체가 바른 방향성을 갖고 나간다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베냐민지파는 엄청난 비극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측면의 적용을 통해 얻게 되는 중요한 교훈은 신앙인의 결기는 겉모양 신앙이 아닌 말씀대로 살겠다는 말씀 신앙의 사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교훈입니다. 인도에 있는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무덤인데 그 안에는 이 건축을 주도한 무굴 제국 황제인 샤 자한의 아내인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의 석관이 있습니다. 본은 무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모양새에 목숨을 걸지 말고 내적인 신앙의 영성 소유가 필요합니다. 마치 초대교회 사도들이 실천했던 말씀과 기도하는 삶의 전무함처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신 살아 있는 말씀들을 적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기독교에서 믿는 경전이고 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듣는 말씀으로 사장시켜버리는 죽은 말씀이 아니라 오늘도 나의 24시간의 현재 안에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조명하시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그런 자존감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니다. 말씀이 나에게 적용될 때 나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승리들을 보고하는 영적 내공에 목숨 거십니다. 겉모양 신앙이 아닌 말씀대로 살겠다는 말씀 신앙에 목을 거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