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계획서를 입력하면서
아세아연합신학대학 신학대학원 2학기 수업 계획서(syllabus) 입력을 완료했다. 작년 수업과 같은 과목이지만 첫 번째 강의를 하면서 조금 아쉬웠던 내용들을 보강하기 위해 지난 달부터 보충 계획을 세웠고, 그 플랜 자체가 원활하게 이루어져 작년 2학기 때보다는 더 알찬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작년과 동일하게 이번에도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5,6차생들이기에 소위 말하는 발등에 불 떨어진 목사 후보생들이다. 강의 계획서를 준비하면서 내내 든 생각이 있다. 이번 학기 제자가 될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다. 종이 선지동산을 졸업하고 목회 현장으로 나가던 1987년은 그래도 교회가 부흥되던 시대였다. 80년대 초반의 부흥의 기세가 많이 꺾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교회 간판만 달면 나름 목회가 되던 시대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선배 목회자들이 피 흘리며 뿌린 씨앗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뿌린 씨앗을 나는 운 좋게 주워 먹을 수 있었던 시대를 풍미하며 젊은 목회자 시절을 보냈다. 허나 내가 선배가 된 작금, 후배들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한 것은 그들도 나처럼 추수할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뿌려놓은 씨앗이 없어 그들이 거둘 열매를 만들어 놓지 못한 탓 때문이다. 지금의 교회가 이 지경이 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예언자적인 통찰로 후배들을 위해 무언가 남겨놓은 선한 결과물들을 넘겨주어야 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자책이 자꾸만 들어 후배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의도적인 소망을 품어본다. 예언서에 등장하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갈 하나님의 사람들은 전적으로 그루터기들이었고, 남은 자였으며, 외로웠지만 ‘미슈파트’와 ‘체다카’의 행함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창조적 소수들이었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실낱 같은 희망 말이다. 부족한 사람이 또 한 학기, 선지동산에서 학생들과 또 한 학기 씨름하고 달려갈 내용은 이론 신학이나, 조직 신학이 아니다. 정글 같은 목회 현장에서 단 한 명의 영혼을 위해 선택해야 할 목회자로서의 삶을 나누는 과목이다. 더불어 텍스트에 너무나 함몰되어 있는 교회의 교리적 담론들을 콘텍스트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융합시켜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모두의 리그’가 되도록 할 수 있을까를 함께 연구하는 실천신학적 응용(PRAXIS)의 과제이기에 더욱 어깨가 무겁다. 지난 달, 미국 애틀랜타 연합감리교회에서 사역하는 김세화 목사가 쓴 ‘눈을 두 번 감았다 뜨세요.’라는 목양 수상집에서 눈에 띄는 이런 글을 읽었다. “주관적인 자기 이해가 점점 더 강조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판단만을 절대시하다가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p,303.) 이렇게 갈파한 저자가 이 글을 수록한 글 제목은 ‘내가 아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이다. 곱씹고 또 곱씹어 보았는데 금언 중에 금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학기를 다시 학생들과 공부하면서 ‘포스트 휴먼시대에서 트랜스 휴먼시대로 옮겨가고 있는 긴박한 시대“(박일준 박사의 노트에서)를 살아가고 있는 학생들이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과 이미 기득권자가 되어 버린 부족한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학습된 내용들을 비추어 접목해 보면서 미력하나마 후배들과 한국교회를 위해 조그마한 기여를 남겨보고 싶다. 얼마 전, 아들과 대화를 하다가 죽은 후, 더 많은 철학적 감화를 나타내고 있는 자크 데리다의 말을 전한 적이 있었다. “신학이란 진리를 상황 속에 대화시키는 것이다.” 한 학기, 이 치열한 담론들을 학생들과 나눌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뛴다. 최선을 다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