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서른네 번 째 강해) 제목: 준비하여야 합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9:1-5 서론) 2014년에 읽었던 최고의 책을 선정하라고 하면 저는 조금도 주저 없이 시카고대학에서 기독교윤리학을 강의했던 랭던 킬키 교수가 쓴 ‘산둥 수용소’를 말하곤 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빌미가 된 일본의 진주만 공격 시점에 킬키는 북경에 있는 연경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중국에 있었던 미국인들을 점령국 일본은 산둥에 있는 위현 수용소에 구금하는데 이로 인해 킬키는 약 2년 6개월에 걸친 시간동안 수용소에서의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인간의 다양한 군상들의 밑바닥 생활을 경험한 것은 물론, 특히 기독교신앙을 갖고 있는 자들의 적나라한 위선들 즉 삶과 말씀이 전혀 매치되지 않는 이율배반의 가증함을 피부로 경험하게 됩니다. 킬키는 먹을거리를 가지고 머리가 터지게 싸우던 수용소내의 사람들이 다름 아닌 지식인들이었고, 크리스천들이었다는 데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렇게 적나라한 악한 인간의 본성을 경험한 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이유로 킬키는 수용소에서 나와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고향 시카고에서 풍요에 넘치는 먹을거리. 입을 거리에 파묻혀 살면서 산둥 수용소에서 경험했던 자신의 내적 궁핍함보다 오히려 자유의 몸이 된 시카고에서의 삶이 더 곤고하게 피폐한 영적인 상태임을 경험하는 아이러니에 괴로워하며 이렇게 독백합니다. “음식에 파묻힌 느낌이었다. 끝없이 쏟아지는 엄청난 지방과 칼로리, 비타민에 빠져 익사할 것 같아 밖으로 나왔다. 잠시 후,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배급을 타는 어려움이 끝났다며 안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나는 진짜 부유함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수용소 생활은 끝났지만, 그 생활은 여전히 내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분명했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수용소의 삶과 여기의 삶 사이에는 어떤 연결이 가능한 것일까?”(P,421) 어쩌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한 부분의 비극은 빈곤함의 비극이 아니라 풍요로움의 비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킬키는 보고한 것입니다. 저 역시 그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전 세계의 10%가 전 세계의 90%가 가져야 하는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학자들의 말대로 우리가 한 가족으로 살고 있는 지구촌은 불공평한 것투성입니다. 문제는 이 불평등의 경제적 구조가 전혀 바뀔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나라와 그 나라들의 백성들이 갖고 있는 게으름과 나태함이라는 부차적인 이유가 분명히 빘는 것이 사실이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10%의 부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 자국적인 이익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정책 때문입니다. 극단의 예를 하나 들자면 유럽연합에 의해서 자행되는 농업 정책과 같은 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유럽연합에 속해 있는 잘 사는 나라들은 자국의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한 농업 보조금을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 물질을 토대로 그 나라들의 농민들은 별로 힘들이지 않는 최첨단의 시스템을 가동하며 질 좋고 가격 경쟁에 있어서 값싼 농산물들을 만들어 제 3 세계나 남반구에 있는 가난한 나라에 무차별적으로 수출하며 이익을 창출합니다. 외세의 막강한 자본력을 무기로 한 농산물을 받아들인 남반구에 있는 가난한 나라의 농민들은 이로 인해 설 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남반부에 위치해 있는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은 가격경쟁력이나 품질에 있어서 유럽 연합 국가의 농산물에 상대가 되지 않기에 줄줄이 도산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의 구조에 희생당하는 양이 되고 맙니다. 장 지글러는 아프리카 53개국 중에 37개국이 순수한 농업 국가인데 이 나라들은 유럽연합국에 의해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들의 농업은 유럽 연합에 의해 체계적으로 파괴되고 있다.”(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p,21.) 이런 차원으로 접근할 때 강대국이 휘두르는 맘몬은 그들이 섬기는 최적의 우상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랭던 킬키는 너무 풍요로운 미국의 상류사회에 있는 지적인 신앙인들에게 서늘한 비수를 산둥 수용소 말미에 기록합니다. “죄란 유한한 대상에게 궁극적인 종교적 헌신을 하는 것이다. 즉 죄란 자아와 자의 실존, 또는 자아가 속한 집단에 최우선적인 관심과 헌신을 기울이는 것이다.”(산둥수용소, p,432) 그렇다면 이런 나름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물질은 사용하는 자와 방법에 따라 가치중립적인 객체가 된다는 점 말입니다. 이런 비유가 맞을까 싶습니다. 