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비전이 같습니까?
본문: 고린도후서 8:16-24
서론)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은 이렇게 그의 책에서 말했습니다.
“인간됨은 존재의 인간화요, 의미 없이 주어진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변질시킴이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이현주역, 한국기독교연구소,p,124.)
이 글에 밑줄을 그은 이유는 변질이라는 단어에 필이 꽂혔기 때문입니다.
대체적으로 변질이라는 단어는 나쁜 의도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문자적인 의미를 파고 들어가 보면 이 단어가 나쁜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한 가지 경우에는 대단히 고무적이고 긍정적인 단어로 사용되어야 하는 단어임을 헤셀이 말하고 싶었던 것을 번역자 이현주 목사께서 캐치하신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일까요?
강조 또 강조할 만한 무게가 있을 때입니다.
헤셀이 말한 대로 의미 없는 것을 의미 있게 만드는 존재가 피조물 중에 인간 말고 누가 또 있겠습니까?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바로 의미 없는 그 어떤 것을 의미 있는 그 어떤 것으로 바꾸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변형 혹은 변화라는 단어보다는 변질이라는 더 강한 단어로 번역가 저자의 글을 바꾸어 놓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헤셀이 말한 ‘존재의 인간화’라는 철학적 화두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 답을 노동의 시인인 박노해 시인의 시 한 구절로 답하고 싶습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사람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 느린 걸음, p,63.)
저는 시인의 혜안에 적극적인 지지와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존재의 인간화라는 말을 설교자인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또 누군가에게 노래할 이유를 제공하는 사람됨의 현상이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님에게 들은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강덕아, 학교를 갈 때 차 조심해라!
헌데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 즈음, 아버지께서 제게 해 주셨던 말씀은 달랐습니다.
아들, 사람 조심해라!
잘 나가던 사업에 실패하셨던 아버님의 당부를 저는 의미 있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만에 하나, 내가 익명 혹은 기명의 사람들의 입에서 조심해야 할 사람이라는 대상에 들어간다면 어떨까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2008년에 8세 된 여아를 가학적으로 성폭행한 조 아무개가 12년의 형량을 마치고 2020년 12월 13일 만기 출소예정입니다.
벌써부터 그의 출소를 앞두고 그가 살았던 안산시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그의 석방을 반대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음을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조 아무개는 법이 정한 형량을 마치면 그가 저지른 형법적인 죄의 올무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출소하여 자유의 몸이 된다손 치더라도 정말로 그가 자유의 사람이 되었다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이미 그는 사회적으로 사형이 집행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 존재의 인간화라는 철학적 질문에서 배제된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하는 유리된 인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다보니 저는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명 혹은 익명의 사람들의 입에서 건네질 때, 기억하고 싶은 사람, 추천하고 싶은 사람, 자랑하고 싶은 사람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다시 말해 의미 없는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변질시키는 존재감이 있는 사람으로 지금, 여러분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본문으로 여행을 떠나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형제들을 돕는 구제 연보를 걷기 위해 세 사람을 보낼 것을 시사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 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기에 앞서 바울이 왜 이 세 사람을 고린도교회에 파송하려고 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순서인 것 같아 잠시 나누려고 합니다.
마케도냐, 갈라디아, 그리고 아가야까지 대단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방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권했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연보는 약 1년 6개월에 걸친 장정 끝에 마무리가 됩니다.
문제는 마케도냐와 갈라디아 지역 교회 공동체와는 달리 아가야 지역에 위치해 있는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바울의 구제 사역에 비협조적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약 1년이면 가능한 사역이 6개월 정도가 더 지체되었다고 학자들은 동의합니다.
바로 6개월 동안이나 지루하게 시비를 거는 고린도교회 지체들의 구제 연보 비협조 이유는 바울이 구제금이라는 명목으로 거둬들인 거액의 물질을 개인적으로 착복하고 횡령한다는 자의적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에 대하여 바울이 변론하는 장면이 앞으로 볼 12:14-18절에서 보고되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본문에서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의 유감스러운 분위기를 감지하고 본인이 지금 종용하고 있는 구제 연보에 관하여 본인은 전혀 이 물질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관여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선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이렇게 악의적인 누명에 대하여 이렇게 편지에 담아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는 바울의 심정이 아프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악의적인 곡해나 누명 씌우기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기 싫어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교회에 세 명의 신실한 동역자를 선발하여 그들을 파송할 테니 연보 사역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강력하게 종용합니다.
