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헌금(獻金)입니까?2024-03-07 13:55
작성자 Level 10

2020년 11월 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서른 번째 강해)

 

제목헌금(獻金)입니까?

본문고린도후서 8:1-5

 

서론)

 

미국 리디머 신학교의 목회 상담학 교수인 폴 트립은 돈과 섹스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돈에 대한 담론을 논하면서 돈이 현대인들을 약하게 만드는 원인에 대해 4가지의 이유가 있음을 밝힙니다.(폴 트립, “돈과 섹스”, 아바서원,pp,206-208)

1) 고마움을 모르게 한다.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것들을 누릴 자격이 없음을 안다그래서 날마다 자기가 받은 축복을 헤아리면서 당연히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작은 것들에 대하여 고마워하는 반면그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고마워할 줄을 모른다더 가지지 못해 안달이고은혜로 받은 것들보다 아직 자기 손에 들어오지 않은 것들만 눈에 보인다그러니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강요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2) 필요에 목매어 있게 한다.

필요는 이 시대에 가장 많이 악용되고 남용되는 용어다우리들이 스스로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들은 사실은 대부분 필요 없는 것들이다사정이 이러다보니 필요하지 않은 것을 손에 넣는 것이 정당한 권리라고 믿는다필요는 어떤 측면으로 볼 때 사람들의 자기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돈을 추구한다.

3) 만족을 모르게 한다.

내게 있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필요를 잘못 판단하여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것을 필요한 것으로 둔갑시킨다결국 이 필요를 채우지 못하면 끊임없이 불만을 제기하는 자가 된다역시 돈 문제다.

4) 시기하게 한다.

가진 것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을 모르는 자는 항상 늘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이런 삶은 항상 타인이 갖고 있는 것과 나를 비교하여 내가 갖지 못함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다이런 이유로 지나치게 돈을 의식하고돈돈만을 외치는 삶을 살게 되는 불행한 자가 된다.

 

저는 폴 트립의 진단이 100% 완벽한 해석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현대인과 돈의 관계를 대단히 적절하고 근접하게 정리한 내용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위에서 제기한 4가지의 진단이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돈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관계라고 보는 것에 저는 동의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대목에서 한 가지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집니다.

그 유명한 마태복음 6:24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에 기록된 재물은 아람어 맘몬의 번역입니다.

맘몬을 단순히 제물이라고 마태는 기록했지만맘몬은 우상의 극치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영성 신학자인 리처드 포스터는 걸작인 돈과 섹스권력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고 언명하실 때에는 맘몬을 하나의 경쟁의 신(a rival god)으로 인격화시키고 계신 것이다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돈이란 어떤 비인격적인 교환의 매개물이 아니라는 점을 오해의 여지없이 밝히고 계신다.”(리처드 포스터, “돈과 섹스와 권력”, 두란노서원, 1989,p,34.)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맘몬을 우상의 대표적인 신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살벌한 의미의 돈에 대한 해석을 전제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물질에 대한 이해는 어떠해야 하는가?

오늘 설교를 통하여 제가 제시하고 싶은 문제제기입니다.

 

본론)

 

오늘 우리가 나눌 본문은 제가 제기한 문제제기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는 본문이지만 말씀을 에두르면 문제를 제기한 것에 대한 답변을 어느 정도는 답변할 수 있는 본문이기에 최선을 다해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보낸 4번째 편지에 담겨 있는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갑자기 돈 이야기를 꺼냅니다.

아주 생뚱맞은 장면이라고 당황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 압니다.

우리는 지난 7장까지의 강해 설교를 통해 얼마나 살벌하게 바울과 고린도교회 공동체 간의 긴장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해 심도 있게 살폈기 때문입니다.

지난 강해에서 디도가 보고한 전언 중에 고린도교회의 지체 중에 약 반 수 정도의 멤버들이 바울의 세 번째 편지 즉 눈물의 편지’ 혹은 분노의 편지를 받고 회복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아직도 반수 정도의 고린도교회의 공동체 멤버들은 바울의 적대자들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바울이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것인지 생뚱맞게 돈 이야기를 그들에게 꺼냈다는 것은 마치 자살골을 넣은 것과 같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바울의 행보처럼 여겨집니다.