칼이 강도에게 주어지면 악한 도구가 되지만, 엄마의 손에 쥐어지면 사랑의 도구가 되듯이 물질도 사용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 가장 사악한 도구가 될 수 있는가 하면, 가장 아름다운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해석 말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이 땅의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2020년 아무리 둘러보아도 샬롬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샬롬보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도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해서 오늘을 사는 세속의 사람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린다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더 각박하고, 계산하며, 영악해지려는 것에 몰두하는 듯한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해서 저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 해석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며 품어야 하는 신앙의 태도를 끌어올림으로 대림절 시기에 살아내야 할 성도 공동체의 기본적 자세에 대해 나누어 볼까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텍스트는 8장 메시지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지체들의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함께 이방 교회 형제들이 짊어지기 위하여 1년 전부터 이방 교회 즉 마케도냐 교회, 갈라디아교회, 그리고 아가야 지방 교회까지 아우르는 거 교회적인 구제연보 사역을 선언했고, 각 교회들로부터 형제의 사랑이 담긴 구제 연보들을 거두었으며, 어느 정도의 연보가 거두어졌음을 지난 설교를 통해 추적했습니다. 8:20절에 기록에 의하면 거둬진 연보는 적지 않은 거액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구제 연보 사역이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았다는 증언들이 엿보입니다. 어떤 면이 그렇습니까?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를 위한 구제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독려하기 위해 디도와 누가 그리고 바나바, 혹은 아볼로로 추측되는 형제 3명을 동시에 파송했음을 살폈습니다. 헌데 주목할 내용이 본문 1-2절에 있음을 봅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배경 설명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지난 강해를 통해서 예루살렘 형제들을 위한 구제 연보 사역이 두 지역 곧 마케도냐와 갈라디아 지역에서는 원활하게 진행되었음을 이미 살폈습니다. 허나 아가야에 위치해 있는 고린도만이 지지부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음도 아울러 보았습니다. 사정이 이런 데 오늘 1-2절을 보면 조금은 의아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린도교회에 대한 독려와 종용의 의미보다는 도리어 격려와 칭찬의 모드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구제 사역이었습니다. 이 구제 사역에 있어서는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는 별로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이 사역을 잘 감당했다는 말이 1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였습니까? 두 가지의 정보가 1-2절에 있습니다. ① 너희들도 이 사역을 원했다는 사실을 바울이 피력한 점입니다.(1절) ② 아가야 즉 고린도교회에서 성도 섬기는 일에 솔선수범하였다는 사실이 마케도냐 교회의 형제들을 분발시켜 그들도 구제 연보에 최선을 다하게 했다는 어리둥절하게 하는 보고가 있기 때문입니다.(2절)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저는 지난 강해 설교를 통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구제 사역에 미온적이고, 지지부진한 상태임은 물론 심지어는 비협조적인 상태였기에 그들을 독려하고 압박하기 위해 지난 주 설교에서 언급한 세 명의 사자들을 직접 파송하기에 이르렀다고 강해했던 것과는 배치되는 말씀이 오늘 본문 1-2절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어색한 내용을 이해하려면 조금 더 본문 정황에 접근해야 하기에 세밀한 공부에 도전해 보기로 합니다. 우리가 보았던 8:1-2절을 다시 한 번 복기하겠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분명히 바울은 이 편지에서 마케도냐 교회의 형제들이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구제 연보에 최선을 다했음을 피력했습니다. 아마도 이 편지를 디도가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가서 읽었을 것입니다. 그 옆에는 누가, 바나바 혹은 아볼로가 동석했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누가는 지금 바울이 칭찬하는 마케도냐 빌립보 출신의 동역자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에 함께 간 동역자는 누가만이 아니었습니다. 헬라출신으로 수리아 안디옥에서 회심하여 바울과 함께 했던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의 아들인 디도는 누가 뿐 아니라 바나바 혹은 아볼로와도 함께 있습니다. 바나바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구브로 출신의 이방 선교의 1세대 지도자입니다. 혹시 아볼로라면 그는 이집트 북부 지역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학자였는데 그 역시 한 때는 지금 가 있는 고린도 교회의 한 분파를 이끌 정도로 고린도교회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왜 지금 이들을 열거하였을까요? 바울은 8:1-2절에서 마케도냐 교회의 구제 사역은 칭찬했다고 했습니다. 이 칭찬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직설하며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케도냐 교회들의 구제 사역을 칭찬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는 아가야에 위치해 있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보여준 구제 사역에 대하여 칭찬을 하고 있다는 의외입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양쪽을 거론했을까요? 