본문에 소개된 바울의 동역자 세 사람 중에 한 명은 이름이 거론된 디도(16절)입니다.
이에 반하여 바울이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본문 18절을 보겠습니다.
“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바울이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보내는 두 번째의 사람은 형제라고 기록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익명의 형제가 지니고 있는 영적 정체성입니다.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받는 자라고 분명히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이 형제는 누구일까?
호주 맥쿼리 대학교의 교수인 폴 바네트의 주석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마도 디도는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읽어주고 이 사람을 소개할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한 가지 가능성은 마케도냐 교회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전도자 누가였으리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우리/우리들’이라는 말이 사용된 최초의 본문이 빌립보에서 끝나고, 또 두 번째 그런 본문은 빌립보에서 시작된다는 사실로 추론할 수 있다. 누가는 그 빌립보에서 8년 동안 사역했기에 그 지역에서 유명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폴 바네트, “고린도후서 강해 BST 시리즈”, pp, 204-205.)
이 주석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더 세부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18절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라고 했을 때 모든 교회는 당시 가장 큰 지역이자 이방선교의 전진기지였던 마케도냐 교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선교의 거점지역으로 삼아 활동했던 제 2차 전도여행의 첫 번째 마케도냐 공략지역이었던 빌립보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지역에서 바울을 도와 동역했던 형제가 바로 누가였기에 바울이 누가를 선발하여 디도와 함께 고린도교회로 파송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해석이 됩니다.
해서 폴 바네트는 첫 번째 익명의 형제를 누가로 선정한 것입니다.
이제 또 한 명,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익명의 동역자를 소개합니다.
본문 22절입니다.
“또 그들과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는 그가 여러 가지 일에 간절한 것을 여러 번 확인하였거니와 이제 그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
역시 바울이 ‘우리 형제’라고 정의한 세 번째의 동역자를 추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23절을 마저 읽어 보겠습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이 세 번째의 형제에게 붙여진 호칭이 사자와 그리스도의 영광이었습니다.
23절에서 바울이 호칭한 별칭을 ‘사자’라고 했는데 헬라어 단어 ‘아포스톨로스’의 번역입니다.
즉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반대자들에게 줄곧 본인의 직위를 변론할 때 사용했던 ‘사도’라는 뜻입니다.
즉 사자는 사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적용해도 절대로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이 위임하여 고린도교회의 구제금을 거두도록 파송한 세 번째의 인물은 바울이 갖고 있는 동등한 영적 권위자라는 해석을 말입니다.
동시에 바울은 세 번째의 동역자에게 대단한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영광’은 가장 존귀한 가치의 상태를 의미하는 ‘독싸’의 번역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본문 23절 번역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인 해석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문맥이 사람에게 형제들에게 주어진 의미로 약간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판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성경 RSV는 바로 이 대목을 조금 더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messengers of the churches, the glory of the Christ’입니다.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인 교회의 사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에 소개한 익명의 인물 역시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이 무례하게 대우하거나 업신여겨서는 결코 안 되는 영적 권위를 갖고 있는 사도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형제일 것이라는 추측은 대단히 적확한 지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의 사도적인 위치와 동등한 레벨이 있었던 바울의 동역자가 누구일까?
미국 휘튼 칼리지의 헬라어 교수인 스캇 하프만은 본인의 NIV 고린도후서 주석에서 이 사람을 두 사람으로 추정합니다.
“바나바 혹은 아볼로로 보인다.” (스캇 하프만, “NIV 적용주석- 고린도후서”,솔로몬,p,420.)
개인적으로 스캇 하프만의 주장에 저는 동의를 합니다.
다만 이 해석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지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소개한 디도, 누가 혹은 아볼로와 바나바 등등을 네 사람으로 형제들로 가정할 때, 함께 공유해야 하는 이들에 대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 바울과 같은 비전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본문 1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바울이 다른 표현을 썼지만 같은 맥락으로 해석한 문구들이 이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① ‘동일한 주의 영광’
② ‘우리의 원을 나타냄’
③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
무엇을 바울이 강조한 것입니까?
적어도 내가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보내는 첫 번째 익명의 형제는 나와 같은 비전을 품고 있는 동역자라는 선명한 선포였습니다.