이러한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바울의 돈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아슬아슬한 마음을 갖고 본문을 추적해 보십시다.

먼저 본문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제일 먼저 본문의 시대적 정황을 알아야 합니다.

문자적인 접근을 한다면 마케도냐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많은 환난과 시련이 있었지만 그 교회들이 풍성한 헌금(연보)을 거두어 주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서 언급한 마케도냐 지역의 교회는 어디이며또 왜 그 교회들이 환란과 시련을 당했으며또 그 교회들은 왜 연보를 하였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일반적으로 마케도냐 지역이라고 하면 지금의 그리스 북부지역을 의미합니다.

마케도냐는 데살로니가를 수도로 하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지역을 제 2차 전도여행을 통해 지나가며 복음을 전했고그곳 지역의 회심자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교회들이 바로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 교회들입니다.

헌데 이 교회들은 설립되면서 환란과 시련을 당했는데 말할 것도 없이 종교적인 박해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주로 고백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공동체가 무사할 리 만무입니다.

동시에 본문에 보면 이 교회들은 극심한 가난도 겪었음을 보고합니다.

이들이 가난을 경험했다는 보고는 아마도 정치적인 정황과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나 피지배국의 백성들은 지배국의 수탈로 인해 적지 않은 경제적 궁핍함을 경험하는 것이 일례인데 마케도냐 교회 역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케도냐 교회 공동체는 풍성한 연보를 거두어 주었다고 바울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거두었던 연보의 성격을 규명하겠습니다.

많은 신약학자들은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8장의 연보를 이해하려면 갈라디아서 2:1-10절의 사도회의의 내용을 이해해야 함을 전제합니다.

갈라디아서 2:9-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예루살렘 총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하는 야고보베드로 요한 등등의 지도자들과 이방교회를 대표하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파송된 바나바와 바울그리고 디도와 같은 지도자들 사이에는 할례 논쟁을 끝장내고 외의 4가지 사항에 대한 금령들을 실천하는 데 합의했음을 보고합니다.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움으로 이방 형제들을 괴롭게 하거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대 명제를 전제로 최소한 우상의 더러운 것음행목매어 죽임을 당한 것 그리고 피를 멀리는 하는 칙령은 지키기로 하는 합의를 도출하고 선언하여 유대 및 이방의 전 지역 교회가 이것을 함께 지키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5:19-21)

더불어 갈라디아서의 보고에 의하면 앞에서 언급한 합의 내용과 더불어 또 다른 이면 합의의 내용을 추측할 수 있는데 앞서 설명한 갈라디아서 2:10절에 언급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돌봄과 기억그리고 지원이라는 테제였습니다.

조금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유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나 이방 수리아 안디옥 교회 공동체가 서로 간에 어려운 일을 당하면 물질적인 지원과 공유를 통하여 가난한 성도들을 돕자는 합의를 이룬 것입니다.

이상의 시대적 정황을 전제로 오늘 본문을 접근해야 명쾌한 본문 이해를 통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1:28절을 소개합니다.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질적으로양적으로 부흥의 부흥을 이루며 성장해 나아갔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 속한 선지자들이 수리아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 중에는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있었음을 누가는 보고합니다.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프롭헤테스’ 즉 선지자로 번역된 인물은 구약 성경에 언급된 나비의 이미지가 강한 자들입니다.

무당들이 아니라 성령에 감동되어 성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대신 말해주는 사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가보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는데 그가 한 예언을 합니다.

글라우디오 황제시기에 팔레스타인 전역에 큰 흉년이 들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설명됩니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주후 41-54년까지 재위하며 로마를 통치했는데 역사가들의 보고에 의하면 글라우디오 때에 4번에 걸친 흉년이 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네 번째 임한 흉년이 바로 51년 즈음에 발생한 유대 예루살렘을 덮친 흉년인데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흉년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양식이 부족하여 죽어나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고통 역시 어마어마했을 것은 자명합니다.