바울이 카멜레온식으로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정치적인 인물이었고 기회주의자였기에 이랬다저랬다 한 것일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담임목사의 해석은 대단히 은혜롭게 접근하는 해석의 결론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한 동역자 세 명의 출신 성분이 다 다른 것처럼, 아가야(고린도교회), 마케도냐(빌립보교회), 갈라디아(수리아 안디옥교회)가 지역적으로 다 다르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 된 형제 공동체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터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1년의 스케줄을 통해 진행했던 구제 연보 사역에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맨 처음부터 태클을 걸고 비협조적인 상태로 바울을 괴롭힌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제 연보 사역이 시작되었을 때 본문의 정황에 의하면 오히려 고린도교회는 예루살렘 돕기 사역에 솔선수범하였고, 모범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사역의 과정 중에 바울을 반대하는 무리들의 발생, 바울의 사도권 시비 등등이 붉어졌고, 그 가운데 바울의 프로젝트에 반기를 드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지난 번 강해에서 언급한 대로 1년 동안의 구제 사역이 지리멸렬할 가능성의 위험이 엿보이자 바울은 세 명의 동역자를 고린도교회에 급파한 것입니다. 이런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바울이 얼마나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배려했고, 세밀하게 신경을 썼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문 1-2절에서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보여준 초창기 구제 연보 사역에 대한 격려와 칭찬을 보낸 바울은 본문 3-5절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남겨 놓습니다. 3-5절입니다.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격려한 뒤에 세 명의 동역자를 보낸 이유에 대하여 역설합니다. 이 설명은 톰 라이트 교수의 해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고린도후서”, IVP, pp,135-136.) ①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이 구제 연보들을 확실하게 준비하여 형제들에게 전달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메시지. ② 구제 연보가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자발적인 사역으로 진행되기를 바란다는 메시지. ③ 이 모든 물질 모금의 사역이 공개적으로 투명성이 있게 진행되기를 기대한다는 메시지. 그렇다면 바울이 세 명의 동역자들을 고린도교회에 파송한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 주의 사역은 철저하게 준비되어야 한다는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본문은 분명히 구제 연보 사역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메시지 교훈의 외연을 조금 더 확장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걸음 할 걸음의 보폭을 걸을 때 영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걸음은 내딛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마음과 심령에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내용이라는 확신과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을 때 보폭을 내딛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당부 겸 독려했습니다.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5절 하반절) 그렇다면 ‘이렇게’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5절 전반절에 있는 ‘미리’입니다. 신학교 시절이었습니다. 화요일과 금요일에 반드시 참석해야 채플이 있었습니다. 화요일은 교수진이 인도하는 채플이었고, 금요일은 학생회에서 인도하는 채플이었습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 선교학을 강의하시던 교수님이 강의 중에 이런 교훈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 순서 중에 가장 은혜로운 순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마다 아마도 다 느낌이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어떤 순서가 가장 아름다운 순서일까를 생각하다가 생각해 낸 순서가 성경봉독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내리시는 하강의 은혜 중에 압권은 특별 계시인 성경 봉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예배를 인도할 때는 반드시 선행한 것이 있습니다. 택해진 본문이 나오면 반드시 암송하는 일이었습니다. 암송으로 성경을 읽는 봉독하는 것과 그냥 보고 읽는 것은 영적 감동의 크기가 전혀 다릅니다.” 바로 그 교수님께서 인도하시는 금요 채플 시간에 성경봉독을 맡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 금요일, 본문 텍스트를 외워 봉독했는데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름 부으심의 은혜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적 감동으로 흘러넘쳤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당시 교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받았습니다. “준비된 예배가 될 때만 예배는 기름부음이 있다.” 억설이 아닙니다. 