23절을 다시 봅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디도를 동료이자 동역자라고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익명의 두 형제들을 소개하면서 이들을 앞서 설명 드린 대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교회의 사자(사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같은 사도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같은 길을 걷는 신앙의 길벗이라고 강조한 셈입니다.
이들을 향하여 오늘 본문 마지막절인 24절에서는 바울이 표현할 수 있는 용어의 극치를 동원하여 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교회 형제들이여! 이들 동역자들이 여러분에게 도착하면 여러분들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과 자랑스럽게 여기는 예의를 지켜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요구한 것은 최고의 요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간 목적 구제 헌금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 달라는 당부였습니다.
바울이 왜 이토록 디도 및 파송한 익명의 형제들을 극찬했을까요?
말 그대로 이들은 본문 18절에서 증언하고 있는 그대로 이방교회 공동체가 칭찬하고 있는 당사자들이었으니 마땅히 극찬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바울이 이들을 추천하며 극찬한 이유는 이들 형제들은 바울의 목회신학을 공유하며 함께 달려가고 있는 동역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같은 비전을 갖고 있는 형제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형제들을 위해 우리 이방 교회의 형제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연보를 모아야 한다는 같은 비전을 공유한 동역자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 날개 양육시스템 사역을 가동하며 함께 사역할 때 강조했던 주제절이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전서 1:10절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그렇습니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열매 맺기였습니다.
이 네 가지의 내용이 무엇을 전제한 것이었습니까?
같은 비전 공유하기였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려면 동역의 사역이 필수적입니다.
헌데 이 동역 사역자들이 가져야 하는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두드러진 필수적인 요소는 비전이 같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지역, 문화, 지식, 습관, 행동, 가치관, 음식 습관, 취향,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등등 같은 것보다는 다른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여 함께 나누고, 예배하고, 기도하며, 훈련을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같은 비전 공유라는 큰 그림에 접근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에 열거한 각자의 성향과 기질은 다르지만 교회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면 한 가지는 같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같은 비전 공유할 수 있습니다.
훈련하고 양육을 받았는데도 같은 비전을 공유하지 못한다면 멤버십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같이 가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 이름이 세인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타적인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월요일부터 더 승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서적 앎을 실천적 삶으로 연결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축도 이후가 더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구원 그 이후에 더 집중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한국은행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바깥문에 더 집중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수구적이고 근본주의적인 보수와 극단적 진보 모두를 사양합니다.
우리 세인교회는 철저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기적을 상식이라고 우기는 교회가 아니러 상식이 기본이 되어야함을 지켜가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엔터테인먼트로 승부하는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의 스티그마로 투쟁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신앙생활을 하나의 레저 활동 즈음으로 여기는 유람선 교회가 아니라 공중 권세 잡은 존재와 치열하게 싸우누 군함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캘빈주의적인 교회가 아니라 웨슬리의 신앙의 신조를 따라가는 성결교회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비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세인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지체들은 이 비전에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무관심했다면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갖는 지체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비전과 같지 않으면 이 비전과 같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내 비전으로 하나님의 교회 비전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지체들은 아예 꿈을 접는 것이 좋습니다.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목요일 DPA 2기 사역자 수료식이 있었습니다.
수료자 한 명이 강의를 마치고 났는데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내년도에는 임직자를 세울 예정인데 강사 목사님이 생각하는 자격 조건이 있으면 공유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한 강사 목사들이 함께 이구동성으로 동의한 임직자의 자격조건이 이러했습니다.
높은 학력, 부유한 경제력은 필요하지 않지만 한 가지는 필수적 자격조건이다. 그것은 담임목사와 교회가 제시한 비전을 함께 공유한 사람이어야 한다.
저 역시 100% 동의하는 자격조건입니다.
바울은 디도, 누가, 바나바, 아볼로를 고린도교회에 파송합니다.
구제연보를 받아가지고 오라는 사역을 위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바울과 비전이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외부에 나가면 우리 교우들의 몇 몇 이름들을 거론하며 칭찬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랑합니다.
그들의 이름이 궁금하십니까?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밝힐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 말입니다.
그들 모두는 부족한 사람과 같은 비전을 공유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 교우들이 이강덕 목사가 갖고 달려가는 비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부족한 종과 비전을 공유하는 지체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은 세인교회를 섬기는 담임목사와 비전이 같습니까?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