바로 이 때 사도회의의 합의대로 이방 교회 공동체에 대하여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 구제헌금을 독려했고이 사역에 많은 교회들이 동참했음을 바울의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차원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 지체들을 향하여 마케도냐 지역 교회 형제들이 보여준 모범적인 구제 헌금 사역을 소개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3-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바울이 아슬아슬하지만 공격적으로 선포한 메시지의 중심적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참 가난한 교회인 마케도냐 지역의 형제들이 적지 않은 경제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형제들을 위하여 연보를 하였는데 그 액수가 풍성했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연보를 해준 마케도냐 지역 교회의 지체들이 실천한 연보의 태도에 대하여 4가지로 나누어 대단히 공격적인 어조로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선포합니다.

① 연보 행함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함으로 실천했다고 했습니다.

② 연보 행하기를 은혜라고 믿었습니다.

③ 연보 행함을 성도 섬기기라고 했습니다.

④ 연보 행하기는 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 주일에 설명하겠지만 이 공격적인 선포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고린도교회 공동체 지체들입니다.

바울에 대하여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는 자들이 상존해 있는 공동체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불안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고린도교회의 반수(半數지체들에게 전한 메시지입니다.

이들은 마케도냐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한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입니다.

이들에게 이런 아슬아슬한 메시지를 전한 이유는 다음 주일에 살피겠지만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연보 사역에 대단히 인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대하여 공을 들였는지 지난 강해들을 통해 살폈습니다.

그들이 다칠까봐그들이 아주 문을 닫을까봐 노심초사하며눈물로 호소도 하고 읍소도 했습니다.

동시에 단호한 분노도 전하며 강온전략을 피며 고린도 교회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헌데 오늘 보고 있는 8장 그리고 앞으로 볼 9장에서 애지중지하며노심초사한 흔적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대단히 단호한 메시지만이 남아 있는 본문 이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저 또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저 역시 조금은 단호해야 하는 설교의 결정체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물러서거나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교훈임을 저 역시 추스르게 되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울은 왜 오늘 본문에서 연보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이렇게 단호해졌을까요?

 

※ 헌금은 반드시 獻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레마를 언어의 유희나 말장난으로 들으면 안 됩니다.

헌금이라는 단어를 풀면 무엇입니까?

바칠 ’()과 ’()입니다.

다시 말하면 받들어서 바치는 물질이 헌금이라는 단어의 원뜻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공격적으로 바꾸겠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을 받들어 드리지 않으면 그건 돈내기이지 헌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받들어서 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제 본문에서 적용하겠습니다.

마케도냐 교회의 지체들이 힘에 지나도록 자원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은혜라고 믿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섬기기라고 믿고 행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표현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연보였습니다.(2)

연보로 번역된 헬라어 하플로테토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관대하게 베푸는 선물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 맥을 같이 하는 단어가 사도행전 11:29절에 기록한 부조입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 단어는 그 유명한 디아코니아의 번역입니다.

즉 섬김입니다.

이 단어들을 설명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분명히 이방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이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을 위해 보낸 것은 관대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섬김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대목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이 행위가 바로 가장 적절한 성경적인 의미의 헌금이라는 점입니다.

헌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받들어 드리는 물질을 헌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름끼치게 만드는 은혜가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 드리는 것이 헌금이라고 이해하는 일반적인 관점을 뛰어 넘어 우리들의 이웃들을 위해 섬기기 위해 사용되는 물질 역시 아름다운 헌금이라는 은혜입니다.

이웃을 섬기는 것이웃의 아픔에 눈감지 않는 것타인을 위해 사용되고 존재하는 물질타인의 아픔을 보듬는 물질이 바로 헌금입니다.

그렇습니다.