준비되지 않은 예배에 무슨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12월 사역의 일환으로 마감할 이타적 사역의 대상이 확정되었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10월 초, 새벽예배 시간에 엎드려 기도하는 데 성령께서 조명하신 은혜가 추수감사주일 이후의 섬김 사역이었습니다. 주님이 섬김 사역의 조명을 주셨지만, 어떻게 진행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주시지 않았기에 대상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마음 감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믿고 진행하겠습니다.” 그 날 주님이 제게 주신 조명은 텔레비전에서 만난 연예인 션의 사역이었습니다. 연탄 지원 사역입니다. 주님의 조명하심이라고 확신하여 기도로 준비하였고, 10명의 가정을 선정했습니다. 더불어 대외사역부가 1년 두 번 진행하는 생리대 지원도 함께 12월 중에 진행할 것입니다. 주목하는 것은 미리 준비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정말로 도와야 할 이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 곳도 외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더 필요한 것은 주님이 조명하신 대상에 대하여 선택과 집중하는 사역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사역은 철저한 준비가 대 전제입니다. 주의 일을 감당할 때 그르칠 수 있는 위험성은 조급함과 분주함입니다. 반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조명하심을 전제로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홈페이지 책읽기 란에 링크해 놓은 이정일 작가의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을 읽고 난 뒤에 감동이 너무 컸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옥석이라서 무엇을 버리고 담을까를 고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작가 남긴 감동 중에 하나를 교우들에게 소개하며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설교란 설교문을 준비해서 그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를 준비하여 그를 전하는 것이다.”(이정일,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 예책,p,202.) 이정일 작가의 이 글을 읽다가 소름이 끼쳤습니다. 제게 한 말과 같았고, 저를 뒤돌아보게 하는 문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작가의 말에 반은 긍정하고, 반은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긍정이라 함은 설교는 설교자를 준비시켜 그를 전하는 것이라는 대목에 뜨거운 동의를 표한 대목입니다. 하지만 정중하게 거절한다는 것은 설교문을 준비하는 것을 가볍게 여긴 그의 말입니다. 물론 작가가 말하려는 심정적 의도는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는 이론적인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는 의미를 말한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작가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대목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저는 설교자는 할 수만 있으면 반드시 설교문을 작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설교문을 작성하여 토씨 하나 문법에 틀리지 않게 수고를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① 설교문 작성은 기름 부으심의 현장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문을 작성하고 탈고를 한 뒤에 그것을 갖고 단 위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 원고를 수정하기를 수차례 행하며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동시에 그 설교 원고를 암송하면서 또 다른 기름 부으심을 사모합니다. 설교문 작성의 절차는 내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소리를 내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허용하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가 단 위에 올라가기까지의 준비이기에 설교문 작성은 제게 목숨과도 같이 소중한 주의 사역입니다. ② 공부를 소홀하지 않겠다는 나와의 싸움입 니다. 설교를 작성하여 블로그, 홈페이지에 링크합니다. 뭇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함입니다. 공유는 두려움 작업입니다. 공부하지 않고, 남의 것 복사하고 표절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두려운 과정입니다. 나와의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자 치열한 영적 전투의 과정입니다. 무엇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까? 설교는 철저히 준비할 때만 하나님의 일이 됨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가치보다 더 소중한 일체의 것을 섬기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린 안나와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린 것은 결국 영적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의 행위를 누가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누가복음 2:25-27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기다림은 곧 준비였습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우들이 하나님이 쓰기로 준비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몸이든, 범사의 어떤 것이든 말입니다. 바울이 본문 5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