전통적인 개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드리는 헌금생활만이 헌금이라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부조’ 즉 연보는 특히 하나님께 받들어 드리는 헌금 중에 보석 같은 헌금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자신을 위해 드리라는 메시지였다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오늘 마케도냐 교회 성도들의 헌금 생활을 소개하며 경쟁심리를 동원하는 무리수를 결코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아슬아슬한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마저도 물러서지 않고 연보 사역에 대하여 강력하게 권면하고 독려한 이유는 이 사역이 진짜 헌금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소개했던 리처드 포스터는 또 이렇게 갈파했습니다.그리스도께는 돈이란 우리가 그 분에게로 향하기 위해서 그것으로부터 돌아서야 하는 우상숭배다왜냐하면 맘몬은 실제적으로 많은 신적(diety)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리처드 포스터위의 책,p,36.)

프랑스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신학자인 쟈크 엘륄은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한 부담을 지웠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한 사람을 삶의 진리 한 가운데에그리고 우리 앞에 세우셨습니다가난한 자들은 우리 앞에 제기하는 하나님의 물음입니다하나님께서 이 물음을 우리에게 제기하심으로써우리들의 책임이 있는 대답을 요구하십니다이 물음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입니다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자크 엘륄, “하나님이냐 돈이냐?”, 대장간, 2010,p,180.)

그것(맘몬)에 목을 걸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방향이 그 분(주군과 이웃)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없이는 우리는 진정한 헌금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이제 11월을 맞이했습니다.

금년 2020년은 그 어느 때의 해보다도 어려운 시기를 보낸 한 해입니다.

해서 쓰러지고 자빠지는 우리들의 이웃들이 너무 많은 한 해를 보냈습니다.

11월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감동적인 일을 만들어내는 달입니다.

기실우리 세인 지체들은 매일매달 감동적인 일을 만들어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본래 목사들이 제일하기를 두려워해서 기피하는 설교가 헌금설교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대단히 기쁜 마음으로 헌금 설교를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한 설교 준비를 만족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이 받으시는 물질은 헌금일 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든지오늘 설교의 핵심적인 가치인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 드리는 연보나 부조이든 관계없이 받들어 봉헌하는 헌금일 때만 받으십니다.

처음에 교회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사람들의 교제 모임이었다그러나 그 후로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하여 철학이 되고로마로 이동하여 제도가 되었다그 다음에 유럽으로 건너가 문화가 되었고미국으로 왔을 때 기업이 되었다.” (박득훈, “돈에서 해방된 교회”, 포이에마, 2014,p,80.)

미국 상원의회에서 사역했던 리처드 헬버슨 목사의 갈파를 박득훈 목사가 인용한 글입니다.

헌데 설교 원고를 작성하다가 문득 이 문장 다음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준비 중에 제게 임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위험하지만 도전해 보고 싶은 문장 두 개가 생각났습니다.

그 다음 한국에서는?

Ⓐ 대기업이 되었다.

Ⓑ 카타콤베데린구유의 초심 공동체가 되었다.

전자의 평가는 받는다면 우리는 교회 문을 차라리 닫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한국교회우리 세인교회가 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교회는 이 땅의 마지막 보루가 될 것입니다.

정기 당회를 통해 장로님들과 나누겠지만 11월은 우리 교회가 이웃들을 위해 헌금하는 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달로 만들어 볼까 합니다.

코로나 19라는 괴물의 무차별적인 폭격을 받은 2020너무 아픈 이웃들이 지천에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우리가 헌금을 하는 사역이 진행된다면 너무 귀하고 아름답게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귀한 사역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헌금을 하고 있습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살아왔네

금은보화 자녀들까지 주님 것을 내 것이라

아버지여 철없는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맡긴 사명 맡긴 재물을 주를 위해 쓰렵니다

 

천한 이 몸 내 것이라고 주의 일을 멀리 했네

주신이도 주님이시오 쓰신 이도 주님이라

아버지여 불충한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세상 유혹 다 멀리 하고 주의 일만 하렵니다

 

주님 사랑 받기만 하고 감사할 줄 몰랐었네

주님 말씀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었네

아버지여 연약한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명령 순종하면서 주를 위해 살렵니다